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으로 트라우마를 입은 다음 여생을 폭력에 의존해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 그는 과거에 복수하는 중일까 아니면 생을 증오한 나머지 죽음을 재촉하고 있는 것일까? <너는 여기에 없었다>의 조(호아킨 피닉스)는 가정폭력 희생자이자 퇴역군인으로 개인적 의뢰를 받아 성매매 조직에 납치된 미성년자들을 구조하는 일로 살아간다. 딸을 납치당한 어느 뉴욕 정치인의 의뢰가 조를 근본적 질문과 맞서도록 떠밀 때까지. 해결사로서 조가 일하는 방식은 피도 눈물도 없다. 그러나 본인은 거기에서 한점의 카타르시스도 얻지 못하고 관객 역시 마찬가지다. 린 램지 감독은 극도로 경제적인 연출로 영화가 설명을 배제할 때 다다를 수 있는 풍성함을 보여준다. <너는 여기에 없었다>는 설정과 상징 등 여러 면에서 <택시 드라이버>(1976)와 어엿한 동시상영 프로그램으로 묶일 만하지만 변주라는 표현은 과소평가가 될 것이다.
09/02
<어른도감>(2017)에는 홀로 생활하는 두 여성 인물이 있다. 중학교 1학년 경언(이재인)은 홀아버지를 병으로 여의고 혼자만의 생활을 시작한다. 삼촌 재민(엄태구)이 돌봐주겠다고 짐을 싸들고 오지만, 이미 누구의 도움도 없이 간병하며 학교를 다녔던 경언은 삼촌을 성가시다고 생각한다. 마침내 소녀가 진심으로 “보호자가 되어달라”고 삼촌에게 청하는 이유는 자기로 인해 삼촌이 정착하길 바라는 마음이다. 재민의 돈을 목적으로 접근하는 점희(서정연)는 안정된 독신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재민이 자리를 비웠을 때 점희는 경언에게 “친구 별로 없다며? 괜찮아. 나이 들면 다들 남편과 자식만 챙기고 친구 소용없어”라고 조언한다. 재민의 속임수가 드러났을 때 점희는 “어떻게 그럴 수 있어?”라고 상대를 원망하기보다 ‘품위’를 되찾는 데에 집중한다. 나는 경언과 점희의 관계를 다루는 장면이 더 많았으면 하고 내심 바라며 영화를 보았다. 내가 아는 몇몇 관객은 재민이라는 무책임한 인물을 포용하기 어렵다는 점이 <어른도감>의 진입장벽이었다고 토로한다. 충분히 동의하지만, 나는 철없는 남성 캐릭터에 대한 감독의 관대함이 원인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김인선 감독은 여성 인물들의 성숙함과 문제 해결 능력을 신뢰하는 반면 남성 캐릭터에겐 상대적으로 기대치가 낮아 보인다. 이 추측은 감독의 단편영화들에서 비롯되었다. 김인선의 2014년작 <아빠의 맛>은 아빠가 가족을 등져 홀어머니 손에서 자란 맏딸이 교사가 되고 어머니의 재혼에 즈음해 소원한 아버지를 찾아가는 이야기다. 천하의 불한당을 예상했던 관객은 평온하고 성실하게 살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에 딸과 함께 다소 당황한다. 이주노동자 여성과 결혼해 아이를 낳고 치킨집을 운영하는 아버지는 돌아가는 딸에게 튀긴 닭을 싸준다. 입을 꾹 다물었던 딸은 발길을 멈추고 딱 한마디 한다. “하미씨(새 아내)에게 야야 하지 마세요. 민수가 배워요.” <수요기도회>(2016)에서는 화투판을 열어 돈을 버는 화장품 외판원 헤라(서정연)가 부업을 주선한 젊은 싱글맘(김새벽)이 노름에 빠지자 부채감에 시달린다. <어른도감>까지, 좋건 나쁘건 혼자 힘으로 살아가는 여성이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김인선 감독의 영화는 여자가 영화에 등장하기 위해 특별한 조건이 필요 없다는 사실을, 즉 특별히 아름답거나 강인하거나 히스테리컬하거나 박복하지 않아도 이야기의 주체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보편적 경험을 하며 살아온 여성 창작자에게서 자연히 발현되는 관점이다. 젠더의 편향이 관습의 일환으로 정착한 장편 장르영화의 거푸집 속으로 김인선 감독과 같은 여성감독들이 들어갈 때 진짜 어려움이 시작된다. 자연스러움은 부자연스런 정치적 의도로 간주되기 십상이고, 여성감독과 작가, 극중 여성 인물이 (극)소수일 때 그들은 ‘종’ 대표로서 비현실적인 요구를 감당 못하고 애매하게 좌초하는 악순환에 빠진다. 남성 캐릭터/배우가 누리는 보이지 않는 특권은, 개인으로서 설득력 있기만 하면 족하다는 점이다.
09/14
두 게이 남성의 특별한 주말을 그린 <위크엔드>(2011)가 호평받고 감독의 성 정체성이 알려지자 평론가들은 새로운 퀴어영화의 작가를 기대했다. 하지만 앤드루 헤이그 감독의 다음 장편은 이성애자 부부의 만년을 관찰한 <45년 후>(2015)였다. 다시 2년 후 헤이그는 미국으로 건너가 15살 소년과 경주마가 중심에 있는 <린 온 피트>(2017)를 완성했다. 소년과 말의 스토리라면 영화로 각색된 소설 <블랙 뷰티>와 <워호스>가 남긴 낡은 청사진이 있다. 주인공인 말은 여러 번 소유주가 바뀌면서 영욕을 맛보게 된다. 말의 시점으로 본 휴머니티의 다양한 면모가 펼쳐지고 나면, 말은 영원히 안주할 집을 찾고 관객도 평안을 얻는다. <린 온 피트>는 인간과 말의 유대를 다루고 있지만 나머지는 전형에 부합하지 않는다. 워싱턴주 스포켄에서 살던 소년 찰리(찰리 플러머)는 직업이 불안정한 아빠 레이(트래비스 피멜)를 따라 갑자기 포틀랜드로 이주한다. 레이는 자식을 학대하는 나쁜 아빠는 아니다. 다만, 애정이 레이가 줄 수 있는 전부다. 아버지가 아니라 형이었더라면 나무랄 데 없었을 터다. “너랑 나로 충분해. 도움은 필요 없어”라는 낙천적인 아빠에게 찰리는 끄덕이지만, 소년은 괜찮은 척하는 습관이 몸에 뱄을 뿐이다. 우연히 경주마 트레이너 델(스티브 부세미)을 만나 채용된 찰리는, 유순해서 다루기 쉽다는 이유로 고삐를 맡은 단거리 경주마 ‘린 온 피트’ (피트라고 줄여 불린다)에게 애착을 품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기지 못하는 경주마의 말로는 멕시코 도축장이고 이미 혹사당한 피트의 남은 나날은 손꼽을 정도다. 경솔한 연애의 결과로 아빠가 사고를 당하자, 찰리는 피트를 트레일러에 태우고 전망 없이 길을 나선다. 목적지는 어린 시절 다정했던 고모지만, 타인의 보살핌을 한번도 당연히 여긴 적 없는 소년은 고모에게 내쳐지더라도 슬퍼하지 않겠다고 생각한다.
<린 온 피트>는 고독한 소년과 말의 상호 우정에 관한 이야기라기보다, 다정한 영혼을 가진 아직 여린 인간이 결핍과 싸우는 여정이다. 피트와 찰리 사이에, 동물을 의인화한 소위 디즈니적 교감 에피소드는 전무하며 영화적으로 감정을 자아내려는 숏의 배치도 없다. 피트가 출전한 경주를 찍는 방식도 승부의 서스펜스와 말을 미화한 스펙터클은 철저히 배제됐다. 피트는 찰리의 시선을 돌려주지 않는다. 말은 애정에 호응하는 친구가 아니라 소년이 제 모습을 보는 투사 대상이다. 둘은 닮았다. 찰리와 피트에겐 명목상 보호자가 있으나 그들은 ‘정말로’ 돌봐주지는 않는다. 가난한 미성년자 찰리와 효용이 다한 경주마는 세상 끄트머리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다. 찰리가 마구간에서나 탈주 중에나 한번도 피트를 타지 않는다는 점이 시선을 끈다. 둘은 물을 나눠 마시며 나란히 사막을 건넌다. 말은 동행일 뿐 소년을 자유로운 세상으로 데려다 줄 탈것이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 피트는 곧 찰리이므로 극중에서 퇴장해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결코 불평을 입 밖에 내지 않던 소년의 내면에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아우성치고 있었는지 관객은 찰리와 피트가 단둘이 되었을 때야 비로소 알게 된다. 소년은 이사 오기 전 가까웠던 친구네서 하룻밤을 잔 추억을 말에게 들려준다. “콜린의 남매들은 같이 웃고 떠들며 아침을 먹었어. 걔네 엄마가 목욕가운을 입은 채로 팬케이크를 만들어주셨어. 내가 가본 최고의 장소야.” 객관적으로 소년의 역경은 제대로 돌봐주는 어른이 없다는 데에 있지만, 찰리 자신이 의식하는 고통의 원천은 자신이 아버지와 피트를 제대로 지키고 돌보지 못했다는 자괴감이다. 최근 개봉한 <살아남은 아이>(2017)와 <죄 많은 소녀>(2017)도 마찬가지였지만, 기대하지 않는 아이들을 지켜보는 일은 쓰라리다. <린 온 피트>는 찰리에게 행복을 약속하지 않는다. 다만 어디에 가도 그 장소를 집으로 만들 수 있는 청년의 조짐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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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림수
<안나, 평양에서 영화를 배우다>(2013)는 일종의 메이킹 다큐멘터리다. 시드니의 감독 안나 브로이노스키는 시민의 건강을 위협하는 호주 대기업의 탄층 가스 시추를 중단시키려면 최강의 반자본주의 프로파간다 영화가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전투적 사회주의 리얼리즘 미학의 보루 평양으로 날아간다. 감독이 북한의 일급 영화인들에게 배운 바는 호주의 스탭과 배우에게 전수된다. 저명한 시네필이었던 김정일의 저술 <영화와 연출>은 안나의 지침서인데 그중에서도 “창작에서는 크게 노리는 바가 있어야 한다”는 대원칙은 마치 내려치는 죽비처럼 심금을 울리는 바가 있다. <안나, 평양에서 영화를 배우다>의 태도는 북한의 예외적 문화에 대한 존중과, 권력이 정의와 아름다움을 독점한 사회의 우스꽝스러움을 구경하는 이국주의 사이에서 줄을 탄다. 그러나 호주 에너지 산업의 그늘과 북한의 선전영화 뒤 인민영화인들의 신실함을 세상에 알렸으니, 큰 노림수를 달성한 것만큼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