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25일, 힙스터스러운 선글라스를 낀 피아니스트 크리스티안 지메르만의 얼굴이 프린트된 앨범이 세상에 나왔다. 사이먼 래틀 경이 이끄는 베를린 필과 함께한 탄생 100주년을 맞은 레너드 번스타인의 교향곡 2번 《The Age of Anxiety》 음반이다. 도이치 그라모폰 (흔히 말하는 노란 딱지)에서 출시된 음반을 구매하려다가, 크리스티안 지메르만의 인터뷰를 들었다. 초연에 함께했던 순간, 언젠가 반드시 꼭 녹음해달라고 부탁했다는 번스타인과의 약속을 지켜 기쁘다고 말하는 지메르만의 목소리에는 특별한 감정이 묻어 있었다. 우리 집에 불이 난다거나 자연재해가 일어난다면 가장 먼저 챙길 음반 중 하나는 번스타인/지메르만이 함께한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2번이다. 말러나 쇼스타코비치, 브루크너 같은 대편성 오케스트라의 실황을 주기적으로 듣지 않으면 금단증상에 시달리는데, 가을이 다가오고 바람이 서늘해지면 브람스가 절실하게 그리워진다. 이 음반은 거의 영적인 에너지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몸과 마음의 준비를 하고 듣는다. 이렇게 피아노를 깊이 헤아리는 지휘자와 오케스트라의 선율에 자신을 온전히 실은 피아노를 어디서 또 들을 수 있을까.
음악에는 경계가 없다
단순한 협주곡 이상의 합을 들려주는 이 음반을 생각하면, 지메르만 외에 번스타인을 연주할 다른 피아니스트가 떠오르지 않는다. ‘레너드 번스타인이 누구지?’ 하는 영화 팬들은 뮤지컬 걸작 영화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1961)를 떠올려보자. 사랑에 빠진 마리아(내털리 우드)가 부르는 귀에 쏙 들어오는 명곡 <Tonight>를 작곡한 이가 바로 번스타인이다. 흥겨운 분위기 덕분에 클래식 콘서트에서도 자주 연주되는 <Mambo>도 번스타인의 것이다. 그럼 작곡가구나, 하겠지만 그의 이름 앞에는 여러 명사가 붙는다. 마치 여러 개의 삶을 엄청난 에너지로 한꺼번에 살아낸 것처럼 말이다. 그는 작곡가이며 동시에 지휘자이고, 놀라울 만큼 열정적으로 음악 강연을 하는 강연자였으며, 여러 편의 저술을 남기기도 했다. 보통은 하나도 제대로 해내기 어려울 만큼 집중력과 에너지가 소요되는 작업들을 생애에 걸쳐서 모두 해낸 사람이라, 가만히 그의 인생을 들여다보면 ‘대체 한 사람이 이걸 다 했단 말이야?’ 하고 눈이 휘둥그레진다. 작곡가나 지휘자, 피아니스트로서 세계적인 수준으로 성공하는 것은 둘째치고 평범한 사람들은 평생 꿈꾸고 소망하더라도 둘 중 단 하나의 타이틀도 자신의 이름 앞에 제대로 달기 어렵다. 번스타인은 작곡가로서나 지휘자, 피아니스트로서 모두 걸출하고 탁월했다. 그의 이름 앞에는 여러 형용사가 붙는다. 그는 미국 태생으로 미국에서 음악 교육을 받은 지휘자로서 언제나 ‘최초’로 혼자 길을 내어 먼저 간 사람이었다.
브루노 발터의 대타로 겨우 25살에 뉴욕필을 이끌면서 화려한 데뷔를 했지만 그는 그 한번의 행운이 그저 행운에 그치지 않게 할 만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번스타인은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본고장을 떠나온 유럽인들이 주름잡고 있던 미국 오케스트라의 지형도를 처음으로 바꾼 사람이었다. 미국 출신으로서 뉴욕 필하모닉의 첫 미국인 상임지휘자가 되었고, 뉴욕 필하모닉을 미국을 대표하는 가장 미국적인 악단으로 탈바꿈시키는 데 지대한 역할을 했다. 클래식 음악가로서 유명세에도 불구하고 당시로서는 새로운 장르이자 가장 미국적인 장르인 뮤지컬곡에도 거부감이 없었다. 손드하임의 가사에 번스타인이 곡을 쓴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의 면면을 보면 이런 조합이 정말 가능한가 싶을 만큼 엄청난 재능들이 모인 작품이며, 브로드웨이에서의 놀라운 성공 이후 바로 영화로 만들어질 만큼 화제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을 이해하게 된다.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영화가 여러 개의 오스카를 수상할 만큼 성공하고, 걸작의 반열에 빠르게 등재되면서 영화 팬들에게는 뮤지컬영화로 기억에 남아 있겠지만, 60년의 세월이 지나도 조금도 낡지 않는 것은 무엇보다 번스타인의 음악이다. 갑작스러운 전개에도 서사가 힘을 잃지 않도록 번스타인의 음악은 영화 전체를 구조적으로 받쳐준다. 그뿐인가. 등장인물들의 모든 움직임은 클래식 발레에 기반을 두고 있고, 패싸움을 하는 와중에도 모두가 조지 발란신 컴퍼니의 무용수처럼 움직인다. 드라마틱한 순간마다 들려오는 소리들은 모두 클래식한 편성의 오케스트라가 전통적 화성기법을 따라가고 있다. 멜팅포트 같은 미국이기에 무척 새로우면서도 기존의 장르 관습에 발을 디디고 있는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가 성공적으로 하나의 작품으로 탄생할 수 있었다.
강연자 번스타인의 ‘대답되지 않은 질문’
번스타인이 미국에서만 인정받는 지휘자에 그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유럽에서도 많은 지지를 받았고, 특히 빈필과는 놀라운 레코딩을 여럿 남겼다. 말러의 레코딩은 번스타인과 빈필의 지휘로 듣기 시작하면 다른 지휘자들의 연주가 모두 밋밋하게 들리는 부작용이 있다. 말러를 처음 듣기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조심스레 권할 만큼 번스타인의 말러는 특별하다. 누군가는 과하다고 느낄 수도 있을 정도로 꽉 찬 화려한 미장센으로 시각을 사로잡는 영화들처럼, 악상 마디마디마다 강렬하고 진한 감정이 묻어난다. 언제나 최초였고, 남이 하지 않은 길을 갔으며, 자신의 세계를 확장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새로운 종류의 사람이었던 번스타인의 진면목은 그가 얼마나 TV라는 새로운 매체의 등장을 영리하게 이용했는지 <청소년을 위한 음악회>를 보면 명백해진다. 1958년부터 1972년이라는 긴 방영 기간과 4번의 에미상이 증명하듯, <CBS>를 통해 방영된 <청소년을 위한 음악회>는 전무후무한 엄청난 성공이었다.
한국에도 소개되어 방영되었을 정도니, TV 역사에서 이토록 예술과 미디어가 절묘하게 결합된 성공적인 사례는 또 없을 것이다.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고 있지만, 연령과 배경에 상관없이, 번스타인이 쏟아내는 뜨거운 진심과 절절하고 애정 어린 목소리는 모두를 속절없이 사로 잡고야 만다. 번스타인은 클래식 음악의 대중화에 성공한 후, 그에 안주하지 않고 한 걸음 더 멀리 간다. MIT, 하버드대 석학들과 함께 모여 언어학, 미학, 철학적인 관점에서 음악을 바라보며 대체 음악이 왜 우리를 감동시키는가에 대한 답을 찾아보려고 애쓴다. 이 노력이 고스란히 6개의 강의로 담긴 하버드 강좌 ‘대답되지 않은 질문’의 내용은 좀더 심오하게 음악을 파고든다. “도대체 인간의 감정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요? 우리를 그토록 깊이 감동시키는 음악의 내적 의미이거나, 악상을 통해 작곡가로부터 연주자로, 연주자로부터 청중에게로 전달된 감정일까요? 우리가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의 첫 부분을 듣는다면, 베토벤이 이 곡을 작곡할 때 느꼈던 것과 완벽히 일치하는 감정들을 느낄 수 있을까요? 제가 이 곡을 들을 때 느끼는 것들을 말로 표현해보려고 애썼습니다. 전 악장을 이렇게 다 언어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경우에 따라 눈물과 격정, 분노, 유혹을 떠올리게 하는 부분도 있겠군요. 저는 이것으로 간청과 거절의 그럴싸한 연극을 만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도 이해하듯, 본격적으로 형식을 갖춘 연극은 아닐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몇 마디에서는 견고한 구조적 일치로 끝나는 하나의 연극이라고 보아야 할 겁니다. 치닫던 악상들이 화해하며 끝났습니다. 하지만 베토벤 자신이 과연 이 화해를 느꼈을까요? 제가 임의로 이런 느낌들을 만들어낸 것일까요? 아니면 이런 느낌들이 음악을 통해 저에게 옮겨진 것이므로 베토벤이 가졌던 원래의 느낌과 얼마쯤 관련이 있는 걸까요? 우리는 어느 것이 정답인지 결코 알 수가 없습니다.” (하버드 강좌 중 일부를 필자가 번역한 내용.) 직접 만났던 몇몇 음악가 인터뷰이들이 뉴욕에서 공부하던 시절을 회상하며 뉴욕필의 오픈 리허설에서, 탱글우드음악제의 마스터클래스에서 번스타인의 강의를 들었던 경험을 들려주던 순간을 기억한다. “그의 목소리에는 너무나 뜨거운 진심과 열정이 어려 있어서, 그의 강연은 결코 잊히지 않는 강렬한 기억으로 남았다”고 이야기를 전하는 그들의 표정에는 그 순간의 감격이 잠시 스쳐 지나가고는 했다.
할리우드에서 다시 태어날 번스타인의 두 영화
이렇게 탁월하고도 놀라운 예술가의 존재는 할리우드 스타들에게도 영감을 주는 모양이다. <버라이어티>에 따르면 브래들리 쿠퍼가 번스타인 탄생 100주년을 맞아 <Bernstein>이란 제목의 자전적 영화를 감독하기로 했다. 파라마운트와 앰블린 엔터테인먼트가 공동 제작을 하고, 조시 싱어가 각본을 맡았으며, 브래들리 쿠퍼는 스티븐 스필버그, 마틴 스코시즈, 프레드 베너, 에이미 더닝 그리고 크리스티 마코스코 크리거와 함께 제작에도 참여한다. 이런 다채로운 인생을 산 번스타인을 주목하는 배우는 브래들리 쿠퍼만이 아니다. 제이크 질렌홀 역시 번스타인을 주제로 <The American>이라는 영화를 준비하고 있다. 캐리 후쿠나가 감독이 질렌홀과 함께하며, 브래들리 쿠퍼의 영화가 번스타인의 자전적인 스토리에 집중한다면, 제이크 질렌홀의 영화는 같은 인물을 다루면서도 스토리 라인 등이 다를 것으로 기대된다.
수년 전 이브 생로랑의 생애를 다룬 영화가 연달아 두편 나왔고 피에르 니네이와 가스파르 울리엘을 보면서 결이 다른 두 영화에 행복한 고민을 했던 것처럼, 영화 팬들은 주목받는 할리우드 배우들의 차기작을 설레는 맘으로 기다리기만 하면 될 것 같다. 미국을 대표하는 거장이자 탁월한 작곡가, 지휘자, 피아니스트, 대중 강연과 저술에도 뛰어났던 번스타인의 면면은 너무나 다채롭고 그중 과연 어떤 모습이 스크린에 담길지 모를 일이다. 이 가을과 어울리는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2번 혹은 빈필과 함께한 말러 교향곡 음반을 들으며 미리 상상해보는 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