[영화비평]
<어느 가족>,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가족의 세계에서 어떤 죽음을 고민하다
2018-08-16
글 : 홍수정 (영화평론가)
<어느 가족>을 마음 다해서 지지할 수 없는 이유

<어느 가족>이 이룬 성취는 무수히 회자되고 있으며 대체로 수긍이 가는 바이지만, 나는 영화의 단 한 장면이 목에 걸려 이 작품에 온전한 찬사를 보내지 못하고 있다. 그 장면은 그냥 넘기기에는 끝내 미심쩍게 느껴지기에 영화의 여기저기를 경유한 뒤에 다시 한번 바라보고자 한다. 쇼타(조 가이리)가 마트에서 양파를 훔치고 달아나다가 다리 아래로 떨어지던 바로 그 장면 말이다. 우선은 영화에 등장하는 가족부터 소개하며 글을 시작하여야 할 것 같다.

뛰어내린 것은 왜 하필 쇼타인가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작품에서 가족의 세계가 죽음을 품는 것은 흔한 일이나 <어느 가족>의 특별한 점은 죽음이 이 가족을 유지시키는 동력이 된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하츠에 할머니(기키 기린)가 남편의 죽음과 변심의 대가로 받는 돈으로 살아가며, 그녀의 죽음은 다시 한번 (그녀가 남긴 돈으로써) 가족의 생존을 연장시킨다. 그 죽음에는 단순히 육신의 죽음뿐 아니라 사회적 관계의 단절도 포함된다. 노부요(안도 사쿠라)는 별수 없이 해고를 받아들이며, 오사무(릴리 프랭키)는 산재 처리를 해주지 않는 회사에 대하여 별다른 항의를 하지 않은 채 가족 곁에 머문다. 그들은 하츠에 할머니의 죽음도 외부에 알리지 않고 가족 내부의 비밀로 묻는다. 일반적인 가정은 사회의 서비스를 통하여 그들의 환부를 치료하지만 이들은 상실의 순간마다 사회의 개입 아래 무너질 가족의 운명을 먼저 걱정한다. 그렇기에 마치 몸통을 살리기 위하여 꼬리를 잘라내고 도망가는 도마뱀처럼, 이들은 약해진 환부를 적당히 도려내고서 피를 뚝뚝 흘리며 서둘러 그 자리에서 달아나버린다. 오사무는 아이들에게 좀도둑질을 가르치며 가족의 역사를 만들어보려고 애쓰지만 외부와의 접촉도, 구성원의 존재도 지워버리는 이 가족에게서 과거나 미래를 찾기는 어려워 보인다. 고요하고 안락하게 유지되는 이 가정의 평화는 자못 아름답지만 어딘가 모르게 죽음의 상태와 맞닿아 있다.

그러나 이들 중에서 쇼타는 홀로 이질적이다. 그는 책가방을 메고 지나가는 또래들을 부러운 듯 돌아보고, 집에서 교과서를 또박또박 읽는다. 욕망과 호기심으로 반짝이는 눈빛은 성장기 아이의 특징이 아니던가. 성에 호기심을 갖는 모습에서 다시 한번 느껴지듯이 쇼타는 지금 왕성한 성장기에 있다. 또한 그의 성장에는 사회와의 만남이 필요해 보인다. (아마도 헤어숍에서 자른 것 같은) 새로운 커트머리가 잘 어울리고, 학교 생활을 자랑하듯 떠드는 쇼타를 집 안에만 가두어두기란 힘든 일이다. 집에서는 만남을 배울 수 없다는 경찰의 말에 쇼타는 고개를 끄덕인다. 마치 제자리에 고인 것처럼 보이는 가족들과 다르게 이 아이에게서는 삶을 향해 나아가는 왕성한 생명력이 느껴진다. 쇼타가 다른 가족들과 또 한 가지 다른 점은 그가 가족의 규칙에 완전히 포섭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가족의 영속에 위협이 될 때에는 도마뱀의 꼬리처럼 언제든 버려져야 한다는 규칙 말이다. 홀로 이별을 준비하는 하츠에 할머니와 달리 쇼타는 자신을 두고 도망가는 가족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사회와의 접촉이 필요한 동시에 가족의 품을 원하는 성장기의 아이, 쇼타의 이질성은 이 가족 안에서 위태롭게 유지되고 있다.

이제 결정적 장면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가 온 것 같다. 쇼타가 다리에서 뛰어내리는 장면의 연출은 잠시 동안 어떠한 착각을 유발한다. 카메라는 쇼타의 생사 여부를 의도적으로 숨기며, 둔탁한 추락의 소리와 불길하게 흩어지는 양파의 모습만을 관객에게 제시한다. 비록 짧은 순간이지만 관객은 쇼타에게 최악의 불상사가 일어났을지도 모른다는 착각을 하게 된다. 이어지는 병원 장면을 보고서야 비로소 우리는 쇼타가 죽지 않고 살아났다는 사실에 안도한다. 이상한 일이다. 다리 아래 쇼타의 모습을 비추는 것만으로도 그의 생존을 확인할 수 있는 순간에 영화는 어째서 우리로 하여금 이러한 착각을 하도록 유도하는가. 그 의도를 모두 알 수는 없으나 여기에서 확실하게 느껴지는 효과는 있다. 우리는 쇼타가 그저 ‘다쳤다’는 확신 대신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함으로써 다음 장면에서 쇼타가 ‘죽지 않고 살아났다’는 사실을 더욱 강렬하게 받아들인다. ‘죽지 않았다’는 사실이 강조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정보는 오사무와 노부요를 통하여 발화됨으로써 아이가 가족의 품으로 돌아왔다는 사실 역시 도드라진다. 사회로부터 덜미를 잡혔을 때 그대로 사라지지 않고 가족의 품으로 회귀하는 것, 이것은 가족의 규칙을 정면으로 배반하는 행위다. 곧이어 가족들이 야반도주를 시도하다 경찰에게 붙잡히는 장면이 등장한다. 그 과정은 필사적이던 쇼타의 질주와는 다르게 무력하고도 자연스럽게 그려지기에, 이 가족이 도주에 실패했다기보다 차라리 경찰 앞에 옹기종기 모여든 것처럼 보일 정도다. 이들의 일망타진은 쇼타가 그 다리 아래에서 죽지 않고 살아나서 가족에게 돌아왔을 때, 즉 가족의 규칙을 어겼을 때 이미 예정된 것이다.

그런데 쇼타가 추락하는 장면에는 의아한 점이 있다. 쇼타는 삶에 대한 욕구가 왕성하며 배움이 빠르고 비교적 영리한 아이다. 그런 아이가 경찰에게 붙잡히지 않기 위하여 얼핏 보아도 위험한 거리를 망설임 없이 뛰어내렸다는 사실은 쉽게 납득되지 않는다. 더구나 이 아이는 도둑질로 유지되던 가족의 일상에 의문을 품지 않았던가. 그러나 쇼타를 기준으로 쉽게 이해되지 않는 이 장면은 영화의 맥락상 필수적이다. 다음 장면에서 가족 모두는 경찰서에 꼼짝없이 붙잡힌 채 각자의 진심을 토해내니 말이다. 즉, 이들 중 누군가는 가족 모두를 경찰 앞에 불러모으는 역할을 맡아야 했다. 그러므로 우리의 질문은 ‘쇼타는 왜 뛰어내렸나’가 아니라 ‘뛰어내린 것은 왜 하필 쇼타인가’로 정정하여야 옳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이미 위에서 언급하였다. 왕성한 생명력을 가진 동시에 이 집의 규칙에 포섭되지 않은 사람, 추락한 다리 아래에서 되살아나서 아픈 몸을 이끌고 가족을 찾을 사람은 다름 아닌 쇼타다. 그렇게 영화는 도마뱀의 꼬리를 붙잡고서 그것의 몸통까지 손에 넣게 된다.

누군가는 죽어야 했다

이것이 쉽게 붙잡히지 않던 하나의 가족 안으로 영화가 들어가는 방법이다. 그러므로 저 장면에서 우리는 쇼타가 추락했다기보다, 누군가가 반드시 추락해야 하는 그 다리 위로 영화가 쇼타를 이끌었다고 말해야 한다. 그러나 영화가 한 세계의 문을 여는 방법이 진정 어린아이의 몸에 상처를 새기는 것뿐인가. 이 순간 쇼타의 얼굴에는 인간적인 감정 대신 영화적 의무를 이행하는 자의 굳은 표정이 자리잡고 있다. 그의 얼굴을 보았을 때 나는 영화가 유리(사사키 미유)와 노부요의 몸에 남은 흉터를 아프게 바라보던 장면의 감동을 의심하게 된다. 영화 전반부의 단단한 행복, 그리고 후반부의 아릿한 슬픔을 긍정하면서도 그 연결고리에서 묻어나는 섬뜩함을 쉬이 잊기는 힘들다. 그리고 다시금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영화가 하나의 세계를 상처 입히지 않고 그 안으로 들어서는 것은 과연 얼마나 힘든 일인가. 그 빼어난 성취에도 불구하고, <어느 가족>을 마음 다해서 지지할 수 없다는 것은 못내 안타까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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