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짧게 김지운의 <인랑>에 대한 얘기로 글을 시작하려 한다. 나는 이 영화를 뒤늦게 IPTV로 봤는데 이 영화에 대한 기왕의 평점이 의아하게 여겨졌다. 김지운의 최고작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김지운의 지난 필모그래피를 전부 부정할 만큼 이 영화의 완성도가 처진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김지운의 이전 영화 중에 흥행과는 무관하게 그의 대표작으로 평가받는 <달콤한 인생>(2004)에서 이병헌이 연기하는 주인공 선우는 나르시시스트로서의 단독자이고 자기가 이해하지 못하는 조직에 맞서 싸운다. 애니메이션이 원작인 <인랑> 역시 그런 점에서 김지운의 개인적 지향과 맞는 지점이 있을 터인데 주인공과 조직의 대결을, 납득할 만한 서사의 고정점이 없었던 <달콤한 인생>과 마찬가지로(이 영화에서 선우는 자신을 파괴하려고 한 조직의 보스에게 “내게 왜 그랬어요?”라고 묻는데 이는 관객이 서사에 갖는 의문과 동일하다), 실사영화 <인랑>은 애니메이션 원작과 달리 주인공 임중경(강동원)의 고뇌에 과도한 자기연민을 부여하며, 그가 여주인공 이윤희(한효주)를 살려주기 위해 희생을 무릅쓰는 것으로 결말을 맺는데, 전후맥락으로 보면 여기에 어떤 서사적 비약이나 구멍이 있다고 관객이 오해할 만하다. 원작에서 주인공은 문명의 보호를 자임하는 국가기관의 속성이 이해관계를 건 약육강식의 야수적인 속성을 지니고 있고, 그 조직에 속한 자신의 본성을 조직의 그것과 일체시킨다. 이는 반체제 기관의 속성도 마찬가지여서 조직원인 여주인공은 그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하나 실패한다. 원작은 이 실패의 결말에서 문명의 야만을 드러내려 한다.
김지운의 영화는 원작에 비해 자신의 처지를 훨씬 더 민감하게 의식하는 주인공을 다룬다. 그는 이윤희 못지않게 조직에 묶인 자신의 운명으로부터 탈출하고 싶어 하며 자신의 처지를 정관한다. 이 과정에서 남녀주인공의 처지를 운명 동일체로 묶어버리는 서사의 호흡은 지나치게 급박하지만 (원작에선 훨씬 더 천천히 그들의 우정과 사랑을 여러 공간을 배경으로 보여준다) 비교적 장르 관행에 충실한 전개로 맺음했던 <밀정>(2016)을 예외로 하면 김지운의 스타일리스트로서의 개성은 서사보다는 화면의 충격에 있었다. ‘벽지가 말을 한다’는 말을 낳았던 <장화, 홍련>(2003)이나 몸이 너덜너덜 해지면서 쫓기는 폭력을 감수해야 했던 <달콤한 인생>의 주인공 선우의 여정을 상기하면 <인랑>에서의 액션이 주인공의 탈주자로서의 열망을 드러내는 것으로 부족했다고는 보지 않는다. 그런데도 이 영화가 지나칠 정도로 대중의 반감을 샀다는 것은 서사와 캐릭터를 통해 추동되는 스타 시스템의 나르시시즘의 한계를 드러낸다. 주인공들은 서사 공간 안에서 박해받으면서도 자신의 아름다움을 의식하고 있다. 또는 그렇게 보인다. 상대적으로 송강호가 나왔던 다른 김지운의 영화들에서 이런 점은 드러나지 않는다. 배우들의 열연에도 불구하고 <인랑>은 여러 영화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주연급 배우들이 소모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스타 시스템의 한계로도 읽힌다.
더 길게 보고 싶었던 <공작>의 장면들
윤종빈의 <공작>이 개봉 둘쨋주부터 흥행 1위로 올라설 수 있었던 것도 여름 시장에서 <인랑>이라는 경쟁작이 탈락한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윤종빈의 이전 영화들도 대체로 그랬지만 <공작>도 겉으로 과시하는 화려한 스타일과는 거리가 멀다. 이는 이만한 대작이 슬로 스타터로 여름 흥행 시장에 진입한 이유이기도 하다. <공작>의 서사 호흡은 서서히 링을 돌며 잽을 던지는 아웃복서처럼 일관되게 서서히 흐른다. 윤종빈은 전통적인 스토리텔링에 충실한 감독이고 자기 영화의 명장면을 통해 서명을 남기려는 야심이 없는 감독처럼 보인다. 이 때문에 윤종빈은 실력에 비해 비평적으로 과소평가 된 감독이라는 생각이 든다.
비교적 과작인 윤종빈의 영화들은 사극인 <군도: 민란의 시대>(2013)를 제외하면 현재를 움직이는 과거 한국 사회의 유전자를 상세한 취재 데이터에 기초해 해부했다. <용서받지 못한 자>(2005)는 한국 대다수 남자들이 헤어나지 못하는 군대식 문화의 후유증을 그렸고, <비스티 보이즈>(2008)는 강남 호스트바를 무대로 한국식 천민자본주의의 바닥을 보여줬으며, <범죄와의 전쟁: 나쁜 놈들 전성시대>(2011)는 공조직과 범죄조직이 일란성쌍둥이라는 걸 드러내는 핵심이 한국 사회의 패밀리 에고라는 걸 묘사한다. 단순히 소재에 착종한 선정주의가 아니라 감독 자신이 속속들이 취재해 몸에 붙인 걸 그려냈다는 신뢰감을 줄 만큼 세부묘사가 그럴듯한 윤종빈의 영화들은 한국 사회에 대한 지식과 정보에 기초하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좋아할 만하다고 스스로 착각하는 소재와 이야기로 이야기를 지어내는 대다수 한국 상업영화의 수준과는 저만큼 떨어져 있다.
그런데도 아쉬움이 있다면 윤종빈이 때로 시간을 늘리고 줄이며 끄집어낸 한국 사회의 특기할 만한 장면들에서 인상적인 시각적 디테일을 창조해내는 것을 그 스스로 억제하려는 강박을 갖고 있는 게 아닌가라는 의심 때문이다. 실화에 기초한 윤종빈의 신작 <공작>에서도 나는 때로 어떤 장면을 더 길게 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두 번째 볼 때 특히 그랬는데 영화의 후반부에 박석영/흑금성(황정민)의 정체가 남쪽 언론 보도를 통해 밝혀지고 박석영이 숙소에서 면도를 하고 있을 때, 리명운(이성민)이 슬그머니 들어와 총을 들이대는 장면은 관객 입장에서 좀더 음미하고 싶었다. 이 두 사람은 적대적 상생을 꾀하는 남북의 정치권력자와 그들의 수하들의 입장에 반해 호혜적 상생이라는 이상에 기초한 우정을 나눴다. 적어도 북한의 외화벌이 총책인 리명운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와 작업을 벌인 남한 공작원 박석영의 입장은 조금 더 복잡하다. 핵 시설 정보 탐지를 목적으로 남한 사업가로 위장해 공작을 벌였던 그는 남한의 집권당 이해세력이 벌이는 북풍 공작을 보면서 혼란에 빠진다. 그가 리명운을 설득해 추진한 남북 합작 광고 사업은 영변 핵 시설 공장을 탐지하려는 원래 목표를 감추기 위한 것이었지만, 이 공작 사업을 멈추고 휴전선 전면 도발을 위한 준비 작업을 상관인 최학성 부장(조진웅)이 지시하자, 그는 사업을 계속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김정일(기주봉)을 설득하고 북의 휴전선 선제공격 도발 계획을 유보시킨다. 박석영에게 리명운이 총을 겨누는 장면은 그 후 남한의 안기부가 북풍 공작을 은폐하기 위해 박석영의 정체를 언론에 흘려 폭로한 직후에 서술된다. 이 장면에서 박석영은 면도 크림을 얼굴에 잔뜩 묻히고 천천히 면도기로 얼굴을 긁어낸다. 거품이 닦여나가고 그의 맨 얼굴이 드러날 때 리명운이 등장한다. 박석영은 이미 예감하고 있었겠지만 총을 든 리명운을 보고 당황한다. 리명운이 책망하자 박석영은 모든 걸 설명할 수 있다고 변명한다. 화면에는 거울에 비친 그의 맨 얼굴이 보인다. 두 사람의 클로즈업이 교차되고 리명운은 권총을 박석영에게 들이대며 ‘전향하면 그의 가족의 목숨까지 보장하겠다’고 위협과 설득을 병행한다. 고전적 호흡으로 연출된 이 장면은 한번 믿으면 끝까지 믿는다고 했던 리명운의 박석영에 대한 믿음이 산산이 깨지는 상황이자, 그런 리명운의 낙담에 대해 제대로 설명할 수 없는 박석영의 마음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리명운의 말대로 수하 공작원의 정체를 자기 안위를 위해 폭로하는 남한 정보부 수뇌부의 행동도 비정상이지만, 자신이 수행하는 공작 사업의 목표와 수단이 전도되는 걸 체감하는 박석영의 마음도 스스로 종잡을 수 없다. 여기서 박석영의 얼굴은 면도를 거친 맨 얼굴로 드러난다. 이 박석영의 맨 얼굴이 드러내는 것, 무색무취한 표정이 함축하는 것을 윤종빈은 일체의 강조 없이 간단하게 처리한다.
술을 권하는 의미
군 정보부대 출신으로 평생 반공주의자로 살아왔던 박석영이 북한 사람들을 만나 내면의 적대감을 숨기고 그들의 돈벌이를 도와 자신도 치부하겠다는 자본주의적 사업가로 위장하면서 가장한 친밀감을 지속적으로 연기한 끝에, 공작 파트너인 북한 해외자금조달 총책 리명운과 진정한 우정 비슷한 감정에 도달하는 상태는 관객 입장에서도 이 영화를 통해 충분히 겪어볼 만한 경험이다. 이는 남한 집권당 국회의원들과 안기부 고위 인사가 북한 정권 연락책 실무자들을 만나 벌이는 북풍 공작이라는 명시적 사건의 전개만큼이나 이 영화에서 중요한 것이다. 사건 전개는 극적 구성을 위해 필수적인 것이고 이걸 클라이맥스에 배치해놓아도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모르며 내막이 밝혀져도 믿고 싶지 않은 사람은 믿지 않는 이 어이없는 남과 북의 적대적 상생의 메커니즘을 폭로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선전 효과는 그리 크지 않다. 그보다 영화적으로 더 감동적인 것은 남과 북의 이익을 대리하는 자들로서 박석영과 리명운이 벌이는 연기의 게임과 그 결말에 이르러 체험하는 우정의 농도다.
<공작>은 거짓에서 진실로, 연기에서 본심으로 나아가는 두 남자주인공들의 마음의 상태를 담아내지만 정치와 비즈니스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이라는 영화 속 대사처럼 공작과 사업이 구분되지 않는 상태에서 두 남자의 우정은 지속될 수 없다. 그들의 우정은 형식적인 환대와 진심 사이에서 늘 동요하며, 그런 그들의 불안정한 우정 상태를 강요하는 것은 그들이 속한 정권의 감시자들이다. 영화에는 짧게 스쳐가지만 이들 정권 감시자들과 수뇌부의 상태를 암시하는 반복적인 모티브와 대사들이 많이 사용되는데 이를테면 박석영의 상관인 최학성 안기부 해외파트 부장은 박석영과 면담할 때를 비롯해 누군가를 만나는 장면에서 예외 없이 양주를 따라 마시며 대화한다. 리명운이 처음 박석영을 만났을 때 그가 박석영에게 강권하는 것도 술이며 박석영이 처음 김정일을 접견할 때 인상적인 것도, 집무 중인데도 상대에게 술을 권하고 고급 양주를 마시며 대화하는 김정일의 습관이다. 술을 권하는 것은 담배를 권하는 것처럼 상대방에게 긴장을 풀고 평소처럼 대해도 된다는 표시로 권하는 옛날 스타일의 접대방식이지만 박석영은 심지어 김정일 앞에서도 술을 마시지 않겠다는 자기 결심을 고수한다. 긴장되고 어색하고 뭔가를 강요당하는 순간을 무마하기 위해 사용되는 도구로서의 술은 거꾸로 남과 북의 엘리트 당국자들의 경직됨을 드러내는 지표이기도 하다.
우정과 배신의 코드
박석영은 술을 거부하는 캐릭터다. 이는 사업가로 행세하는 그의 공작원으로서의 연기 범주를 알려주는 지표인데 그가 외골수이거나 자기 자신조차 믿지 못하는 완벽주의자의 면모가 있다는 걸 암시한다. 그는 이런 태도로 상대로부터 강제되는 무장해제의 시도에서 자신을 보호한다. 리명운을 비롯해 김정일이 말버릇처럼 꺼내는 호연지기의 기상도 본심과 허세를 가늠할 수 없는 일종의 은폐 코드이다. 영화의 후반부에 남북 합작 사업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를 조짐이 보이고 박석영에 대한 리명운의 의심이 거의 사라질 무렵 리명운은 박석영을 자기 집에 초대한 자리에서 수줍게 호연지기가 새겨진 넥타이핀을 선물하고, 그날 식사 자리에서 박석영은 자기 결심을 깨고 리명운이 주는 술을 받아 마신다. 술과 호연지기라는 연막을 위한 은폐 코드는 해제된다.
이런 식으로 행위의 지표를 나열하는 윤종빈의 연출법은 다소 강박적으로 스타일의 자의식을 억누르며 때로 하나의 카메라 움직임, 몇개의 숏이 추가되어도 좋을 상황을 심상하게 넘겨버린다. 이는 배우의 연기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상황을 낳고 영화적 무드로 충만할 수 있는 화면의 농도를 탈색시킬 위험이 있지만, 대신 반복적인 모티브의 축적을 통해 특정한 의미와 감정을 드러나게 강조하지 않는 방식으로 은밀하게 각인시킨다. 의미론적으로 대충 얼개는 짜놓지만 관객이 그걸 알아차리는 것은 의미론적으로 실패하는 방식이라는 걸 의식하고 심상하게 화면을 진행시킨다. 도입부에 박석영이 탈북자와 실내 낚시터에 있다가 안기부 요원들에게 잡히는 장면은 낚시, 미끼, 먹이, 도망갈 곳 없는 폐쇄된 공간 등의 의미론적 코드로 박석영의 이후 처지를 암시하지만 그건 그것대로 기능적으로 처리되고 넘어갈 수도 있는 장면이다. 박석영이 리명운과 접촉하는 데 성공하고 최학성에게 상황을 보고할 때 당구장에서 대화가 처리되는 장면도 비슷한 뉘앙스를 풍긴다. 최학성의 지시가 화면에 흐르는 동안 카메라는 최학성의 능숙한 큐대 움직임에 따라 궤적을 그리는 당구공을 보여준다. 박석영의 영화 속 동선은 자주 이 당구대 위의 당구공들의 움직임과 공명한다. 리명운을 처음 만날 때 그는 호텔을 나와 휴대전화를 든 채 리명운의 지시에 따라 수시로 방향을 바꿔 리명운이 지시하는 장소로 움직인다. 평양을 처음 방문할 적에는 국가안전보위부 정무택(주지훈)이 짜놓은 각본과 동선에 따라 마취 상태에서 심문을 받고 배에 태워져 바다에 나가 살해당할 뻔하는 가상극을 경험한다.
이 모든 것은 서사의 적정 반경에 스타일이 드러나게 침입하지 않고 모티브를 쌓으면서 캐릭터와 상황을 묘사하는 감독의 연출법을 드러낸다. 등장인물들의 말이 화면 대다수를 지배하는 대화 위주의 장면 연결에서 이런 장치들은 영화적 숨통을 조금씩 틔워주며, 스파이영화 플롯 배면에 드리워진 체제의 경직성에 갇힌 두 남자주인공들의 우정이라는 주제를 서서히 밀고 나간다. 윤종빈의 영화에서 남자들의 우정과 배신은 지속적인 탐구 주제였으며 심지어 배신조차도 우정의 또 다른 면모라는 것, 어쩌면 필수적으로 도달하게 될 관계의 귀결이라는 것, 그걸 받아들이고 감내하는 쓸쓸함이 삶의 부분이라는 것이 사회의 타락한 시스템이라는 소재와 접합되어 잔상에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