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영화]
김나희 음악평론가의 <아무르> 왜 사랑하는가?
2018-10-23
글 : 김나희 (클래식음악평론가)

감독 미하엘 하네케 / 출연 장 루이 트랭티냥, 에마뉘엘 리바, 이자벨 위페르 / 제작연도 2012년

지난해 다리우스 콘지 감독과의 인터뷰 도중이었다. 만 3살에 운명처럼 영화와 사랑에 빠져버린 이야기에 이어, 무성영화 시대의 걸작부터 천천히 접할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가 이어졌다. 제7의 예술을 열렬히 경배하는 예술가의 진심 어린 목소리에 존경심이 들었다. 그날 밤, <아무르>를 다시 보았다. 그가 촬영감독으로서 잡아낸 눈부신 빛과 깊은 어둠을 따라가다보니 마지막에는 불을 삼킨 듯, 가슴이 뜨거워졌다. 슈베르트의 음악 속에 존재하는 천국과 지옥처럼 강렬한 대비가 영화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푸른 빛깔과 관조하는 듯한 카메라, 차가운 질감의 영상언어 너머의 불같은 에너지… <아무르>는 <하얀 리본>에 이은 미하엘 하네케의 또 다른 걸작이다.

2012년 <아무르>를 파리의 한 영화관에서 보았을 때, 주변에서 구급차를 불러주겠다고 걱정할 만큼 오래 눈물을 쏟았다. 슈베르트의 즉흥곡 3번 때문이었다. 피아노에서 법학으로 전공을 바꿨지만, 여전히 피아노 앞에 앉아 있는 시간이 부족하면 불안해지면서 죄책감을 갖던 시기가 꽤 오래갔다. 여러 사람들을 만나고 있다가도 갑자기 모든 것이 무의미해졌고, 얼른 혼자가 되어 내 피아노 앞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피아노와 함께 있는 시간만이 의미 있고 가치 있는 무엇일 뿐, 누구를 만나도 공허하고 무의미했다. 평생을 피아니스트로 살던 주인공 안느(에마뉘엘 리바)가 갑작스럽게 찾아온 병마로 몸을 자유롭게 움직이지 못하게 되는 순간부터 까마득해졌다. 더이상 피아노를 칠 수 없게 된다는 건 피아니스트에게 얼마쯤은 죽는 일과도 같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매일 꾹꾹 눌러담았던 좌절감이 치밀어오르며 쉴 새 없이 눈물이 솟아났다. 제자 알렉상드르가 찾아왔을 때, 안느는 베토벤의 바가텔과 슈베르트의 즉흥곡을 쳐달라고 부탁한다. 더 어렵고 화려한 곡이 아닌, 피아노를 배우며 일찌감치 접하는 레퍼토리들을 부탁하는 그 마음 역시 헤아려졌다. 슈베르트의 잔잔하고 여린 아르페지오 사이에 배어 있는 빛과 어둠의 대비가 날카로운 칼이 되어 내 급소를 찌르고 지나갔다. 사정을 늦게 알게 된 딸 에바(이자벨 위페르)가 “괜찮지 않다”고 하는 장면이 되기 전부터 나는 전혀 괜찮지 않았다. 영화가 끝나고 한참을 바닥에 누워 있다가 극장 시큐리티팀의 도움을 받아 설탕물을 마시고 나서야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그다음날, 슈베르트 즉흥곡의 악보를 두고 피아노 앞에 앉았다. 아주 어릴 때 쳤던 곡인데, 손이 얼마쯤 기억을 하고 있었다. 내 몸이 마비된 것도, 인생이 끝나버린 것도 아니었다. 감독에 의해 완성된 세계를 체험하는 경험이 우리의 내면을 울리고, 세계와 맞닿아 공명하며 삶에 변화를 일으킨다. 그건 오로지 영화만이 가능한 지점이다. 그때 <아무르>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나는 피아노를 치는 만큼 내게 의미있고 가치 있는 무언가를 찾으려고 애쓰지 않았을 것이다. 알랭 바디우를 만나, 철학이란 ‘왜 사랑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라는, ‘네가 왜 그토록 음악에 사로잡혔는지 그걸 찾아가는 것이 곧 철학을 하는 것’이라는 따뜻한 격려를 듣지 못했을 것이다. 동경하던 음악가와 예술가들을 만나 인터뷰를 하는 일도, <씨네21>에 글을 쓰거나 책을 출간하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영화가 모든 인류를 구원할 수는 없다. 다만 누군가의 내면 깊숙이 들어가 잊을 수 없는 강렬한 체험으로 남는다. 그 체험을 기대하며, 설레는 마음으로 존경하는 감독들의 차기작을 기다린다.

김나희 음악평론가. 파리에서 피아노와 법학을 공부했다. 알랭 바디우, 미셸 슈나이더, 마레크 야노프스키, 정명훈, 백건우, 박찬욱, 조성진 등 26인의 예술가와의 인터뷰집 <예술이라는 은하에서>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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