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밀회>(2014)에서는 조선족 여성(서정연)이 재벌 회장의 구애를 단칼에 거절하며 다음과 같이 일갈하는 장면이 나온다. “나 이래봬도 모택동 주석이 대문호 루쉰을 기리기 위해 세운 학교 다녔고, 만 인민이 다 평등하다, 내가 내 주인이다, 그렇게 배운 사람이요.” 내가 알기로 식당 일을 하는 ‘조선족’ 중년 여성을 사회주의 교육을 받은 배운 여성으로 재현한 건 이 드라마가 처음이었다. 계급-국적-젠더-나이로 켜켜이 쌓아올려진 스테레오타입이 한번에 부서지는 호쾌한 장면이었다.
그렇다면 북한 여성들은 어떻게 그려지고 있을까. 지난 평창동계올림픽부터 남북정상회담에서 단연 화제는 북한 지도층 여성들의 거침없는 태도였다. 최고권력과 혈연과 가족의 연으로 이어져 있다고는 하나 그 당당한 태도로 미루어 짐작건대 북한 여성들은 남한의 정치인 부인이나 누이의 위치에서 허용되는 권력 이상을 누리고 있음에 분명했다.
하지만 한국영화에서 북한 여성들이 재현되는 방식은 구태, 그 자체다. <코리아>(2012)에서 리분희로 분한 배두나가 특유의 카리스마를 보여준 것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남성 중심 북한 소재 영화에서 북한 여성은 남한 여성보다 더 순종적인 아내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공작>(2017)에서 남편이 데려온 친구를 위해 밥상 혹은 술상을 차리고 뒤로 빠지거나, <강철비>(2017)에서 위험한 길을 떠나는 남편을 배웅하는 역할로 나오는 식이다.
실제는 어떠했을까. 영화 <공작>에서는 ‘고난의 행군기’의 북한 모습이 시대 배경으로 등장한다. 자연재해 등으로 생산량이 급감한 데다가 김일성이 사망한 직후의 정치적 혼란기라 배급마저 중단되어 최소 수십만명에 이르는 북한 주민들이 굶어죽은 참혹한 시기였다. 북한 여성들은 생존 전쟁의 전사가 되어 특유의 승부욕과 생활력으로 이 시기를 이겨냈다. <북한 녀자: 탄생과 굴절의 70년사>를 집필한 박영자에 따르면, 당시 북한 여성들 사이에서 유행했던 말은 “달리는 여맹, 앉아 있는 당, 서 있는 사로청”이었다. 사로청은 김일성사회주의청년동맹으로 남성조직을 통칭하는데, 당과 청이 제 할 일을 못하고 있을 때 여성들의 조직인 여맹이 주도해서 소매를 걷어붙이고 나서 생활 문제를 해결해 나갔다는 것이었다. 북한 여성들은 새벽부터 나와 길을 쓸고 닦고 퇴근 후에는 장마당을 열고 국경을 넘어가 식량을 직접 구해오는 등 북한 사회의 체질을 바꾸었다. 얼마 전 만난 한 새터민 여성은 당시를 회고하며 그 어려운 시기에 여성들이 노력해서 마이너스 성장이 플러스 1% 성장이 되었으며, 당 차원에서 다 여성들 덕분이라며 칭송하는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고 기억한다.
남한도 다르지 않다. 1997년 구제금융위기 때 대량해고된 여성들은 같은 직종에 비정규직으로 재취업해 저임금 장시간 노동에 종사하며 경제위기의 한파를 온몸으로 겪었고, 금모으기 운동에 열정적으로 동참해 외환유동성 위기를 극복했다. 하지만 위기의 시대를 생존전쟁의 전사로 살아온 남북한 여성들의 모습은 형제애 가득한 스크린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젠더 의식 없는 리얼리즘이 종종 난센스가 되는 순간이라고나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