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뷰티풀 데이즈> 배우 이나영, "이야기와 캐릭터에 설득됐다면 그 캐릭터가 되려고 노력할 뿐"
2018-10-11
글 : 이주현
사진 : 최성열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 <뷰티풀 데이즈>

제23회 부산국제영화제(이하 부산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된 윤재호 감독의 <뷰티풀 데이즈>(2017)는 이나영이 6년의 공백을 깨고 선택한 영화다. 탈북 여성에 다 큰 아들을 둔 엄마 역할. 악질 탈북 브로커를 만나 고생하는 10대, 나이 많은 조선족 남자와 결혼해 시골에서 가정을 꾸리는 20대, 그리고 서울에서 술집을 운영하며 애인과 새 삶을 사는 30대의 현재까지, 캐릭터의 긴 역사도 소화해야 했다. 작품에 대한 혹은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으면 쉽게 선택할 수 없는 작품이다. 고정된 이미지에 갇히길 거부하며 늘 과감한 선택을 해온 이나영은 <뷰티풀 데이즈>에서도 전에 본 적 없는 모습을 보여준다. 빨갛게 머리를 염색하고 빨간색 가죽 코트를 입고 아들에게 된장찌개를 끓여주는 ‘엄마’ 이나영의 잔상은 꽤 깊다. 부산영화제가 개막하기 전, 서울에서 미리 이나영을 만났다.

-<씨네21>과의 인터뷰는 물론 인터뷰 자체가 오랜만이다.

=언제가 마지막 인터뷰였는지 기억이 안 날 정도다. 여기 <씨네21> 스튜디오에도 오랜만에 오는데, 예전 그대로의 모습이라 오히려 긴장도 풀어지고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변하지 않아서 고마운 마음? (웃음)

-오랜만의 출연작 <뷰티풀 데이즈>가 부산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됐다. 개막작으로 부산을 찾는 기분은 어떤가.

=돌이켜 보니, 공식 초청 작품으로 부산영화제를 찾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부산영화제라는 영광스런 자리에 개막작 배우로 참석한다는 게 뿌듯하다. 한국 배우로서 자부심을 느낀다.

-부산영화제가 올해로 23회인데 그동안 작품으로 초청된 적 없다는 게 의외다.

=<아는 여자>(2004) 때 무대 인사하러 간 적은 있는데, 그외엔 없었다. 타이밍이 안 맞았던 것 같다.

-<하울링>(2011) 이후 6년 만의 복귀다. 꽤 오랜 시간 작품 활동을 쉬었다.

=개인적 삶 때문에 영화를 잊었던 적은 없다. 다만 <하울링> 이후 어떤 작품으로 찾아뵈면 좋을까, 내가 잘할 수 있고 또 하고 싶은 걸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깊었다. 내가 진짜 원하는 걸 자신 있게 보여주고 싶은 욕심이 커지다보니 본의 아니게 공백의 시간이 길어졌다.

-영화를 잊었던 적이 없다면 그만큼 연기에 대한 갈증, 작품에 대한 목마름도 컸을 텐데.

=그건 그랬다.

-어떻게 참았나.

=그렇다고 해서 무언가를 억지로 하면 후회를 하고 금방 지칠 것 같았다. 공부 아닌 공부도 많이 했다. 좋은 영화 보면서 자극도 받고, 그렇게 지내다보니 의외로 시간이 엄청 빨리 가더라. (웃음)

-그렇게 신중히 선택한 작품이 <뷰티풀 데이즈>다. 어떤 점에 매료돼 출연을 결심했나.

=많은 사건과 복잡한 내용이 담긴 시나리오였지만, 장황하지 않고 오히려 단순하게 표현된 이야기가 좋았다. 그 단순함에서 오는 깊은 감정이 있었다. 그리고 예전부터 시골의 정서나 순박하고 편안한 느낌을 좋아했다. 영화에서 파마머리를 하고 나오는데 파마를 더 강하게 할걸 그랬나 하는 미련도 남는다. (웃음) 또 감독님이 어떤 분이기에 이런 이야기를 썼나 싶어서 전작 다큐멘터리 <마담B>(2016)도 찾아봤다.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분명한 감독님이란 생각이 들었다. 탈북자 이야기를 단순히 소재로만 삼지 않을 분이라는 믿음이 들었다. 그냥 감독님만 믿고 따라가면 되겠구나, 나만 잘하면 되겠구나 싶더라. 이건 뭐 안 할 수가 없는 작품이었다. (웃음)

-저예산영화, 신인감독의 장편 극영화 데뷔작, 탈북자 엄마라는 센 캐릭터까지 무엇 하나 쉬운 조건이 아니었다. 오토바이 타는 형사로 분했던 <하울링>이나 남장을 하고 트랜스젠더 캐릭터가 되었던 <아빠가 여자를 좋아해>(2009) 등 매번 쉽지 않은 길을 자처해서 걸어간다는 느낌이 든다.

=개인적으로는 ‘도전이다’, ‘새로운 선택이다’ 그런 말들이 낯설다. 도전이나 모험과 같은 단어가 내 머릿속엔 없다. 그때그때의 감정과 생각을 바탕으로, 내가 하고 싶고 할 수 있는 것들을 선택하는 것뿐이다. 더 다채로운 이야기와 캐릭터를 만날 수 있다는 점에서 독립영화와 예술영화를 좋아한다. 소소하더라도 새롭고 재밌는 이야기들이 좋은데, 내 취향이 그쪽인 것 같다. 또 언급한 것처럼 감독님이 보여준 전작과 시나리오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뷰티풀 데이즈>를 선택하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

-내게 어울리는 것, 내가 잘할 수 있는 것, 내가 하고 싶은 것 중 <뷰티풀 데이즈>는 어떤 작품이었나.

=나한테 어울리는 것! 딱 어울리는 것 같은데? (웃음)

-그렇다면 주위에서의 반응은.

=‘쟤는 왜 또 저런 선택을….’ (웃음) 걱정을 많이 하더라. 무거울 수 있는 작품이고, 엄마 캐릭터가 되는 과정 자체가 결코 만만치 않으니까. 나도 잘 안다. 겉으로 보이는 것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으로 엄마의 감정을 머금고 가야 했다. 그 감정을 온몸으로 받아내야 했고, 눈빛 하나에도 그 감정이 묻어나야 했다. 그래서 주변에선 이 힘든 작업에 대한 걱정을 했던 것 같다.

-이전에 엄마 역할을 해본 적이 없고 도회적인 이미지도 강해서 영화를 보기 전까지는 다 큰 아들을 둔 탈북 여성 캐릭터와 배우 이나영의 이미지가 쉽게 매칭되지 않았다.

=작품을 선택할 때 ‘이 이미지가 나와 잘 맞을까’ 그런 생각은 하지 않는다. 이야기와 캐릭터에 설득됐다면 그 캐릭터가 되려고 노력할 뿐이다. 만약 관객이 캐릭터에 몰입이 안 됐다면 그건 내 연기의 탓이지 내 이미지 때문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미지에 대한 고려를 하지 않기 때문에 좀더 과감하게 선택하는 걸 수도 있겠다.

=그럴 수도 있는데, 사실 과감한 선택이라는 생각도 하지 않는다. 남들이 보기엔 도회적인 이미지니 뭐니 하면서 왜 갑자기 변신하려 그러나 싶겠지만 나는 늘 이런 작품을 하고 싶었다. 의외로 식성과 취향도 아저씨스럽다. 스테이크 먹으면 라면 하나 먹어야 하고. (웃음)

-<뷰티풀 데이즈>에선 연기적으로도 도전할 게 많았다. 예를 들면 북한말이라든지.

=작품에서 사투리 연기를 처음 해본다. 일종의 언어 하나를 새롭게 숙지해야 하는 셈이라, 촬영 전에 언어를 익히는 것도 중요한 과제 중 하나였다. 북한말과 중국말의 경우 언어를 지도해주는 선생님이 따로 계셔서 열심히 배웠다. 억양의 디테일을 잡는 게 어려워서 귀찮을 정도로 계속 선생님한테 물어봤다. 사투리 연기에 대한 걱정이 많았는데 하고 나니 뿌듯하더라.

-의상과 헤어 등 엄마 캐릭터가 보여주는 룩도 흥미로웠다.

=시장에서 직접 의상도 고르고, 옷을 많이 입어봤다. 의상에 대해선 얘기를 많이 하는 편이다. 공간과 상황에 맞는 옷을 입는 게 중요하고, 옷을 입었을 때의 느낌도 연기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엄마의 룩을 표현하는 과정은 의외로 만만치 않았다. 탈북 여성, 시골 여성처럼 보이게 애썼다는 느낌을 주고 싶지 않았다. 영화에서 옷을 많이 갈아입지 않기 때문에 하나의 의상을 고를 때 신중하게 골랐다. 10대의 과거, 20대의 과거 그리고 30대의 현재를 표현하는 과정에선 특히 현재의 의상이 어렵더라. 술집을 운영하는 30대 여성의 모습을 어떻게 전형적이지 않게 잘 살릴 수 있을까 고민을 많이 했다. 먼저 머리를 빨갛게 염색했다. 사람들이 쉽게 하지 않을 것 같은 빨강으로. (웃음) 의상이나 소품에 붉은 계열이 들어가면 좋겠다는 의견이 있어서 빨간 가죽 코트도 계속 입었다. 어떤 건 너무 과하고, 어떤 건 너무 수수하고, 어떤 건 너무 딱이고, 그런데 너무 딱이어도 재미가 없고. 티는 많이 안 나겠지만 의상에 신경을 많이 썼다. 엄마의 10대 시절을 연기할 땐 10대의 얼굴이 되는 게 어려웠고, (웃음) 30대는 방금 말한 이유들로 어려웠고, 20대 시절을 연기할 때가 제일 재밌고 편했던 것 같다. 나이 많은 조선족 남자와 결혼해서 시골에서 애 키우며 생활하는 20대 땐 편한 추리닝 차림이어도 괜찮으니까. 옷이 편하니까 괜히 마음도 편해지더라.

-아들로 출연하는 신인 장동윤, 남편 역의 오광록 등 상대 남자배우들과의 작업은 어땠나.

=장동윤씨는 준비를 정말 많이 해왔고 또 열심히 했다. 영화에서 아들과 엄마는 항상 감정이 꽉 찬 채로 붙는데, 감정 신을 잘 소화한 것은 물론이고 중국어와 연변어도 완벽하게 준비해왔다. 오광록 선배와는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2006) 때 뵀는데, 그땐 같이 연기하는 신이 없었다. 재밌는 일화가, 그때 선배님이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끝나고 가진 인터뷰에서 다음엔 저와 멜로를 하고 싶다고 하셨다. 그런데 이번에 그 말이 현실이 됐다. “선배님, 저희 진짜 멜로로 만났어요!” “그래, 그때 내가 그랬지.” “네, 부부로 만났어요.” (웃음)

-장동윤 배우와 모자지간으로 보일 것인가 하는 걱정은 안 했나. 성인 배우를 아들로 생각하고 연기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워낙 어렸을 때 낳은 자식이고, 어린 아들과 헤어져 10년이 넘게 떨어져 지내다가 다시 만나는 상황이라 어차피 영화에서도 엄마가 느끼는 이질감이라는 게 있다. 엄마와 아들의 사이가 끈끈한 게 아니라, “어, 왔니? 밥 먹자. 너 된장찌개 좋아했잖아”, 그렇게 담담하게 아들을 대하는 거라 상황에 충분히 몰입할 수 있었다. 아들과 한 침대에 누워서 자장가를 불러줄 땐 미안함과 애틋함이란 단어로는 설명이 안 되는 복잡한 감정이 들어서 첫 테이크 때 많이 울었다. 조명이 어두워서 티는 안 났는데 꽤 눈물이 났다.

-<뷰티풀 데이즈>에 노 개런티로 출연했다.

=저예산영화고, 찍어야 할 장면은 많고, 심지어 중국 장면도 있는데 이걸 어떻게 소화할 수 있을까 싶었다. 영화가 잘 완성되는 게 중요한 거지, 이런 경우 개런티를 받고 안 받고의 문제는 중요하지 않았다. 이렇게 이슈가 되는 것도 창피하다. (웃음)

-이렇게 저예산영화와 예술영화에 대한 애정을 피력하는데, 혹 독립영화 및 예술영화에 대한 투자나 수입엔 관심 없나.

=없다. (웃음) 일단 그쪽을 잘 모른다. 영화를 보면 마음이 채워지고 그래서 영화 보는 걸 정말 좋아한다. 하지만 영화를 봐도 배우가 먼저 보이고, 좋은 배우들의 연기에 감동받는다. 좋은 캐릭터를 계속 연기하고 싶은 마음뿐이다. 다른 일은 내가 잘할 수도 없고 내 일이 아니란 생각이 든다.

-배우 원빈과 가정을 꾸렸다. 결혼 전후 달라진 게 있다면.

=좀더 삶이 안정된 것 같다. 심적으로도 안정이 많이 되고, 여러모로 좋은 점이 많다. (웃음)

-원빈 배우와는 작품 얘기를 많이 나누는 편인가.

=평소 작품 얘기도 많이 나누고 시나리오도 같이 잘 본다. <뷰티풀 데이즈> 땐 아무래도 캐릭터의 감정이 쉽지 않을 테니 고생하겠다, 좀 어렵겠는데, 그러면서 격려해주더라.

-앞으로는 작품을 통해 더 자주 만날 수 있는 건지.

=쉬려고 쉰 게 아닌데 본의 아니게 오래 쉬어버려서 죄송한 마음이다. <뷰티풀 데이즈>처럼 정말 욕심나는 이야기가 있으면 언제든 작품에 들어갈 준비는 되어 있다. 항상 마음가짐은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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