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제21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최고상인 코리안 판타스틱 작품상을 수상한 심찬양 감독의 <어둔 밤>은 ‘할리우드 키드’ 다음 세대의 출현, 이를테면 ‘놀란 키드’ 혹은 ‘마블 키드’의 출현을 선언하는 영화다. 영화에 대한 꿈을 이어갈 수 있을지 앞날이 불투명했던 한 젊은 감독이 주변 지인들을 그러모아 첫 번째 장편영화를 완성했다. 애초 만든 단편영화 <회상, 어둔 밤>(2015)의 결말을 위로하는 차원에서 추가로 촬영해 이어 붙인 이른바 확장판이다. 그의 이런 태도는 영화 속 주인공들이 말버릇처럼 되뇌던 “진정성 있는 영화”의 완결편을 만들어냈다. 지난 1년여 동안 관객을 만날 생각에 몸이 근질근질했을 심찬양 감독과 <어둔 밤>의 주연을 맡은 배우 오수경, 송의성, 심정용, 이요셉을 <씨네21> 사무실로 초대했다. 감독과 배우와 스탭이 그들 스스로 즐겁고 싶어 만든 영화인 만큼, 흥미진진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 제작 전반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였다. 이들 모두 자리에 앉자마자 지난 몇년간의 좌충우돌 제작기를 마구 쏟아냈다. 심찬양 감독의 말처럼 “언제나 그랬듯 늘 답을 찾아 헤매는 과정”이었던 <어둔 밤>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❶ 극중 ‘리그 오브 쉐도우’의 동아리방은 심찬양 감독이 재학 시절 무작정 한동대 총장을 찾아가서 “제가 영화를 찍고 싶은데 공간을 좀 내주십시오”라고 요청해 학교측으로부터 제공받은 공간이었다. 그는 이 자리를 빌려 “<어둔 밤>의 예고편도 봐주신 총장님께 감사하다”는 인사를 전하고 싶다고. 또 그는 “평소 총장님이 창의 융합을 강조하는 분이시라 심 피디의 강의 장면에 관련 대사를 넣기도 했다”고. 동아리방의 소품인 <씨네21>은 누군가 학교에 10년치 과월호를 기증해서 미술 소품으로 활용할 수 있었다.
여기 한편의 이상한 단편영화가 있다. 제목은 <회상, 어둔 밤>. 가상의 영화 동아리 ‘리그 오브 쉐도우’의 대학생 몇명이 자취방에 모여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다크 나이트>(2008)처럼 “진정성 있는 영화를 만들어보자”며 의기투합한다. “할리우드 갈 수 있는 영화를 만들겠다”고 확신한 그들은 아직 시나리오도 쓰지 않은 자신들의 영화를 훗날 리미티드 에디션 DVD로 발매하겠다며 거기에 수록할 메이킹 필름부터 찍기 시작한다. 출발은 크리스토퍼 놀란이었지만 과정과 결과는 누가 봐도 ‘우스꽝스러운’ 케빈 스미스의 작업에 더 가까울 것으로 예상되는 이들의 영화는 촬영까지 마쳤음에도 (어디까지나 영화 속에서) 헤드 스탭의 잇단 군 입대로 빛을 보지 못한다. 한동대에서 연극 동아리 활동을 하던 심찬양 감독은 이 영화를 찍기 위해 평소 어울려 지내던 후배들과 함께 연극과 뮤지컬 등을 작업한 배우들을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심찬양_ 안 감독 역의 송의성은 내가 군 제대하고 복학했을 때 언론정보문화학부 MT에서 처음 만난 후배다. 그 후 단편 <미안해요 좋아해서>(2011)를 찍을 때 단역을 맡겼는데 잘하더라. 자기보다 나이 많은 외국인 노동자에게 반말하다가 욕먹는 역할이었다.
=송의성_ 군대 가기 전에는 연극을 하다가 제대하면서 촬영을 해보겠다고 마음을 다잡고 전역한 직후였다. <회상, 어둔 밤> 촬영을 맡았던 조병훈 형을 따라다니면서 촬영을 배우던 어느 날, 형이 “심찬양 감독이 영화 찍는대. 너도 같이 가서 스탭하면 잘 가르쳐줄 거야”라기에 당연히 붐 마이크 정도나 시키겠지, 하는 마음으로 현장에 갔다. 그런데 갑자기 테스트 촬영을 시키더니 덜컥 안 감독 역을 맡겼다. 촬영 당일까지 내가 출연하게 될 줄 모른 채 현장에서 배우는 언제 구하느냐고 계속 묻고 다녔다.
=이요셉_ <회상, 어둔 밤>을 찍기 바로 전 학기에 영화 수업을 들었다. 그 수업을 이수 안 하면 졸업이 안 되는 상황이었는데 심찬양 감독이 많이 도와줬다. 그러더니 내게 “너는 이거 갚아야 한다”고 얘기해서 어느새 학습된 충성심을 갖고 학기를 마치게 됐다. 결국 형이 시키는 건 무조건 다 해야 하는 상황에서 캐스팅됐다.
=심정용_ 나도 복학하고 한 학기 정도 지났는데 영상, 특히 실기쪽에는 흥미가 없어서 방학 때도 집에 안 올라가고 학교 주변에서 놀곤 했다. 그때 마침 집도 가까웠던 형이 영화 찍자고 불렀다. 처음엔 심 피디가 아닌 다른 역할의 대사를 시켰는데 영 느낌이 안 살았던 지 나한테 뭘 맡길지를 고민하더라. 그러던 와중에 형의 자취방에서 놀고 있는데 안 감독과 요한, 그리고 심 피디 셋이 장난감 가지고 노는 장면을 어느새 찍고 있더라. 그렇게 형이 원하는 느낌을 만들어간 것 같다.
❷ 슬레이트 치는 옥자 역을 연기한 강영현은 현재 MBC에서 AD로 근무 중이다. 심찬양 감독이 최근 그녀에게 고기를 사주고 봉준호 감독의 <옥자>(2017)를 보러 가서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고. 물론 그 모습을 모두 촬영했다.
<회상, 어둔 밤>의 영화 속 영화 <어둔 밤> 찍을 동아리 학생들, 즉 감독과 피디, 배우, 스탭 역할을 할 친구들의 섭외를 마친 후에도 심찬양 감독의 고민은 계속됐다. 그런데 영화의 첫 장면을 찍다가 심정용이 이상한 대사를 방언 터지듯 막 쏟아내면서 연기하는 모습을 보며 “이 영화, 왠지 재미있을 것 같다”고 직감했다고 한다(심 피디의 이 장면 연기는 영화에 쓰지 못했다. 다들 너무 웃어서 엔지가 난 상태라 쓸 수가 없었다고). 그런데 왜 하필 그는 페이크 다큐멘터리 형식의 영화를 완성하려고 했던 걸까. 심찬양 감독은 연기 경험이 없고 본인 스스로를 드러내듯 연기하는 친구들의 날 것 같은 모습을 생생하게 포착하고 싶었다. 롱테이크는 사실상 작업이 불가능할 것 같다고 여겨 현실적인 방편으로 페이크 다큐멘터리 형식을 차용하기도 했다. “그리고 조명을 치고 싶지 않았다. 왜냐하면 돈이 없어서 빨리 영화를 찍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끼리는 시네마베리테적으로 가는 게 답이다, 라고 얘기하곤 했다.”(심찬양) 우여곡절 끝에 단편 <회상, 어둔 밤>은 완성했으나 영화 속 동아리 친구들이 완성하려던 영화 <어둔 밤>은 (적어도 이때까지는) 완성되지 못한 채로 결말을 맞아야 했다. 애초 심찬양 감독은 <회상, 어둔 밤>의 마지막 장면을 구상할 때 주인공 친구들이 <어둔 밤>의 예고편을 만들어 유튜브에 업로드하는 것으로 끝을 맺게 했었다. 그런데 그는 이 단편의 결말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그때 감독은 이런 결심을 했다고 한다. “왜 영화에서도 이들이 뭔가를 이뤄내지 못하는 건가? 내 취향을 저격할 솔직한 영화를 만들고 싶다.” 그렇게 단편 <회상, 어둔 밤>의 엔딩은 심찬양 감독의 장편 데뷔작 <어둔 밤>(2018)의 시작을 알리는 출발점이 되었다. 극중 ‘리그 오브 쉐도우’ 선배인 안 감독, 심 피디, 요한 등이 완성하지 못했던 영화를 그들의 후배가 이어받아 <어둔 밤 리턴즈>라는 제목으로 완성하게 된다는 장편 <어둔 밤>의 스토리는 조금씩 구체화될 준비를 하고 있었다.
❸ 극중 안 감독이 상미넴에게 “영화는 고프로로 찍어야 한다, 60프레임이나 되는, 피가 엄청 많은 제품이다”라고 말하는 애드리브 대사는 안 감독 역의 송의성이 방송국 촬영 아르바이트 시절에 고프로를 사용한 경험에서 우러나왔다. “더 넓은 안목을 갖기 위해서는 광각의 카메라가 필요하다”는 대사도 그가 만들어낸 ‘ 애드리브’ 대사다.
“취향을 저격할 영화를 만들고 싶다”
예비역 군인을 주인공으로 한 슈퍼히어로영화를 만들겠다고 나선 가상의 영화 동아리 ‘리그 오브 쉐도우’ 멤버들은 영화를 만들겠다고 판을 크게 벌였다가 군 입대와 취업 전선으로 인해 꿈이 좌절된다. 여기까지가 심찬양 감독이 지인들을 총동원해 만들었던 단편 <회상, 어둔 밤>이자 <어둔 밤>의 1부에 해당하는 줄거리다. 이를 이어받은 동아리 후배 상미넴(김상훈)이 선배들의 기치를 이어받아 시나리오를 완성하고 “원칙주의적으로” 오디션을 봐서 배우를 선발해 촬영하려고 하는 게 <어둔 밤>의 2부에 해당한다. 3부는 상미넴과 아이들이 드디어 완성한 영화 <어둔 밤 리턴즈> 그 자체다. 여러가지 현실적인 이유로 페이큐 다큐멘터리 장르를 택했다면 심찬양 감독은 왜 하필 슈퍼히어로영화를 만드는 영화 동아리 친구들을 주인공으로 삼으려 했을까. 여기엔 감독 주변을 둘러싼 친구들의 '덕력'이 강한 영향을 끼쳤다. “뮤지컬을 한창 작업하고 있는데 연출팀이었던 상미넴 역의 상훈이 갑자기 배트맨 관련 코믹스를 읽다가 불같이 화를 냈다.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코믹스 설정상 배트맨은 불멸의 캐릭터인데 어떻게 이 법칙을 깰 수가 있느냐’고 말하는 거다. 그 순간 이 친구를 주인공으로 2부를 찍으면 재미있겠다고 생각했다. 영어를 잘하는 친구라서 코믹스도 원서로 읽던 친구인데 영어로 막 화를 내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심찬양) 2014년 11월 6일, 놀란 감독의 <인터스텔라>(2014) 개봉 당일 새벽에 심찬양 감독이 이들과 모여 영화를 보러 가던 순간의 즐거움도 소재를 정하는 데 영향을 줬다. <어둔 밤>의 1부 촬영 담당 및 영화에 간간이 등장하는 조빙 역의 조병훈 촬영감독은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어마어마한 덕후였다. <인터스텔라> 개봉 1년 전부터 영화를 재미있게 보려고 물리학 공부를 하는 등 마치 부모의 마음으로 영화를 보던 친구였다고. “이들을 데리고 재미있는 취향 저격 영화, 이상한 덕후들이 나오는데 그냥 등장만 하는 게 아니라 뭔가를 이루려고 노력하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던 심찬양 감독은 결국 2부와 3부 시나리오를 마저 완성했고 주변 지인들을 “인피니티 스톤 모으듯” 하나둘 다시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어둔 밤>은 한마디로 ‘덕후들이 모여 만든 덕후들에 관한 영화’인 것이다.
❹ “포항에서 영화 찍는 사람이 우리밖에 없었다”는 심찬양 감독은 주로 모교인 한동대와 자취방, 교내 지하실이나 기숙사 지하실 등에서 영화를 찍었다. 그 밖에 포스코 공장 부지, 실제 건축 중인 빌라, 비어 있는 식당 등에서 닥치는 대로 촬영했다. 밤샘 촬영 도중에 새벽 3시가 넘어가도록 촬영이 끝나지 않자 시나리오상의 공간을 바꾸기 위해 극중 결정적 액션 장면에서 주인공들이 갑자기 “로케이션을 바꾸자”며 장소를 이동하는 장면을 넣기도 했다고. 왠지 개봉하면 드래곤볼의 오마주였다고 대답할 것 같다.
심찬양_ 2부를 다시 만들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가장 결정적인 건 의성의 반응이었다. 장편 시나리오를 쓰고 나서 안 감독이 등장하지 않으면 사실상 의미가 없는 영화일 거라고 판단했다.
송의성_ 형의 전화를 받았을 때 나는 MBC에서 촬영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한달만 더 일하면 실업급여를 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심찬양_ 그런데 내가 “2부를 찍기로 마음먹었고 너한테 제일 먼저 전화를 하는 거야, 네가 배우로 출연하면 영화를 찍을 수 있을 것 같고 네가 안 나온다면 영화는 엎어질 거야”라고 말했다. “일을 그만 둘 수 있겠니?”라고 묻자 의성이 일주일 동안 고민하고 전화를 주더라. 엄청 진지하게, 연기 톤으로 “형, 저를 배우로 써주세요”라면서. (좌중 폭소) 이 말을 되게 힘줘서 말했다. 솔직히 울컥하며 소름이 돋았지만 왜 그런 말투로 대답해야 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무튼 너무 멋있었다. 현장에 돌아와서는 많이 징징댔지만. (웃음)
송의성_ 2부를 찍을 때는 모두가 어느 정도 형과의 작업에 적응되어 있었다. 초반에는 내가 언제 어디에서 어떤 대사를 해야 하는지 물으면 형도 가끔 “나도 모르겠다, 일단 해보면 되지 않겠느냐”고 말하기도 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는 배우들끼리 서로 믿고 던져주면 자유롭게 즉흥적으로 조금 수정하면서 맞춰나갔다.
=오수경_ 나는 촬영하러 포항에 내려가는 전날까지도 시나리오를 받지 못한 상태였다. 촬영 들어가기 한 시간 전에 받았다. 뭘 찍는지도 모르는 상태였다. (웃음)
심찬양_ 알려주지 않은 이유가 있다. 수경씨 본연의 날것 같은 느낌이 영화에 담겼으면 좋겠다고 판단했다. 무언가 준비해오면 그걸 망칠 것 같았다.
❺ 언제나 카메라 뒤에서 심찬양 감독에게 큰 힘이 되어준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덕후, 조병훈 촬영감독은 1부를 끝내고 돌연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영화연구소(AFI)를 졸업하고 할리우드에서 작업 중이다. 그가 2부 촬영 도중 갑자기 한국을 방문하지 않았다면 <어둔 밤>의 3부는 만들어지지 못했을지 모른다.
오수경_ 무슨 영화인지도 몰랐다가 1부를 보고서야 어느 정도 느낌을 알게 됐다. 촬영 들어가면서부터 익히게 됐다. 2부에서 후배들 괴롭히고 있을 때 처음 등장하는 장면이 첫 촬영 신이었다. 너무 당황스러웠고 어려웠다.
심찬양_ 그게 맞는 거다. 모르고 들어갔다. 성이 여씨고 이름이 배우라는 설정이었다. 1부에서 슬레이트 치는 옥자의 언니가 경자라는 설정, 그러니까 옥자와 여배우가 자매라고 하려다가 너무 거짓말 같아서 설정을 바꿨다.
오수경_ 콜라 원샷하는 장면에서 정말 콜라를 마셨더니 진짜로 트림이 나와서 힘들었다. 자신을 여배우라고 치켜세우는 듯하다가 망가지는 역할 자체가 너무 재미있었다.
심찬양_ 캐스팅한 이유가 바로 그래서다. 예전에 어떤 시트콤을 봤는데 콜라 먹고 취하는 장면이 너무 재미있었고 사랑스러워 보여 집어넣은 설정이었다. 뮤지컬 <러브 트릴로지: 청춘>을 연출할 때 요셉과 연기한 적 있는 수경씨를 옆에서 두달 동안 합숙하며 지켜봤다. 그래서인지 수경씨의 어떤 모습이 사랑스러우면서 이상한지를 파악하는 시간이 있었다.
이요셉_ 수경씨와는 이미 친분이 두터운 사이인데 이번 영화에선 둘이 서먹서먹해야 했다. 그래서 오히려 덜 친해지려고 노력했다. 그보다는 안 감독과 심 피디 사이에서 두 사람의 어디로 튈지 모르는 대화 안에서 존재감을 찾느라 고생했다. 거의 매 장면 범블비 장난감을 만지작거리고 있는데 조작 방식이 어려운 장난감을 하도 여러 번 조립해서 영화 끝날 때쯤은 조립법을 숙달할 정도였다. (웃음)
심찬양_ 촬영감독에게도 비슷한 주문을 했다. 카메라도 한명의 인격체처럼 느껴지길 바랐기 때문에 조병훈에게 ‘카메라를 처음 잡은 사람의 움직임’을 주문했다. 그가 “그게 뭐죠?”라고 묻기에 “일단 헤드룸을 넓게 줘봐, 포커스는 좀 많이 나가도 될 것 같지 않니? 무조건 줌을 당겨”라는 식으로 디렉션을 줬다. 아마추어리즘을 재현한다고 해야 할까. 조병훈 촬영감독은 2부 찍을 당시에는 유학 중이었는데 그가 한국에 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2부 촬영이 들어갔고 그가 왔다는 소식을 듣자 ‘아, 영화 속 3부가 결국 완성이 되겠구나’라고 장편에 대한 확신을 얻었다. 그래서 나는 <어둔 밤>을 다큐멘터리에 가장 근접한 영화라고 생각하며 찍었다.
❻ 극중 인상적인 몰입 연기를 보여준 대배우 역의 이재원은 심찬양 감독의 단편영화 3편에 출연한 친구다. 지금은 연기를 그만두고 로스쿨에 재학 중이다. <어둔 밤>은 그가 공부하던 중에 심 감독이 3일 정도 불러내서 촬영했다고.
떠나간 선배와 그들의 앞날에 남겨진 고민
선배들이 떠난 빈자리를 홀로 힘겹게 채워나가는 2부는 온갖 애드리브가 난무하던 1부에 비해 다소 무거운 분위기가 느껴진다. 선배들의 기치를 이어받아 “원칙주의적으로” 영화를 찍으려던 상미넴은 말도 안 되는 메소드 배우들의 훼방과 오직 여배우를 만날 생각에 다시 합류한 요한(이요셉) 때문에 괴로워한다. 술, 담배, 피가 거의 등장하지 않는 이 건전한 영화에서 상미넴이 생애 처음 담배를 한번 물었다가 오바이트를 하는 장면이 등장할 정도면 영화가 얼마나 괴롭고 힘든 청춘들의 심리를 표현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런데 1부와 2부는 인물들이 처한 상황 때문인지 분위기가 상이하다. 이는 심찬양 감독의 심리 상태의 영향을 받은 탓으로 보인다. 그가 생각하기에 1부를 찍었을 때가 “가장 즐거웠던 때”라고. 클레르몽페랑 국제단편영화제에서 그의 단편 <이상한 나라의 김민수>(2013)가 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하자, 이제는 뭔가 다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고. 그러다 2부를 찍을 때쯤에는 “이제 영화는 끝이구나”라며 기적 같은 일과 좌절의 연속을 겪었던 것. 결국 극중 상미넴의 손을 빌려 완성하게 되는 영화 속 영화 <어둔 밤 리턴즈>는 이 대책 없이 저돌적인 청춘들의 가장 화려했던 순간으로 똘똘 뭉쳐 있다.
심찬양 감독은 스스로 <어둔 밤>을 이렇게 정리한다. “내가 영화감독이라는 직업을 조금 더 꿈꿔봐도 되지 않을까, 좀더 쉽게 포기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라는 희망을 보여준 영화다. 내가 너무 좋아하는 친구들의 아름다운 청춘의 모습을 담아내고 우리의 20대를 정리할 수 있는 앨범 같은 영화를 만들었다는 의미가 내겐 크다. 작가로서는 언제나 다른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욕망을 갖게 마련인데 나도 그런 작가가 될 수 있을까, 라는 기대를 갖게 해준 영화라고 말하고 싶다.”
심 피디/심정용
사회정의, 젠더 이슈나 소수자 인권에 지대한 관심을 두고 있는 비교문학 전공 대학원생이다. 연구를 하는 사람은 해석하는 사람인데, 해석은 항상 사회의 변화에서 한 발짝 늦는다. 여기서 자신의 해석이 어떻게 사회에 균열을 낼 수 있을지를 고민 중이다. 그런 마음이 심 피디 캐릭터에 조금 반영됐다고.
심 피디에게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이란?
“위대한 감독이다. 세계 영화의 범주를 좀더 넓힌 감독이라고 생각하는데 심 피디는 분명 그의 영화를 보지 않았을 거다. 여기서 심 피디의 ‘꼰대성’이 드러난다. 꼰대의 특징 중 하나는 자기가 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걸 안 하고 있거나 못하고 있는 걸 남한테 하라고 하는 거다. 거기서 심 피디의 성격이 드러난다. 그가 위대한 감독인 건 맞는 것 같다. 사실 나도 안 봐서 잘 모르겠다.”
여배우/오수경
심찬양 감독과 뮤지컬 <러브 트릴로지: 청춘>을 함께 작업한 인연으로 <어둔 밤>에 캐스팅됐다. 배우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았지만 <어둔 밤>을 통해 카메라에 담긴 자신의 얼굴에 대해 인지할 수 있게 됐다고. 덕분에 정식으로 연기를 배워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현재 가수활동을 준비 중이다.
오수경에게 ‘여배우’란?
“인간 오수경에겐 여배우가 도전이었다. 다른 친구들은 연기 경험이 약간이나마 있었고 심찬양 감독과 작업도 해본 친구들이었다. 그래서 나름 걱정이 많았다. 너무 재미있을 것 같아서 함께하자고는 했지만 민폐를 끼치면 어쩌나 하고 말이다. 하지만 촬영이 거듭될수록 나를 내려놓는다는 게 뭔지 알게 된 것 같다. 겉으로 보이는 것에 신경 쓰지 않는 법을 배웠다.”
감독/심찬양
제37회 클레르몽페랑 국제단편영화제에서 <이상한 나라의 김민수>로 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했다. 단편 <회상, 어둔 밤>의 확장판 격인 <어둔 밤>은 그의 첫 장편 데뷔작. 배우들에 따르면, 심찬양 감독은 학창 시절 정말 무서운 선배 중 한명이었다고. 극중 안 감독과 심 피디의 대사와 말투 중 상당 부분은 심찬양 감독의 영향 아래에서 탄생한 것이라고. 심찬양 감독은 “내가 그동안 말을 너무 직설적으로 했다. 후회하고 자신을 돌아보는 반성의 의미에서 영화를 만든 거”라고 해명했다.
심찬양 감독에게 ‘상미넴’이란?
“상미넴 역의 김상훈은 이번 영화로 배우의 꿈을 꾸다가 지금은 잠시 잠수를 탄 상태다. 얼마 전에 연락이 닿았는데 심적으로 힘들어하는 것 같다. 내가 누군가의 인생에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됐다. 내게 상미넴은 L.O.V.E. 라고 말해주고 싶다.”
안 감독/송의성
한국영화아카데미 35기 촬영전공이다. 역할 분석도 하면서 배우를 해보니 촬영에 정말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심찬양 감독을 비롯한 모두가 “의성이야말로 <어둔 밤> 최고의 수혜자”라고 치켜세운 이유는 다름 아니라 “이 영화 덕분에 아내를 만나게 됐”기 때문.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스탭으로 일하던 아내를 만나 지난 6월에 결혼했다.
안 감독에게 한국영화란?
“극중 안 감독은 아는 척하길 좋아하지만 아는 것이 없는 사람이다. 사실 알 수 있는 기회조차 얻지 못한 사람이 아닐까. 한국영화를 만들어야 할 사람이 너무 할리우드영화만 들여다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해봤다. 지금 한국영화에 무언가 필요한 것이 있다면, 적어도 그건 안 감독이 지향하는 바가 결코 아닐 것이다.”
요한/이요셉
한 학기 만에 학교에서 가장 유명한 1학년이 되겠다는 목표를 갖고 대학에 입학, 좌절도 하고 뭔가 이뤄보기도 하는 시간을 가지면서 심찬양 감독과 친구들을 만나 영화도 찍었다. 그에게는 <어둔 밤>이 청춘의 마지막 의식 같은 거였을지 모른다. 그 뒤 온라인 마케팅 회사에 취직해 회사 생활을 만끽하고 있던 와중에 영화가 개봉을 앞두고 있다고 해서 지금은 맘이 ‘싱숭생숭’하다.
요한에게 ‘메소드 연기’란?
“요한은 소리만 지르면 배트맨이 될 수 있다, 메소드 연기를 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나 역시 그랬고. 아무튼 요한이 생각하는 슈퍼히어로란 주먹으로 사랑을 전하는 일종의 사랑의 폭력자다. 요한이 그런 슈퍼히어로의 모습을 제대로 표현한 메소드 연기를 할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