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키, 소니, 닥터 드레 등의 광고로 이름을 알린 조나단, 조쉬 베이커 형제. 그들의 영화 데뷔작 <킨: 더 비기닝>이 10월11일 개봉했다. 우선 CF 감독 출신답게 네온 조명을 활용한 프로덕션 디자인이 눈에 띈다. 거기에 로봇, 첨단 무기 등을 위해 마블의 시각효과팀이 가세했다 하니 비주얼만큼은 걱정 없겠다. 그렇다면 베이커 형제 이전 화려한 비주얼과 기발한 아이디어로 광고계에서 먼저 주목받던 감독들은 누가 있을까. 할리우드부터 국내까지, CF 감독에서 영화감독으로 변모한 이들을 알아봤다.
리들리 스콧
CF 감독들이 영화계로 진출하는 초석을 닦은 리들리, 토니 스콧 형제. 형인 리들리 스콧은 영화감독으로 데뷔하기 전 맥주회사 기네스의 광고 등을 연출했다. 이후 영화 데뷔작인 <결투자들>로 칸영화제 황금카메라상을 수상했지만 그를 본격적으로 스타덤에 올려준 것은 1984년 제작한 애플의 맥킨토시 컴퓨터 광고다.
광고는 맥킨토시 발매가 1984년이라는 점에서 착안해, 조지 오웰의 디스토피아 소설 <1984>를 패러디했다. 인류를 통제하는 빅브라더를 부순 여전사를 맥킨토시에 비유했다. 디스토피아 스토리를 접목시킨 광고는 슈퍼볼(미식축구 결승전)에서 단 한 번 방영만으로 칸광고제 그랑프리 등 여러 광고상을 수상하며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대표작 <에이리언> 시리즈에도 맥킨토시 광고의 요소를 찾아볼 수 있다. 여전사 리들리(시고니 위버)가 에일리언을 상대로 극을 이끌어가며, 프리퀄 <프로메테우스>에 등장하는 엔지니어 조각상은 광고 속 빅브라더를 연상케 한다.
토니 스콧
맥킨토시가 리들리 스콧을 스타덤에 올린 광고라면, 토니 스콧은 자동차 회사 사브(SAAB)의 900 터보 광고 ‘낫싱 온 어스 컴스 클로스’(Nothing On Earth Comes Close)로 주목받는다. 그의 취향이 듬뿍 묻어난 광고는 자동차를 전투기에 비유, “지구상 어떤 것도 따라올 수 없다”는 도발적인 슬로건을 내걸었다.
마초적인 감성의 광고는 스타 제작자로서의 초석을 다지고 있던 제리 브룩하이머의 눈에 띈다. 그는 토니 스콧에게 <탑건>의 연출을 제안, 토니 스콧은 이를 받아들인다. 그렇게 제작된 <탑건>은 실제 전투기를 이용한 액션 장면 등으로 큰 호평을 받으며 흥행에 성공했다. <탑건>의 계기가 된 자동차 광고 이외에도 토니 스콧 감독은 안소니 홉킨스가 등장하는 은행 회사 바클레이즈(Barclays)의 광고 등을 연출하기도 했다.
데이빗 핀처
반전, 스릴러 장인답게 데이빗 핀처 감독은 CF 감독 시절부터 기발한 아이디어를 뽐냈다. 그 대표적인 예는 1985년 미국 암 협회의 공익 광고다. 30초가 채 안 되는 광고는 손가락을 빨던 태아가 담배를 피우는 것으로 끝이 난다. 자신의 팔보다 큰 담배를 물고 연기를 뱉는 태아의 모습은 많은 이들에게 충격을 선사했다. 이외에도 그는 액션을 접목시킨 코카 콜라 광고, 오페라를 접목시킨 나이키 광고 등 색다른 조합의 광고들을 배출했다.
데이빗 핀처는 광고를 넘어 뮤직비디오, 영화까지 영역을 넓혔다. 1990년 발매된 마돈나의 '보그'(Vogue) 뮤직비디오도 그가 연출한 것이다. 그는 <에이리언 3>(1992) 감독으로 발탁되며 영화 데뷔를 하고, <세븐>, <파이트 클럽>, <패닉 룸> 등 관객을 쥐락펴락하는 영화로 명성을 쌓았다.
마이클 베이
<트랜스포머> 시리즈의 마이클 베이 감독도 CF 감독 출신이다. 펑펑 터지는 폭파 액션 빼면 시체인 마이클 베이지만, 그가 처음 이름을 알린 광고는 참신한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했다. 우유 권장 캠페인 ‘갓 밀크?’(Got Milk?)의 광고에서 그는 빵에 목이 막히는 일상적인 상황을 던지며, 마지막 ‘Got Milk?’라는 문구를 보여주며 우유를 권장하는 메시지를 전한다. 단순하지만 강한 임팩트를 남겼다.
광고계에서 명성을 쌓은 그는 토니 스콧과 마찬가지로 마이클 베이는 제리 브룩하이머의 눈에 띄며, <나쁜 녀석들> 시리즈의 메가폰을 잡는다. 이후 <아마겟돈>, <트랜스포머>로 대성공을 거두며 할리우드 흥행 감독으로 자리 잡는다. 그는 영화를 제작하면서도 종종 광고를 연출했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유명 속옷 회사 빅토리아 시크릿의 광고. 마이클 베이의 빅토리아 시크릿 광고는 스포츠카와 헬기를 동원, 록 음악과 폭발신까지 활용해 마치 액션영화의 한 장면 같은 광고를 제작했다.
잭 스나이더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 <저스티스 리그> 등으로 혹평을 듣고 있는 잭 스나이더 감독이지만, 그는 비주얼만큼은 놀라운 실력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 그의 비주얼도 CF 감독으로서의 경험이 바탕이 된 것이다. 잭 스나이더는 1990년대부터 자동차 광고를 연출하며 CF 감독으로서의 입지를 다졌다. 지프(Jeep), BMW, 아우디 등 유명 자동차 회사의 광고를 제작했으며 그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슬로우 모션을 이용해 속도감 혹은 스포티한 이미지를 강조했다.
맥주회사 버드와이저의 911 테러 추모 광고, ‘리스펙트’(Respect)로 주목받기도 했다. 테러를 당했던 뉴욕시를 향해 경례하는 말들을 등장시킨 광고. 잔잔한 O.S.T.와 함께 예를 표하는 말들의 모습을 느리게 담은 광고는 단 한 번의 슈퍼볼 방영만으로 많은 화제가 됐다.
미셸 공드리
<이터널 선샤인>의 미셸 공드리도 영화 데뷔 전, CF 감독으로 활동했다. 그는 CF보다 뮤직비디오 감독으로 먼저 활동했지만 그의 독특한 연출기법은 광고에서도 빛난다. 그는 <매트릭스>에 등장해 유명해진 일명 ‘불릿 타임’(여러 대의 초고속 카메라로 촬영해 인물을 허공에 멈춰놓은 듯 보이게 하는 기법)을 처음 사용한 인물이기도 하다. 1997년 연출한 보드카 회사 스미노프의 광고 ‘어드벤쳐’(Adventure>에서도 이러한 기법이 사용됐다.
또한 이 광고에 등장한 공드리 특유의 편집 기법도 눈에 띈다. ‘모험’이라는 제목에 걸맞게 한 쌍의 남녀가 빌딩, 바다, 기차 등 여러 공간을 오가며 탈출하는 상황을 그렸다. 공드리는 인물들이 병에 굴곡지게 투과되는 모습을 이용해 자연스레 다른 공간으로 화면을 전환시켰다. 또한 달라진 두 공간 속 사물의 재질, 모양, 색 등 공통점을 이용해 두 장소를 연결했다.
이러한 기법은 그의 대표작 <이터널 선샤인>에도 그대로 드러난다. 주인공 조엘(짐 캐리)의 꿈속을 배경으로 한 영화는 여러 공간이 순간이동하듯 전환된다. 이때 공드리는 침대, 조명 등을 이용해 자연스러우면서도 독특한 편집 스타일을 다시 보여줬다.
나카시마 테츠야
일본에도 화려한 비주얼로 각광받는 이가 있다.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갈증> 등을 연출한 나카시마 테츠야 감독이다. 그는 무려 400편이 넘는 CF와 뮤직비디오 등을 연출하며 광고업계의 거장 감독이 된다. ‘카멜레온’이라는 별칭답게 그는 광고에서도 국한되지 않은 여러 스타일을 선보였다. 일본의 JR 동일본 열차 광고에서는 뮤지컬 요소를 섞어내기도 했으며, 슬로우 모션을 중심으로 한 삿포로 맥주 광고 등을 제작했다.
일본의 유명 아이돌 SMAP의 멤버 카토리 싱고를 주인공으로 특별 단편 ‘롤링 봄버 스페셜’(Rolling Bomber Special)을 제작하기도 했는데, 이 영상은 코믹한 설정과 원색을 강조한 색채 등으로 화제가 됐다. 반대로 고마츠 나나가 출연한 영상 스트리밍 앱 ‘비 TV’(Bee TV)의 광고에서는 비 내리는 정류장을 배경으로 채도를 빼서 감성적인 분위기를 선보이기도 했다. 이런 그의 변화는 영화에서도 그대로 나타나는데,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는 원색을 강조한 강렬한 이미지를 중심으로 한 반면 <고백>, <갈증>에서는 백색, 청색 중심으로 뿌연 색감을 연출, 스타일의 변화를 보여줬다.
박광현
해외만큼 화려한 필모그래피를 자랑하는 감독들은 없지만, 국내에도 CF 감독 출신의 영화감독들이 있다. 가장 잘 알려진 이는 <웰컴 투 동막골>, <조작된 도시> 등을 연출한 박광현 감독. 미대 출신답게 화려한 색감, 기법 등을 이용할 것 같지만 그의 CF는 아이디어와 스토리를 중심으로 했다.
대표적인 광고가 육아, 패션 등의 고민을 털어놓는 여성 포털 사이트 마이클럽 닷컴의 광고 ‘선영아 사랑해’다. 상표명을 한 번도 노출하지 않은 광고는 궁금증을 유발하며 유행어처럼 번지기도 했다. 또한 신하균이 출연한 맥도날드 광고 ‘버스 안에서’, 최민식이 출연한 교보생명의 광고 ‘마음에 힘이 되는 시 하나 노래 하나’로 코믹한 상황과 잔잔한 감동을 보여주기도 했다.
이외 국내의 CF 감독 출신 영화감독으로는 <고사: 피의 중간고사>, <계춘할망> 등의 창감독과 <뷰티 인사이드>를 연출한 백종열 감독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