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 맞아요?” 14살 경언(이재인)은, 함께 사기를 치자는 삼촌 재민(엄태구)을 향해 쏘아붙인다. <어른도감>은 아빠의 죽음을 맞은 소녀 경언에게 그동안 연락이 없던 수상한 삼촌 재민이 찾아오면서 벌어지는 코믹 드라마다. 재민은 경언에게 남겨진 보험금 8천만원을 챙겼고, 그 돈을 갚는다는 빌미로 동네 약사를 ‘등쳐먹을’ 계획에 조카를 끌어들인다. 의심의 눈초리로 시작된 관계가 시간이 지나 서로의 외로움을 이해하기까지, 영화는 서두르지 않고 둘의 호흡을 따라 전진해 나간다. 코믹, 멜로, 버디무비까지. 지금 극장에서 가장 찾기 힘든 장르들의 결합. 김인선 감독은 자극적이지 않지만 다시 찾게 되는 건강한 드라마를 완성해낸다. 멀리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1993)부터 <어바웃 어 보이>(2002)까지, 우리가 사랑했던 드라마들에 대한 기억을 소환하게 만드는 <어른도감>의 매력을 들어보았다.
-제19회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넷팩상을 수상하면서 큰 호응을 얻고 개봉까지 하게 됐다.
=첫 상영 때는 너무 긴장해서 두드려맞은 것 같더라. 두 번째 보니 관객이 어느 지점에서 웃는지 반응들이 조금 보였다. 상은 기대도 안 했는데, 서울에 와서 수상 연락을 받았다. “저 지금 다시 내려갈게요” 했더니 5분 뒤 수상이라며 대리수상자 없냐고 묻더라. (웃음)
-첫 장편 작업이다. <어른도감>은 어떻게 만들게 된 작품인가.
=한국영화아카데미 장편과정(10기)에 지원하기 전, <암살>(2015) 연출부로 참여했다. 그때 최동훈 감독님이 연출부원들한테 영화를 추천해주셨다. 각자한테 “너는 어떤 영화를 하고 싶어?” 하고 묻고 맞춤형으로 작품을 말해주셨는데, 그때 추천해준 영화가 <페이퍼 문>(떠돌이 사기꾼 모세가 엄마를 잃은 9살 고아 소년을 만나 벌어지는 로드무비, 피터 보그다노비치 감독, 1973)이었다. 원래 조카, 삼촌 관계로 써놓은 이야기였는데 장편 과정에서 할아버지, 소녀간의 이야기로 발전시켰다가 벽에 부딪혔다. 그 영화를 힌트로 삼촌과 조카 관계로 다시 돌아갔다.
-90년대 로맨틱 코믹물, 혹은 버디무비가 연상되는 작품이다. 한국영화아카데미 장편과정의 화제작들인 <파수꾼>(2010), <짐승의 끝>(2010), <소셜포비아>(2014) 등 장르성이 강한 이전 작품들을 생각해보면, 다소 낯설기도 하다.
=싫어하시더라. (웃음) 선생님들께 ‘애매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그만큼 약점이 있었다. 상업영화도 아닌데 상업영화의 톤 앤드 매너로 밝고 무겁지 않게 가려다보니 애매해질 수밖에 없었던 거다. 말씀하신 대로 그전 아카데미 장편과정 작품들은 진지하게 사회문제에 접근한 작품들이 다수이다보니 방향적으로도 좀 동떨어져 보였다. <잉투기>(2013)를 빼고는 코믹 성장영화가 호응을 얻은 경우도 많지 않았다. 그래서 주인공을 조카와 삼촌이 아닌 삼촌만으로 가자는 의견도 있었다. 아이가 주도하는 영화의 상대역을 구하는 것도 현실적으로 쉽지 않을 거라는 우려에서였다. 그럼에도 나는 버디무비를 끝까지 고수했다. 주변의 시선에 너무 나 스스로를 압박하지 말자고 마음먹었다. 선생님들도 의견은 주시지만 강요하는 분위기는 아니었고, 그렇게 차츰차츰 방향을 잡아갔다.
-어른 재민이와 아이 경언이가 역전된 듯한 관계에서 오는 재미가 드라마에 코믹한 리듬을 만들어낸다.
=마틴 스코시즈 감독의 <앨리스는 이제 여기 살지 않는다>(1974)를 보면 가수의 꿈을 찾고 싶어 하는 엄마 앨리스와 조숙한 아들이 등장한다. 앨리스는 모성애가 없지는 않지만 의지가 약하고 혼자일 때 더 불안해한다. 그런 마음을 어린 아들이 지탱해주는 거다. 나는 이 어른스런 아이를 소년에서 소녀로 바꾸어서 생각해보고 싶었다. 코언 형제의 <더 브레이브>(2010)를 보면 소녀가 자기 아버지를 죽인 살인범을 찾기 위해 헌터와 결탁한다. 소년 모험물은 많지만 소녀의 모험서사는 많지 않은데, 이 영화의 소녀는 육체적으로 약하지만 너무 멋있다. 경언이가 그런 느낌을 갖길 바랐다.
-소년의 설정을 소녀로 가져온 것처럼, 단편 작업에서부터 여성이 주인공인 작업들을 해왔다. <아빠의 맛>에서는 떨어져 산 아빠를 만나는 딸의 심정을, <수요기도회>에서는 도박에 빠진 여성을 도와주는 여성간의 연대를 그리기도 했다.
=너무 당연한 이야기지만, 내가 여성이니 영화에 그 지점이 반영될 수밖에 없다고 본다. 여성의 서사도 재밌을 수 있다. 어릴 때 우리가 남자가 주인공인 영화나 소년만화를 재밌어했듯이, 할 수 있는 한 여성이 이끄는 재밌는 작품들을 만드는 게 지속적인 나의 과제다.
-삼촌과 조카의 버디무비이자 점희(서정연)까지 결부되면서 서로 외로운 지점들을 돌아봐준다. 영화에서 ‘누군가에게 시간을 들인다는 것은 삶의 일부를 주는 것’이라는 대사가 임팩트 있게 다가온다.
=혼자만 있으면 변화의 계기가 별로 없는데, 다른 사람과 시간을 보내게 되면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게 친구일 수도, 연인일 수도, 가족일 수도 있다. 재민에게는 경언이가 그런 가능성을 제공해주는 존재다.
-기존의 무거운 톤을 벗고 철없는 삼촌 역을 소화한 엄태구 배우의 변화와 신예 이재인 배우의 발탁이 이룬 합이 성공적이었다.
=엄태구 배우의 경우는 나도 삼촌 역을 안 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들어보니 “요즘 놀고 있다”고 하더라. (웃음) 사실 <밀정>(2016)에서의 강렬함 때문인지 세고 강한 악역이 많이 들어와서 힘을 빼고 할 수 있는 이 역할을 좋게 봐준 것 같다. 재인이는 <옥자> 오디션을 보기도 했었는데 <옥자>의 연출부 친구가 <암살>의 스크립터였고, 이번에 우리 영화 조연출이어서 추천해줬다. 경언의 죽은 아빠 역할의 최덕문 배우는 <암살> 때 인연을 맺었고, 서정연 배우는 <수요기도회>의 인연으로 다시 함께했다. 고맙게 김새벽 배우도 카메오 출연을 해줬다. 판사 역을 한 이정은 배우도 웹드라마 <출출한 여자> 시즌2를 연출할 때 같이했었다.
-그간 단편 경험과 현장 참여가 지금의 장편에 큰 도움으로 이어졌다.
=사실 <수요기도회>가 아니었으면 장편을 못 만들었을 수도 있겠다 싶다. <아빠의 맛>은 잔잔하게 좋지만, 장편을 이끌 연출가인지 의심이 간다는 평을 들었다. 그러다 <수요기도회>를 만들면서 영화의 ‘손맛’을 알게 되었고, <암살> 때 연출부로서 한 현장 경험이 이번 영화를 할 때 도움이 되더라. 이옥섭, 유지영 감독 등이 아카데미 동기인데 다들 개성이 뚜렷한 데 비해 나는 늘 드라마에 치중한 영화를 좋아하다보니 애매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왔다. 내 색깔을 갖고 나를 증명하는 것이 항상 어렵더라. 그런데 최근 들어 <우리들>(2015)의 윤가은 감독, <소공녀>(2017)의 전고운 감독님처럼 보고 싶은 영화를 만드는 선배 감독님들을 보면서 조금씩 힘을 얻고 있다.
-차기작이 궁금하다.
=최근 가쿠다 미쓰요의 소설이자 일본에서 영화화되기도 한 <종이달> 각색 작업을 했다. 여성 범죄물이라 <수요기도회>를 보고 의뢰를 하셨다더라. 지금은 또 한편의 여성 성장물도 구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