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소마이 신지 전작전 이후 <러브 호텔>을 꺼내 보다
2018-10-10
글 : 김병규 (영화평론가)
불균형한 몸, 불일치한 시간

소마이 신지 전작전에 대해 한줄의 지면도 할애하지 않은 잡지를 영화잡지라고 말할 수 있을까? 지난 9월 15일,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린 소마이 신지의 전작전이 막을 내렸다. 그동안 소마이의 영화를 소개하는 기회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의 모든 영화가 상영되는 건 국내에서 처음 성사된 일이다. 주관적인 판단이라는 전제를 두고 말하자면, 이는 올 한해 국내 시네마테크나 영화제에서 마련된 모든 특별전과 회고전을 통틀어 가장 중요한 기획이다. 그러나 어느 매체에서도 이 상영의 의의를 거론하지 않았다. 거창하게 시작했지만 답하기 쉬운 문제는 아니다. 소마이 신지의 전작을 상영하는 일은 지면에 실릴 만큼 중요하지 않은 것일까? 이건 영화주간지에서 다루기 어려운 주제일까?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이 상영이 지시하는 의미와 효과를 비중 있게 평가할 수 있을까?

이 철저한 외면은 시네마테크에서 상영되는 영화들의 목록을 사건으로 취급하는 데 무관심한 하나의 사례에 지나지 않을 테지만 구체적으로는 소마이 신지라는 연출자를 수용하는 방식의 진부함과도 연관되어 있다. 국내에서 소마이의 영화가 받아들여지는 패턴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경로로 구분되는데, 하나는 끝날 것 같지 않은 과격한 롱테이크를 그의 확고한 스타일로 받아들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흔들리고 넘어지고 돌진하는 몸짓으로 그 롱테이크의 공간을 누비는 아이들의 운동성을 원형적인 동력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틀린 말은 아니다. 아이들의 신체를 포착하는 롱테이크라는 요소는 소마이의 영화에서 분명 눈에 띄게 두드러지는 측면이다. 소마이의 이름을 알린 대표작(<숀벤 라이더>(1983), <태풍 클럽>(1985))들이 강력하게 발산하는 특징이라는 점에서 그러한 인식을 고착시키는 데 유효했을 것이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그것들이 전부는 아니다. 이는 소마이에 대한 부분적인 이해에 지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아이들의 영화를 소마이의 필모그래피 중심에 두고 그밖의 영화를 주변부에 배치하는 그릇된 범주화를 초래할 위험이 있다는 점에서 폐기되어야 마땅한 도식이다.

실제로 소마이는 이같은 도식으로 자신의 영화를 이해하려는 경향에 부정적인 반응을 표시한다. <도쿄 하늘 반갑습니다>(1990)를 만든 직후에 이루어진 마스터클래스에서 그는 자신이 80년대에 채택한 롱테이크를 ‘과장된 방법론’이라 표현하면서 “롱테이크라는 기법이 올바른 기술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라고 단언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롱테이크는 단지 “어떤 시기에 영화를 근본적으로 재인식하기 위한 방법”이다. 소마이의 롱테이크는 일관된 형식이라기보다 영화의 익숙한 외형을 매 순간 달라지는 낯선 모습으로 변형시키기 위한 임의적 장치다.

주목할 것은 그가 롱테이크를 80년대라는 시대적 조건과 함께 논의한다는 점이다. 소마이는 롱테이크를 특정한 시기의 영화 제작 환경에서 사용한 잠정적인 방법으로 이해할 뿐 영화를 다루는 원형적인 스타일로 인식하지 않는다. 영화평론가 후지이 진시가 일본영화의 제도적 맥락을 빌려 지적하는 사항도 이와 유사하다. 그의 분석에 따르면 소마이가 데뷔작인 <꿈꾸는 열다섯>(1980)에서부터 롱테이크를 중심으로 한 스타일을 정립할 수 있었던 것은 “소네 추세이의 <천사의 창자: 붉은 교실>(1979)에서 이미 강렬한 롱테이크 화면을 선보인 바 있는 미즈노 노부마사를 촬영감독으로 얻은 게 결정적”이라는 것이다. 소마이는 단순히 롱테이크의 외형에 집착한 작가가 아니라 일본 스튜디오 시스템의 붕괴 이후로 변모하던 영화와 세계의 진동을 필름에 새겨넣은 예민한 지진계다. 더불어 이 강의에서는 고등학생을 주연으로 삼은 <도쿄 하늘 반갑습니다>에 대한 당시의 평가도 언급되는데, 80년대에 마무리 지은 아이들 영화로 되돌아간다는 식의 비판적 견해가 제기되었다는 소마이의 증언이 기록되어 있다. 이런 평가는 소마이라는 작가를 둘러싼 당시의 인식을 환기하는 것으로, 역설적으로 그가 ‘아이들’ 영화에만 머물러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예증한다.

롱테이크에 관한 소마이의 견해나 <도쿄 하늘 반갑습니다>를 비판하는 당대 평가의 타당성과는 별개로 해당 강의에서 우리는 단지 ‘아이들’, ‘롱테이크’ 따위의 간단한 키워드로 소마이의 세계에 접근하는 것이 몹시 제한적인 탐구의 방식, 소마이 자신의 규정을 빌리자면 ‘80년대의 소마이’만을 이해하는 경로에 그치리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한 연출자의 모든 영화를 본다는 것은 작가를 둘러싼 주류적인 담론에서 이탈해 다른 각도의 보기를 환기하는 실천적 행동이기도 하다. 소마이 신지처럼 우리에게 충실히 소화된 적 없는 작가의 경우라면 그러한 효과는 더욱 선명하게 발현될 수 있을 것이다.

소마이 신지의 여섯 번째 영화인 <러브 호텔>은 그의 경력 초창기를 환기하는 로망포르노이면서(그는 닛카츠 영화사 소속으로 스무 편이 넘는 로망포르노 영화에 조감독으로 참여했다) 소마이의 영화를 수식하던 특징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 예외적인 사례다. 끈질기게 이어지는 롱테이크가 사용되고는 있지만 이전 작품처럼 하나의 장면 안에서 공간과 상황이 몇 차례씩 변화하는 다면적인 숏으로 펼쳐지지는 않는다. 대신 카메라는 자동차 내부, 호텔과 오피스텔의 단칸방 등 폐쇄적인 공간을 주시한다. 아이들의 움직임도 보이지 않는다. 맨 마지막 장면을 제외하면 아이들의 존재는 화면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란으로만 주어진다. 생명력의 과잉으로 넘쳐흐르는 계절의 조건과 육체의 활력 또한 배제되어 있다. 줄곧 여름을 배경으로 삼은 전작들과 달리 <러브 호텔>은 겨울의 건조한 풍경을 비추고 있으며, 그러므로 여름에 만들어진 소마이의 영화들처럼 불꽃놀이가 터지는 축제의 시간이나 춤과 노래가 펼쳐지는 무대 공간이 개입할 여지도 없다. 인물들은 무표정한 얼굴로 거리를 걷고 내적인 우울을 삼킨다. 우울을 견딜 수 없을 때 자살을 시도하거나 몸서리치는 섹스를 나눈다. 소마이의 영화는 현실을 초과하는 허구적 무대의 역량, 프레임을 이탈하는 움직임, 외형을 뒤바꾸는 피사체의 몸을 매개로 변형의 이미지를 생산해왔다. <러브 호텔>은 소마이의 세계에서 변형을 만들어내는 조건이 사라졌을 때, 소마이적인 인물들의 몸이 마주하는 뒤틀림과 어긋남을 포착하는 시도다. 영화 전체를 설명할 생각은 없다. 주목하고 싶은 건 영상의 표면적 질서를 초과해버리는 그 부조리한 뒤틀림과 어긋남의 순간들이다.

도입부에서 우리의 눈을 사로잡는 것은 프레임 한복판에 천연덕스럽게 배치된 거울의 면모다. 빚을 갚지 못한 무라키(데라다 미노리)가 사무실에 들어서면 사채업자가 아내를 강간하는 모습이 거울에 비친 채로 화면 가장자리에 투사되어 관객과 무라키의 눈앞에 나타난다. 단편적인 조각으로 화면 일부분을 차지하는 거울의 형상은 스크린은 이중으로 분리한다. 스크린의 분열이라는 방법론이 일찌감치 예고되는 것이다. 이 장면은 선형적인 시간으로 전개되는 <러브 호텔>에서 유일하게 과거시제로 제시되는 장면이다. 절망적인 과거가 마치 영화의 이미지를 보는 것처럼 카메라 앞에 직시되고 있다. 이중의 스크린이 영화를 촉발시키는 기제로 출현하는 것이다.

이중의 스크린은 무라키와 유미(하야미 노리코)가 처음 마주치는 호텔방 침대에 걸린 네면의 거울로 확장된다. 복수의 거울을 활용한 화면의 양식이 특별한 것은 아니다. 소마이는 그런 미적 효과에는 관심이 없다. 유리창에 비친 얼굴을 바라보고 자살을 결심하는 <태풍클럽>의 미카미처럼 소마이의 영화에서 거울 앞에 선다는 것은 현실 속의 위태로운 자아를 직시하는 행위다. <러브 호텔>에는 거울이 너무나 많다. 어느 곳을 둘러봐도 내 모습은 거울에 붙잡혀 있다. 여럿으로 나뉜 호텔방의 거울이 지목하는 것은 조각난 현실의 단면들이다. 손발이 묶인 채 다면 거울 앞에 홀로 남은 유미의 신체 위로 여러 목소리의 신음과 비명이 겹치는 것은 그런 단면들의 조합이 빚어내는 잔상을 음성적으로 대체한 현상일 것이다. 단일한 신체로 현재를 살아가는 인물의 반응과 다수의 스크린으로 복잡한 시제를 소화하는 거울의 질서가 하나의 숏 안에서 격돌한다. 이것은 전조에 지나지 않는다. <러브 호텔>은 곳곳의 거울에서 인물과 세계가 빚어내는 불화의 흔적들로 교전을 벌인다.

이러한 불화는 영화의 시간 축에서도 발생한다. 때로 <러브 호텔>의 시간은 일상적인 리듬으로 흘러가지 않는데, 무라키가 유미를 택시에 태우는 대목이 첫 번째 예시다. 무라키를 몰라보는 유미는 그에게 요코하마로 가달라고 요구한다. 매혹적인 조우, 또는 재회의 순간이다. 때마침 흘러나오는 야마구치 모모에의 노래 제목(<밤으로…>)이 명시하는 것처럼 무라키와 유미의 동행은 단순히 공간적인 이동이 아니라 밤의 시간으로 이행하는 몽상적인 여정을 표상한다. 영화는 물리적인 거리감을 무시하면서 출발지인 유미의 집과 도착지 요코하마를 곧바로 연결되는 두 숏으로 붙여둔다. 그들의 여정은 현실의 지리적 경로를 따르지 않는다. 유미는 자살하기 위한 공간에 비약적으로 도달해버린다.

현실에 미묘한 위화감을 덧씌우는 현상은 유미의 집에서도 유효하다. 그녀의 방이 등장할 때마다 한 가지 변화가 관측되는데, 도저히 출현을 이해하기 힘든 사물들이 차례로 늘어나는 것이다. 전에 없던 거대한 화분이 느닷없이 탁자 위에 놓여 있거나, 절망에 빠진 유미의 뒤로 아이의 모습을 한 관절 인형이 보이는 식이다. 유미가 물건을 사왔다는 정보는 당연히 주어지지 않는다. 그 사물이 등장하는 당위성이 제시되는 것도 아니다. 이 사물들은 유미의 결핍을 무의식적으로 대리하는 소품인 걸까? 그럴지도 모르지만, 상징적 접근보다 흥미로운 것은 스스로 구축한 실내의 질서를 영화가 파괴하는 순간이다. 불륜 상대에게 버림받은 유미는 상대방과 통화하는 상황을 혼자 연기하면서 독백을 이어간다. 카메라는 방에 펼쳐진 사물들(화분, 인형)을 앞질러버리고 수화기를 붙잡은 유미의 얼굴만을 프레임에 남겨둔다. 모든 우회와 변화의 가능성을 차단해버리는 순간, 허구적 연기가 끝나는 것을 주시하는 가혹한 종결의 시간이다. <러브 호텔>의 인물들은 소마이의 아이들이 종종 그런 것처럼 노래와 연기를 수행한다. 유미의 독백, 혹은 무라키의 아내가 그네에 앉아 홀로 노래를 부르는 순간들을 떠올릴 수 있다. 그러나 이곳에선 그 음성과 몸짓을 노래와 연기의 형식으로 번안하는 무대가 존재하지 않는다.

멀리 떨어진 도시는 과도할 만큼 빠르게 접합하고, 사물은 현실과 무관하게 우리의 환경을 재구성한다. 리얼리티와 대립하는 이런 사소한 불화의 징후들이 <러브 호텔>의 화면에 부조리한 공백을 기입한다. 시각적 불화의 포화상태에 다다른 영화가 되돌아올 수 있는 유일한 장소는 다중의 거울 앞에 분열된 몸을 의탁할 수 있는 호텔 방일 것이다. 두 사람의 만남이 안정적으로 계속될 리는 없다. 관계의 파국을 예감한 듯한 유미는 섹스를 나누며 무라키에게 내일 다시 만날 것을 요청한다. 그러나 그들은 미래의 시간에 도착할 수 없다. 그 순간, 시간의 굴절이 다시 유미의 신체에 기입된다. 유미는 갑자기 감기약 기운이 돌아 몽롱하다고 말한다. 그런데 유미가 감기약을 먹은 것은 전날 밤의 일이다. 시차를 두고 작용한 약의 기능으로 인해 유미는 움직임을 멈추고 섹스를 중단한다. 잠깐이지만 흡사 시체가 돼버린 듯 경직돼버린다. 달리 말할 수 없는, 사랑과 시간의 중단에 대한 신체의 즉물적인 반응이다. 시간의 이탈과 비약이라는 특수한 조건 위에서 다시 마주한 무라키와 유미는, 멈춰버린 몸으로 현실의 흘러가는 시간에 대항한다.

움직임을 멈춘 인간의 몸이라는 제재에 소마이만큼 몰두한 연출자도 없을 것이다. <세일러복과 기관총>(1981)에서 본의 아니게 야쿠자들의 세계에 들어와버린 고등학생 이즈미는 총격전으로 살해당한 수많은 시체를 바라보며 “왜 이렇게 많은 사람이 죽어야 할까…”라고 중얼거리는데, 이는 연출자가 스스로 제기하는 자문처럼 들린다. 필모그래피를 통틀어 소마이는 끊임없이 시체를 관찰해왔기 때문이다. 각도를 바꾸고 크기를 달리하면서 몇 번이고 렌즈에 시신을 담아낸다. <물고기 떼>(1983)에서는 단순히 시체를 보여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살아 숨 쉬던 인간의 몸이 천천히 호흡을 멈추고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시체를 묘사하는 게 여의치 않다면 프리즈 프레임을 동원해 어떻게든 몸의 움직임을 멈춰버리는 것으로 영화를 끝낸다(<숀벤 라이더>, <빛나는 여자>(1987), <도쿄 하늘 반갑습니다>). 그는 생동하는 육체에 매혹된 만큼이나 움직임을 멈춘 시체에 중독되어 있다. 삶에서 죽음으로의 이행은 가장 결정적이고 결코 돌이킬 수 없는 변형의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부동 상태를 연기하는 유미의 몸은 그런 의미에서 무척 특권적인 장소로 형상화된다. 그것은 신체와 시체, 운동과 경직, 생명과 죽음의 경계에 자리 잡은 픽션의 양면에 이중적으로 접속하는 매개로서의 몸이다. 유미는 그녀의 삶을 포획하던 다면 거울 앞에서 움직임을 멈춘다. 거울에 대한 몸의 저항, 프레임에 대한 피사체의 저항, 현실적 시간에 대한 영화적 허구의 저항이 한 곳에서 격돌하고 불화는 끝내 종결되지 않는다. 정지한 피사체의 침묵은 마침내 섹스를 포함한 영화 속의 모든 신체의 움직임이 필름의 표면 위에 잠시 나타났다 사라지는 임시적 흔적이라는 것을 폭로한다. 격렬한 섹스를 치르던 무라키는 고개를 들고 네면의 거울을 바라보는 순간에 문득 깨닫는다. 신체적 자극으로 가득한 그들의 섹스조차 스크린의 한 조각을 이루는 잠정적인 부분에 불과할 뿐이다. 남자는 떠나고, 여자는 다시 도시를 배회할 것이다. 그 규칙이 호텔방 거울에 스치는 순간 섹스는 끝나고 두사람이 재회한 시간도 끝난다. 거울 앞에 머무른 뒤 순간적으로 사라지는, 스크린 위를 떠도는 유령처럼 그들은 자신들의 운명을 직시한다. 소마이 신지는 어쩌면 가장 세속적인 로망포르노 장르 안에서 자신의 영화에 관한 가장 성찰적인 숏을 성취한 건지도 모른다.

그러고 나면 잊을 수 없는 결말이 우리를 기다린다. 유미는 기대감을 안고 무라키의 집을 찾아가지만, 그곳엔 아무도 없다. 왔던 길로 발걸음을 되돌리면 무라키의 아내가 계단을 내려가는 것이 보인다. 두 여자는 불현듯 서로를 돌아보고 다시 각자의 걸음을 지속한다. 터무니없을 만큼 과도한 벚꽃이 쏟아져 내리고 카메라 바깥에서 들려오던 아이들의 소란과 환호성이 화면 가득 채워진다. 이 순간에 유미는 프레임으로부터 추방당하고 없다. 이것은 필연적인 집행이다. 아이들이 화면에 포착되면 유미는 퇴장할 수밖에 없다. 겨울이 끝나고 봄이 도래하면 영화는 끝날 수밖에 없다. 무라키와 유미는, 혹은 그들을 포착하던 영화는 시간의 흐름이라는 세계의 균일한 질서와 화해할 수 없다. 이것이 <러브 호텔>이 도달한 영화적 역학의 실행이다.

벚꽃이 무수히 떨어진다. 봄이었던가? 시간의 이탈이라는 조건 속에서 재회한 무라키와 유미의 관계가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겨울에서 봄으로의 계절의 변화가 다급하게 실현되고 있다. 영화적 허구의 시간이 끝나고 현실의 속도로 복귀하는 엄격한 시간의 흐름 위에 무라키와 유미를 위한 장소는 없을 것이다. 이 결말에서는 단지 언제나 우리를 무심하게 앞서가는 세계의 속도가, 우리의 좌절에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세계의 아름다움이 아이들의 환희와 함께 무람없이 과시되고 있다. 카메라는 계단을 올라가는 유미와 내려오는 무라키의 아내의 짧은 마주침을 비춘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벌거벗은 몸을 목격하던 두 인물은 아마도 유사한 궤적과 동선으로 이 자리에서 마주쳤을 것이다. 영화는 마지막 무대를 장식하는 모든 요소들이 화면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숏을 지속한다. 여인들은 프레임의 바깥으로 걸음을 재촉하고, 아이들마저 이내 사라지고 없다. 벚꽃은 곧 그칠 것이다. 봄이 도착한 시기에 소마이의 영화를 이루던 움직임의 소멸이 우리의 눈앞에 스쳐 지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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