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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춘천> 장우진 감독 - 아름답고 지루한 도시에서
2018-10-11
글 : 김소미
사진 : 백종헌

춘천에 도래한 가을 속에 쌍을 이루는 서로 다른 기행이 있다. 장우진 감독은 <춘천, 춘천>(2016)에서 20대 끝자락의 피로와 권태로 방황하는 청년 지현(우지현)과, 서울에서의 역할로부터 도피해 짧은 여행에 나선 중년의 커플 흥주(양흥주)·세랑(이세랑)의 이야기가 ‘데칼코마니’ 같다고 말한다. 춘천행 열차에 몸을 싣는 세 인물이 안개처럼 서서히 흩어지는 광경을 지켜보고 있으면, 어느덧 선명한 우울과 고독을 대면하게 된다. 2014년 전주국제영화제에서 한국경쟁 부문 대상을 수상했던 데뷔작 <새출발>(2014)에서 시작해 2016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한국영화의 오늘-비전’ 부문 감독상을 수상했던 <춘천, 춘천> 그리고 올해 전주국제영화제에서 공개된 <겨울밤에>(2018)까지 장우진 감독은 지금껏 세편의 영화에서 조금씩 형식적 변주를 거듭해온 주목받는 감독이다. 영화제 순방으로 바빴던 <춘천, 춘천>의 개봉을 앞두고 만나는 자리, 춘천에서 나고 자란 감독은 기차를 타고 달려와 화답했다.

-인디스페이스 단관 개봉이라는 소식을 듣고 놀랐다. 개봉 형태에 대한 감독의 소신이 느껴지는 부분인데.

=감독 입장에서는 최대한 많은 극장에서 상영되길 바라는 마음이 보통이다. 그런데 프로듀서를 겸하며 그 과정을 경험해보니 일정 부분 무의미하게 느껴지더라(장우진 감독은 제작사 봄내필름에서 만든 김대환 감독의 2017년작 <초행>에서 프로듀서를 맡았다.-편집자). 1~2주차 반응에 따라 기하급수적으로 스크린 수가 줄어드니까. 가능하다면 1개관이라도 장기 상영을 하고 싶었다. 인디스페이스에 다 같이 모여서 영화를 본다는 것, 서로를 확인하고 반가운 얼굴도 만나게 되니 내 입장에서도 힘이 난다. 아주 없었던 사례는 아니지만 극영화로서는 꽤 오랜만의 개봉 형태로 알고 있는데, 유의미한 케이스로 남길 바란다.

-깊은 수렁에 빠져 있거나 그곳에서 헤엄쳐 나오고 싶은 정서를 풍경과 일치시켰다. 촬영 당시엔 어떤 눈으로 세상을 바라봤나.

=5년간 취업 준비에 한창이던 친구가 있었다. 먼저 연락이 없기에 나도 조심스러워서 연락을 끊고 지냈다. 그 친구는 춘천에서 태어나서 자라고, 대학까지 나왔고 그래서 춘천을 지긋지긋하게 벗어나고 싶어 했다. 호수의 도시에서 사람 또한 고여 있다는 인상, 외부와 차단된 상태에서 좁아지고 곪아가는 마음에 대해서 생각했다. 그런 와중에 춘천행 ITX 청춘열차에서 등산복을 입은 어느 중년 커플을 보게 된 거다. 친구와는 정반대로 춘천으로의 일탈을 꿈꾸는 사람들이었다. 곧바로 두쌍의 이야기를 병치시키는 구조가 다가왔다. 당시에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영화의 엔딩이었다. 불현듯 여행의 끝을 상상하게 된 나의 쓸쓸한 정서에는, 돌이켜보면 당시 사회적, 정치적으로 불운했던 분위기도 얼마간 담겨 있는 것 같다.

-익명의 누군가, 혹은 보통의 누군가로 인물에게서 거리를 둔다. <춘천, 춘천>에서는 지역색이 강한 무대 위에서 개인의 특수성과 세대를 막론하고 사람들이 서로 비슷한 방식으로 공명하는 것처럼 보인다.

=풍경과 인물을 분리시키지 않았다. 인물 또한 시공간 속 하나의 현상이기를 바랐다. 클로즈업을 많이 쓰지 않은 이유다. 그래서 인물의 가정사나 학창 시절이 어땠는가 등 과거를 구태여 설명하지 않고, 지금 이 순간 누구에게나 있을 법한 경험을 중심에 뒀다.

-춘천에서 나고 자란 지역민으로서 영화에 투영된 정서가 있다면.

=지방 소도시에 머무르는 청춘들의 비슷한 지점인데 자신이 사는 곳을 지루하게 느낀다. 특히 자라면서는 상경에 대한 욕망으로부터 자유롭기 어렵다. 외부인이 느끼는 낭만 혹은 운치를 내부인들은 잘 느끼지 못하는 것과 같다. 나도 타지 생활을 오래 하다가 다시 돌아가니 그제야 알겠더라. 춘천의 아름다움과 지루함이 둘 다 보이기 시작하는 즈음에 이 영화를 찍었다.

-촬영 회차와 인원수 등 기본적인 촬영 방식을 소개해달라.

=2015년 10월에 약 한달간 촬영했다. 2, 3일 일하면 꼭 하루는 쉬는 등 충분히 시간을 가지며 촬영했다. 실제 회차는 17회차 정도인데, 스탭 및 배우들이 모여서 같이 먹고 노는 데도 그 정도 걸린 것 같다. 배우들이 한달을 통째로 일정을 비웠다.

-빠르게 변하는 가을 그리고 초겨울의 계절감을 선연하게 담았다.

=꽃처럼 핀 단풍이 사람들을 한껏 낭만적으로 동화시키는가 하면 불과 3, 4일 차이로 갑자기 차가운 바람이 불기 시작해 낙엽들이 사라진다. 어느덧 앙상한 나뭇가지만 남은 풍경은 겨울에 가까운 이미지이지만 시간적으로는 여전히 가을인 셈이다. 대비되는 풍경과 시간의 속성이 모두 흥미로웠고, 그래서 계절감을 최대한 담았다.

-며칠 사이에 시각적으로 달라지는 계절이기에 일정에 촉박함은 없었나.

=전혀. 다만 그해에는 유독 안개가 잘 안 끼어서 안개를 기다리느라 3일을 쉰 적도 있다. 어느 날 새벽 5시에 재난문자가 오더라. 춘천엔 종종 안개 경보가 내린다. 일조량이 낮아지고 안개가 자욱해지면 이른 아침 출근길엔 위험하니까. 그 상황에 우리 팀은 이보다 더 신이 날 수는 없는 상태로 뛰쳐나갔다. 전체 스탭이 나를 포함해 총 3명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나, 김대환 PD, 그리고 조수 한명. 촬영, 녹음을 내가 맡았고 김대환 PD가 붐마이크를 들었다.

-감독님이 구축한 저예산영화의 시스템 속에서 빛을 발하는 것 중 하나가 우연의 침투인 것 같다. 따지고 보면 열차에서 구상된 이 영화의 시작부터 우연인 셈이다.

=촬영장에서도 나는 내 리듬을 굳이 섞으려고 하지 않는다. 우연하게 찾아오는 바깥의 리듬이 프레임 안으로 들어오도록 허용하는 방식을 선호하는 것 같다. 프레임 밖을 전혀 통제하지 않는다. 심지어는 카메라를 세워두고 내가 가끔 화면 안으로 들어가버리기도 하니까. 물론 영화에 쓰진 않았지만. (웃음)

-이쯤되면 감독님이 출연할 때도 되지 않았나.

=(폭소) 언젠가는 한번 그럴 수도 있겠지.

-롱테이크 신에서 배우들의 애드리브를 허용하는 방식은. 이를테면 하나의 화제당 듀레이션(지속 시간) 같은 걸 정해두기도 하나.

=시간은 무한대로 열어둔다. 어떤 화제를 어떤 순서대로 말할 것인가만 반드시 정한다. 틀 안에서 오는 우연, 현장을 침범하는 것들을 받아들인다. 흥주와 세랑이 막걸리를 마시며 대화하는 신은 원래 청평사에서 내려온 두 사람이 어느덧 과거의 추억을 떠올리는 설정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사마귀가 나타나고, 양흥주 배우가 그걸 보면서 어린 시절 이야기를 시작하는 거다. 쿵후 이야기까지 나올 줄은 감독인 나로서도 전혀 예측하지 못한 지점이다. 사실 촬영 3회차 정도까지는 배우들도 어디까지 연기를 열어두면 좋을지 헷갈려했다. 감을 잡으라고 내가 일부러 상황을 흩뜨리기도 했다. 불쑥 프레임에 난입해서 “저기, 여기 화장실 어디인지 아세요?” 행인처럼 묻는 식이다. 계속해서 틀 밖으로 나오도록 즉흥성을 유도해봤다.

-풍경과 장소에 이미 놓인 것들 위에서 무언가를 발견하는 작업이 가장 즐겁다고 느끼나. 계속 자신의 작업방식을 바꿔가는 것처럼 보인다.

=남한에서 IMF를 겪은 80년대생과 북한의 장마당 세대가 베를린에서 만나는 이야기인 다음 작품은 조금 더 통제된 세계로 진입할 예정이다. 롱테이크도 줄어들고, 조명과 미술 등 프로덕션 디자인이 중요한 프로젝트다. 그외에 춘천의 사계절 프로젝트(<춘천, 춘천> <겨울밤에>에 이어 봄과 여름이 남았다.-편집자)의 봄편도 구상 중인데, 이번엔 아예 구조를 거의 조각하지 않으려 한다. 그러니까 단상에서 출발해서 영화가 어떻게 나올지 지켜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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