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인랑>의 도입부. 빨간 망토의 소녀는 폭탄이 든 가방을 테러리스트에게 전달한 다음 지하의 컴컴한 수로로 돌아온다. 그녀 앞엔 서너명의, 그녀보다 어린 아이들이 음료 팩을 빨아먹으며 서 있다. 얘들도 폭탄 가방을 들고 들락거렸을까. 소녀는 질문할 틈도 없이 하얀 음료 팩과 두 번째 폭탄 가방을 받아든다. 그리고 얼마 후, 특기대의 임중경(강동원)과 맞닥트린다. 그만 있었다면 소녀의 행동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사방에서 검은 옷의 짐승 같은 존재들이 압박하자 그녀는 극단적인 행동을 선택한다. 중경은 잠을 못 이룬다. 소녀는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 <인랑>에서 소녀들은 수난의 시대를 산다. 특기대는 앞서 잘못된 정보 아래 출동한 현장에서 10여명의 소녀를 쏘아 죽였다. 중경은 소녀들의 피가 자기 몸 위로 흐르는 기분을 느낀다. 소녀보다 몇살 더 많은 여주인공이라고 해서 하나도 나을 건 없다. 구미경(한예리)이 이윤희(한효주)를 마지막으로 보며 한 말은 “살아남아, 아무도 믿지 마”였다. 윤희는 섹트에 들어간 이유를 중경에게 설명하다 “어떻게든 살고 싶었어”라고 했다. <인랑>의 배경은 21세기에서 20여년이 지난 시간이다. 통일의 꿈이 거의 실현되려는 시간. 김지운은 <인랑>의 엔딩에서 미래를 준비하는 자들에게 바치는 영화임을 명확히 밝혔다. ‘과거를 상상하고 미래를 기억하라.’ 하루를 살아가기에도 힘든 소녀와 여성들을 줄줄이 배치해놓고 김지운이 미래를 힘주어 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녀들이 <밀정>(2016)의 한계순(한지민)처럼 미래를 위해 희생되어야 하는 존재라는 뜻일까.
<인랑>은 격렬하게 사는 여성들의 반대편으로 중년의 남성들을 늘어놓는다. 조직 밑으로 소녀와 여성들을 포섭해 이용하는 자들이며, 그들 중에서도 최상위에 올라앉은 자들이다. 불꽃이 튀는 바깥세상과 격리된 공간에서 그들은 낮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눈다. 공안부장 이기석(허준호)이 정치적인 대화를 나누는 곳은 마피아영화에 나올 법한 화려한 이발소다. 직원들이 미리 안전 점검을 마친 후에야 그는 우아하게 들어서서 면도를 받는다. 그는 부리는 사람들의 현실이나 꿈에 대해 한마디도 나누지 않는다. 그는 경쟁하는 권력이나 조직과 싸워 이기는 것 외에 어떤 관심도 없다는 듯이 군다. 주어진 이데올로기를 지지하는 척 행동하는 그는 기실 거기에 기대 숨쉬는 자다. 운동의 법칙이 내장된 양 체제가 계속 나아가려고 애쓰는 동안, 그는 그것이 계속 유지되도록 기여해야만 한다.
김지운 영화의 인물 구도는 대부분 상하관계로 형성된다. 만약 군림하는 인물이 없다면 체제가 그 역할을 대신한다. 데뷔작 <조용한 가족>(1998)에는 그런 관계를 다룬 흥미로운 대사가 나온다. 큰딸 미수(이윤성)의 대사, “우리 가족은 개인플레이거든요”처럼 김지운의 주인공들은 거의 다 자유로운 영혼을 지닌 자들이다. 하지만 그들이 속한 현실은 자유와 거리가 멀다. 가장(박인환)의 대사, “나 혼자 먹고살자고 이런 짓 꾸미는 줄 알아?”는 곧 지배자의 언사다. 김지운은 억압에 처한 인물의 몸부림을 즐겨 다루는데, 그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게 단편 <커밍아웃>(2000)의 엔딩이다. 막 자기 정체성을 찾은 여성의 침대 위로 카메라가 이동하면 르네 마그리트의 것으로 보이는 그림 한점이 걸려 있다. 같은 색깔과 모양의 중절모를 쓰고 동일한 디자인의 슈트를 입은 수십명의 남자들이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다. 그것만으로는 무서울 게 없다. 그들이 창밖에 빼곡 서서 집의 내부를 응시하고 있기에, 나는 오싹했다. 김지운은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무장한 무감각한 집단의 지배를 두려워한다. 그렇다면 김지운의 인물(들)은 반집단주의 성향의 자유주의자(들)인가.
김지운식의 리버럴리스트를 대표하는 캐릭터는 그간 송강호의 몸을 거쳐 표현되었다. <조용한 가족>에서 큰아들 영민은 폭력 전과자이면서 몸싸움에 별 재간이 없으며, 가족 전체가 표준어를 쓰는데 혼자 경상도 억양으로 서울말을 흉내낸다. 잘살아보겠다고 힘을 모으는 상황에서 숙박비를 빼돌리는 것도 그다. <반칙왕>(2000)의 대호는 이름에 안 어울리게 소극적이고 무능한 직장인이다. 싸우는 법을 배우면서도 레슬링 규칙 바깥의 반칙을 구사한다. 영민과 대호는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2008)의 태구로 화려하게 발전한다. 하도 엉뚱해서 ‘이상한 놈’인 그는 창이(이병헌) 같은 악당도 아니고 도원(정우성)처럼 항일운동에 발을 걸친 인물도 아니다. 그는 오로지 자신의 길만을 간다. 아무도 정해놓지 않은 길. 엔딩에서 그가 모터바이크에 몸을 싣고 가상의 만주 벌판을 미치도록 달리는 건 그래서다. 그는 어딘가를 향해 달리는 게 아니다. <밀정>의 정출은 장 피에르 멜빌의 <그림자 군단>(1969)에서 시몬 시뇨레가 분한 마틸드를 다시 읽게 만드는 인물이다. 마틸드는 배신자로 처형당한다. 하지만 정출이 적이나 동지로 쉽게 분류될 수 없는 인물인 것처럼, 마틸드는 남성적 권력과 명령이 지배하는 레지스탕스의 무게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인랑>의 중경은 분명히 태구와 정출의 후예지만 하나의 지점에서 그들과 또 다른 인물이다.
김지운이 청년에서 중년으로 이동하면서 만든 인물들은 이미 자유주의자의 삶을 결정했거나 행하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중경은 다르다. 그는 테러를 막기 위해 조직된 특기대의 에이스다. 극중 집권 정당의 정치적 색채가 나오지 않기에 그의 정치적 성향이 어떤 것인지 알 수는 없다. 그가 윤희를 처음으로 만나러 나가기 전, 카메라는 내무반 내 그의 관물대를 슬쩍 비춘다. 그는 죽은 소녀의 다이어리를 집어드는데, 그 곁으로 두권의 책이 꽂혀 있다. 바로 옆으로 장 코르미에의 <체 게바라 평전>이, 그 곁으로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이 희미하게 보인다(원작에서는 결말을 암시하는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꺼내든다). 중경의 의식 수준은, 전당포 노파를 죽이기 전의 라스콜리니코프의 그것에 머물러 있다. 사악하고 어리석은 노파 하나쯤 죽여 그녀의 돈이 필요한 사람들을 구원할 수 있다면, 그게 무어 나쁜가. 특기대가 테러리스트를 죽이게끔 훈련할 때 교육받은 바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중경은 아직 체 같은 젊은 혁명가도 못 된다. 그런 그에게 다가온 윤희는 <죄와 벌>의 소냐와 같은 존재다. 하지만 숭고한 인간애의 문턱을 넘어서기에는 <인랑>의 중경이 갈 길은 너무 멀다. 김지운에게 중요한 것은 그가 자유주의자로 들어서는 순간이다.
<인랑>, 중경은 멜로드라마의 주인공이 아니다
혹자는 <인랑>이 원작의 결말을 멜로드라마로 바꿨다고 비난한다. 원작이나 김지운의 영화나, 남자와 여자는 머릿속으로 치열하게 멜로드라마를 전개한다. 그게 그들에게 지옥이 된다. 다른 건 결말인데, 중경의 선택이 흡사 멀쩡하던 이야기를 멜로드라마화한 양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 클라이맥스에서 남자에게 주어진 선택은 사랑으로 인한 갈등이 아니다. 인간이든 사람이든 사랑하는 존재를 죽이지는 않는다. 만약 살인을 택한다면 그건 사랑일 수 없다. 그러므로 남자에게 주어진 선택은 조직의 명령을 따를 것이냐, 아니면 그것에서 벗어날 것이냐의 문제다. 마침내 중경이 상관인 진태(정우성)에게 하는 말은 “이제 제 생각대로 살겠습니다”다(늑대가 길들여지지 않는 짐승임을 감안하면 김지운의 결말이 본능에 더 맞다). 이어 그의 첫 행동은 조직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즉, <인랑>의 결말은 피억압자의 위치에 머물던 인물이 선택할 수 있는 두가지 선택 중 (원작이 가지 않은) 다른 길을 걷는 것으로 읽어야 한다. 그 순간, 중경은 태구로 변한다. 태구가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듯이, 김지운은 중경의 다음 걸음을 설명하지 않는다.
사실 자유주의자는 비운의 이름이다. 다른 일로 본, 페르난도 E. 솔라나스와 옥타비오 헤티노의 프로파간다 선언 <불타는 시간의 연대기>(1968)에서 ‘좌파 민족주의자들이 부르주아나 중산층보다 더 혐오했던 게 자유주의자임’을 재확인했다. 30여년 전, 신입생이었던 나는 흠모했던 은사로부터 “세상에서 제일 나쁜 게 자유주의자”라는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 이유는 간단하다. 경제적인 의미의 자유주의자는 반마르크스주의자에 가까운 까닭이다. 시장경제의 원리를 칭송하고, 소련과 동구의 변신을 여태 공산주의 패배의 증거로 내세우며, 역겨운 <선택의 자유>에 길들여진 자들이 어느덧 자유주의자를 대표하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그들과 김지운의 인물을 동일시하면 곤란하다. 김지운의 인물은 정치적이거나 종교적인 의미에서의 자유주의자다(아니면 그의 말대로 개인주의자이거나). 이렇게 방어벽을 쳐두어도 중경에 대한 손가락질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아마도 그건 그의 모호함 때문일 것이다. 자신의 노선을 먼저 밝혀야 하는 나라에서 중경은 자기 노선이 무엇인지 끝내 말하지 않는다. 그것으로 미움을 받는다면 그것 또한 그의 운명이다.
그녀는 자신의 길을 갈 것이다
김지운식으로 이상화된 중경과 비교해, 여성 캐릭터인 윤희와 미경은 현실적이다. 이 부분은 남성 캐릭터를 주로 그려온 김지운의 어떤 한계다. 다만, 전사를 알 수 없는 중경이 관념적인 세계에 머무는 것과 견주어, 버거운 현실을 헤쳐나온 윤희와 미경이 선택한 지점이 더 자연스러워 보인다. 도입부에서 죽은 소녀의 선배이면서 재현이라 할 윤희는 빨간 망토의 동화를 되풀이해 이야기한다.
나는 예전부터 <빨강 망토>의 엄마나 할머니를 이해할 수 없었다. 심지어 <인랑>의 원작에 나오는 버전에서는 소녀가 입은 쇠옷이 다 닳아야 엄마와 만날 수 있다. <인랑>을 유심히 보면 중경과 진태와 상우(김무열)가 서로 윤희를 떠미는 게 관찰된다. 그들은 그녀를 떠넘기거나 그녀가 사라지기를 바란다. <빨강 망토>도 그러하다. 이건 자식과의 관계에 지친 어미가 짐승과 연합했다 역으로 당하는 이야기가 아닌가. 모 영화제에서 곧 상영될 러시아 다큐멘터리 <늑대와 일곱 꼬마들>(2017)을 보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비윤리적이라고 욕하기 전에, 가장 오래된 관계의 피곤이 인간에게 어떤 행동을 초래할 수 있는지를 상상해보라. “소녀는 누구를 원망해야 하나요?”라고 거듭 질문하던 윤희의 선택은 아이러니하다. 그녀는 과거의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것과 전혀 다른 관계를 꿈꾼다. 윤희는 중경에게도 “같이 멀리 떠나자”고 부질없이 재촉한다. 그녀와 중경의 미래가 다른 건 사랑과 상관없는 문제다. 김지운은 <인랑>의 엔딩에서 <제3의 사나이>(1949)의 구도를 뒤집어놓았다. <제3의 사나이>의 엔딩에서 남자는 왼쪽 수레에 기댄 채 여자를 기다린다. 장례식을 마친 여자는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지나가버린다. 떨어지는 낙엽 아래서 그는 담뱃불을 붙인다. 이 장면을 떠올릴 때면 낭만성에 도취되곤 했다. 그런데 <인랑>을 보고 다시 그 장면을 떠올렸을 때, 남자가 처절한 자기 인식에 도달하는 순간임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자유주의자의 흉내를 내는 그를 절대 사랑하지 않을 것이다. <인랑>의 엔딩에서 그녀는 남에서 북으로 가는 열차에 몸을 싣는다. 그는 오른쪽 벤치에 앉았다 다시 기둥에 비스듬히 서서 그녀를 바라본다. 그는 아직 갈 길을 정하지 않았지만 그녀가 자신의 길을 걸어가도록 도운 사람이다. 그래서 그녀는 미소를 짓는다.
애니메이션 <인랑>(1999)과 <제3의 사나이>는 종전의 황폐함과 쓸쓸함을 지닌 작품이다. 전쟁을 갓 통과한 기성세대의 패배감, 길을 잃은 자들의 정서가 두 영화에 깔려 있다면, 김지운의 <인랑>의 주인공은 미래를 살아야 할 청년들이다. 극중 발상처럼 통일을 앞둔 어떤 세계를 전제로 한 이야기에서, 김지운이 자기 세상으로 나아가는 두 젊은이를 말미에 배치한 것은 아름다운 결정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희망은 촌스러운 말이 아니다. 원작의 그 절망적인 시간에서도 여자는 “당신도 외로울 거라 생각하면 자꾸 희망을 가지게 된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윤희는 동생과 함께할 집(혹은 가족)과 인간을 선택했지만, 중경은 아직 걸음을 옮기기 전이다. 미래를 유예한 그를 힐난하기보다, 나는 그곳에 어떤 꿈이 둥지를 틀기를 바라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