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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잠> 정재은 감독 - 동아시아 멜로의 감수성을 찾아서
2018-09-06
글 : 김소미
사진 : 오계옥

정재은 감독이 데뷔작 <고양이를 부탁해>(2001), <태풍태양>(2005) 이후 12년 만에 세 번째 장편 극영화를 만들었다. 알츠하이머를 앓는 일본의 유명 작가 료코(나카야마 미호)와 가난한 한국의 유학생 찬해(김재욱)의 애절한 멜로드라마 <나비잠>이 그것이다. 정재은 감독은 그사이 <말하는 건축가>(2012), <말하는 건축 시티: 홀>(2013) 등 다큐 작업에 주력하며 빠르게 무너지고 솟아나기를 반복하는 동시대 한국의 도시 공간에 염려를 남기고, 인간과 상생하는 건축의 가능성을 탐구해왔다. 극영화와 다큐멘터리에 이어 이번엔 해외 합작영화로 일본 시장에 본격적인 출사표를 던진 정재은 감독. “새로운 플랫폼을 향해 언제나 살 길을 찾아 헤맨다는 점에서 나는 어쩌면 계속해서 신세대가 아닐까”라는 그의 말에 적잖이 공감이 간다.

-한·일 합작영화를 제작하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이은경 프로듀서(<나비잠>의 한국 프로덕션을 맡은 영화사 조아의 이은경 대표는 정재은 감독과 오랜 친구다.- 편집자)가 사비를 털어서 제작비를 대고, 배급사를 구하는 과정에서 애를 많이 썼다. 이 프로듀서는 <고양이를 부탁해>가 일본에서 매우 좋은 반응을 얻는 것을 보고 내 영화 특유의 스타일이 일본 시장에서는 메리트가 있다고 판단한 것 같다. 다큐멘터리 <말하는 건축 시티: 홀>을 찍고 난 후에 극영화에 대한 마음이 간절히 들더라. 이후 두편을 한국 제작자와 준비하다가 시나리오 주도권 문제로 진행이 잘 안 됐다. 영화에 대해 점점 더 본질적인 질문을 갖던 차에 일본영화들에 이전보다 깊이 관심을 가지게 된 터라 이제는 일본 작업도 해볼 수 있겠다고 결심했다.

-유학생 찬해 캐릭터 외에는 모든 것이 일본 배경, 일본 배우, 일본 문화로 이루어진 작업이었는데.

=일본이 제작비의 80%를 댔고, 한국 프로덕션이 나머지 20% 정도를 부담했다. 애초에 양국 프로듀서의 기획에 기본 컨셉이 있었다. 한국 남자와 일본 여자의 멜로드라마로 한·일 합작 프로젝트를 해보자는 거였다. 양쪽 제작사에서 원하는 것이 100% 일본어와 일본 배경이었기 때문에, 이를 바탕으로 합의를 해나가면서 시나리오를 썼다.

-<나비잠>을 준비하면서 파악한 일본 관객층의 특성은 어떤가.

=일본은 영화시장 자체가 고령화되어 있다. 극장에서 영화를 소비하는 계층의 평균 연령대가 높은 편이다. 그들은 영화와 문학의 거리감 자체가 좁을 거라고 봤다.

-료코가 알츠하이머를 앓는 소설가라는 설정도 그렇게 나온 건가.

=그런 셈이다. 연관해서 일본에서 들은 인상적인 비평 중 하나는 <나비잠>에서 알츠하이머나 치매가 와도 작가가 계획했던 작업을 이어나갈 수 있다는 점, 나아가 사랑도 할 수 있고 자기 인생을 잘 정리할 수 있다는 점을 중요하게 보더라. 일본영화계이기에 조금 더 특별하게 읽어주는 지점이라고 생각했고, 이런 반응은 내게도 꽤 인상적이었다.

-언어적인 두려움은 없었나. 일본어를 잘한다고 알고 있다.

=가뜩이나 주인공이 유명 소설가여서 부담이 컸다. 어쩌면 굉장히 바보 같은 선택이었는지도 모르지. (웃음) 일본 관객이 볼 때 료코의 문학 세계가 무시받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공포가 심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을 많이 했고, 여전히 일본 내에서는 보통의 소설가들에 비해 문체가 조금 딱딱하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대사를 가지고 장난을 친다거나 애드리브로 상황을 풍성하게 만드는 방식은 애초에 기대하지 않았다. 감성과 감정을 깊게 담아내는 데 집중력을 발휘했다.

-료코가 쓰는 소설이 영화 속의 영화로 끼어드는 지점이 매력적이었다.

=료코가 사는 집처럼 커다란 네모의 중심에 또 다른 작은 네모가 있는 식의 이중 구조다. 이것은 내 개인적인 취향이기도 한데, 영화에서 두 인물의 스토리만을 세부적으로 나열하는 방식에는 크게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플랫하게 주인공 두 사람만 따라가려고 하다보니 아쉬움이 들더라. 나카야마 미호 덕분에 종종 언급되는 이와이 순지의 <러브레터>(1995)도 인물들의 이중구조를 잘 활용했다. 이야기 속의 이야기가 주는 긴장감을 가지고 가면서, 하나의 스토리에 너무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 않고 관객에게 여백의 감정을 느끼게 하고 싶었다. 물론 어려운 지점이었다. 기본적으로는 관객이 이야기가 아니라 장면을, 컷과 컷을 보면서 영화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철저하게 이미지적인 접근으로 만든 영화다.

-<나비잠>은 <러브레터>의 모습으로 한국 시네필에게 기억되는 나카야마 미호를 중년 여성의 멜로드라마로 다시 불러들이는 시도이기도 하다. 더불어 료코 캐릭터는 멜로영화의 몇몇 전형들을 일부러 부여받은 캐릭터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우선 <러브레터>의 그를 기억하고 좋아한다는 것 자체가 이제는 연령이 꽤 높다는 말이기도 한데(웃음), 한국 관객층도 점점 고령화되고 있다고 본다. 그리고 특히 동아시아 지역에서의 멜로 장르는 그 의미가 남다르다. 북미, 유럽 사회에서는 통용되지 않는 감수성이 있는 것 같다. 90년대 이와이 지나 여러 감독들의 미덕에 의해서 만들어진 순정의 개념이랄까. 한자 문화권의 오랜 역사와도 맥락이 닿는다. 자연을 숭배하고, 자연과 인간의 교감 속에서 서정성을 탐구한다. 개인간의 관계에 있어서도 여백과 마음을 중시하는 동아시아 멜로 장르의 고유한 면모가 있다. 이러한 특이성을 더욱 의식하고 만든 영화가 <나비잠>이다.

-나비잠이라는 단어는 조금 생소하기도 한데, 어떻게 떠올렸나.

=아기가 두팔을 올리고 자는 모습을 나비잠이라고 한다. 나비잠 잔다라는 한국어 표현이 정말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나비잠>은 제목의 아름다움에서 출발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 언어가 한 사회의 문화들을 반영한다고 하는데, 요새 한국영화의 제목들을 보면 대체로 너무 딱딱하고, 인간 관계마저 계약으로 이루어지는 사회처럼 느껴진다. (웃음) 따지고 보면 내 영화 <고양이를 부탁해>도 당시로서는 무척 이상한 제목이었는데 프로듀서가 지지해줘서 제목을 지킬 수 있었다. <나비잠>도 영화의 내용을 잘 모르겠다는 이유와 이름이 동일한 기저귀 브랜드가 있어서 반대의 과정이 있었다.

-료코의 집은 성공한 작가의 부유함이 묻어나면서도 무척 고즈넉하고 편안한 멋이 있다. 알고 보니 유명한 건축가 아베 쓰토무의 집이라고.

=비교적 저예산으로 해외에서 촬영하는 영화인 만큼 한 장소에서 많은 이야기를 소화하는 게 전략적으로 중요했다. 이런 경우 매우 좋은 공간을 찾아내는 감독의 디테일이 영화에 대한 장악력을 증명하기도 한다. 그 지점에서만큼은 절대 무너질 수 없다고 생각했다. 료코의 집은 가급적 집에서 스토리가 느껴지는, 그러니까 어느 정도 긴 시간이 묻어나는 다채로운 공간이길 바랐다. 아베 쓰토무가 1970년에 지어서 지금까지 살고 있는 집인데, 50년의 세월을 버텨온 집의 흔적이 곳곳에서 묻어났다.

-일본에선 잃어버린 물건이 반드시 돌아온다는 대사가 인상적이었다.

=내가 느끼기엔 정말 그렇다. 물건을 잃어버리면 꼭 다시 돌아오는 건 매우 일본적인 상황이라고 생각했다. <나비잠>을 찍을 때 30번정도 일본을 오갔는데, 미팅이나 일로 가는 건 한계가 있는 것 같아서 두달 정도 도쿄 신주쿠 근처의 유학생들이 많은 어학원을 다녔다. 중국, 베트남, 미얀마 등 학생들과 섞여 지내면서 유학생들이 대체로 학비 때문에 아르바이트에 허덕인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평소 SNS나 단편영화를 통해 고양이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지 않았나. 일본영화인 만큼 내심 고양이가 나오길 기대했는데 안 나오더라.

=<고양이들의 아파트>라는 다큐멘터리를 1년 정도 계속 작업 중이다. (웃음) 삶의 조건을 일시적으로 다 허물고 사라지게 하는 시스템인 재건축과 재개발에 대한 이야기를 고양이들을 데리고 표현하는 작업이 될 것 같다. 내년 상반기 즈음 공개할 계획이다.

-그 밖에 차기작 계획이 있다면.

=tvN에서 12월에 단막극 드라마 하나를 선보일 것 같다. 70분 정도 분량의 <밀어서 감옥 해제>라는 작품이다. 문자와 단톡방 등 텍스트의 감옥에서 벗어날 수 없는 우리 세대의 이야기를 담으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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