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암수살인> 의도를 뛰어넘은 결과물
2018-10-24
글 : 송경원
행운의 플래시백

운이 좋았다. <암수살인>(2017)을 보는 내내 그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이 영화는 수없이 ‘만약에’를 되돌아보며 우직하게 제 갈 길만 가는 영화다. 그게 간혹 촌스러울 때도 있고 단단하고 기본에 충실한 연출처럼 다가오기도 한다. 하지만 중요한 순간 서사의 향방을 결정하는 건 결국 운, 그러니까 우연이다. 당연히 서사적으로는 밋밋한 흐름이라고 해도 크게 할 말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느껴지지 않는 건 이 영화가 사건이 아니라 인물을 따라가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밝혀지지 않은 사건 그 자체보다는 인물의 기억, 상상, 가지 않은 길에 대한 가능성을 재연한다고 해도 좋겠다.

송경수 형사가 가지 못했던 미래

형사 형민(김윤석)이 뒤늦게 사진 속에서 여성용 피임기구 루프를 발견한 건 집요한 수사와 끊임없는 의심이 얻은 결실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한편으로 뜬금없이 던져진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암수살인>의 고지식한 내러티브는 퍼즐조각 같은 단서를 뿌려놓고 이를 연결시키는 현란한 두뇌게임과는 거리가 멀다. 형민은 증거를 원하지만 증거를 따라가는 사람은 아니다. 형민이 태오(주지훈)의 거짓말을 파헤치고 진실에 도달할 수 있었던 건 애초에 태오가 연쇄살인범이라는 내적 확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건 결과를 이미 정해놓고 거기에 다다르는 과정을 뚜벅뚜벅 따라가는 영화다. 다른 형사가 그 길을 가지 못하는 건 확신이 모자라거나 구태여 손해를 감수할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형민은 다소 유리한 위치에서 출발한다. 아내와 사별하여 가족 부양의 책임에서 자유롭고 부유한 형제 덕분에 재산도 비교적 여유롭다. 형사영화의 클리셰를 벗어난 신선한 캐릭터다. 동시에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고 하지만 장르적 내러티브 안에서는 매우 비현실적인 인물이다. ‘형사의 소명’이라는 영화의 목표지점을 위해 정확히 설계되었다고 해도 될 만큼 이상적인 포지션이기 때문이다.

범인은 각본을 쓴다. 형사과장은 형민에게 유령 같은 사건을 좇다가 패가망신한 형사를 여럿 봤다며 경고한다. 형민은 태오에게 한차례 농락당한 뒤, 형사과장이 언급한 퇴직경찰 송경수(주진모)를 찾아간다. 송경수는 모두가 예상하는 형민의 미래이자 암수살인 사건에 뛰어든 또 다른 형사들의 현재다. <암수살인>에는 정확히 지시된 진실이 두번 등장한다. 한번은 송경수 전 형사의 입으로, 다른 한번은 태오의 진술을 통해서다. 태오는 감방에 살기 싫다면서 왜 자백을 하냐는 형민의 물음에 “그라이까. 감방에 살기 싫으니까”라고 답한다. 이 말은 진실이다. 송경수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과거 사건의 불입증을 통해 현재 사건까지 무죄판결을 이끌어내려는 태오의 계획을 알려준다. 이것도 진실이다. 정리하자면 이 영화는 범인이 잡힌 시점부터 시작될 뿐 아니라 모든 밑그림과 설계도까지 다 까놓고 시작하는 셈이다.

하지만 형사는 각본을 따라가지 않는다. 대신 자신이 정해둔 결과, 즉 태오가 범인이라는 걸 증명하기 위한 증거를 부지런히 모을 뿐이다. 형민이 태오를 범인이라고 확신한 근거는 딱 한번 나온다. “사람 잘라본 놈 맞다. 안 그라믄 그래 구체적으로 진술 몬해.” 형민은 경험과 감에 의지해서 태오가 살인을 저질렀다고 믿는다. 그게 전부다. 형민에겐 충분할지 몰라도 관객을 설득하기엔 부족하니 영화는 여기에 동력을 하나 더 부여한다. 태오가 살해한 것으로 추측되는 실종자 지희의 할머니와 형민을 만나게 하여 억울한 사람이 없도록 해야 한다는 대의명분을 새삼 눈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최소한의 동기, 최소한의 확신, 최소한의 대의명분. 특별한 영화적 형식으로 메시지를 포장하지도 않고, 별다른 극적 고양을 시도하지도 않는 이 고지식한 영화가 이런 허술한 내러티브에도 끝까지 관객을 빨아들이는 힘을 얻는 건 대략 두 가지 반칙 때문인 것 같다. 하나는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는 명분, 다른 하나는 이 영화의 유일한 형식적 트릭인 플래시백이다.

<암수살인>은 스릴러, 서스펜스의 장르적 관습과 트릭을 소비하는 영화가 아니다. 그렇다고 데이비드 핀처의 <조디악>(2007)처럼 시대의 어지러움을 투영하고 인간 내면의 어둠을 깊게 파고드는 영화도 아니다. 실패한 수많은 송경수들을 딛고, 그럼에도 여전히 형사의 소임을 다하고 있는 예비 송경수들에게 바라는 일종의 판타지에 가깝다. 실제 암수살인 사건을 해결했다는 실화는 사건의 리얼리티를 구축하는 데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건이 해결되는 건 데우스 엑스 마키나 같은 운에 의존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영화 역시 아무런 복선 없는 사건 해결로 이를 거듭 시인하고 만다. 증거가 거의 없는 암수살인은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언젠간 해결할 수도 있는 일종의 확률게임이다. 그래서 형민이 포기하지 않고 매달리는 게 중요하다. 반대로 말하자면 확률적으로 무수한 실패를 전제로 한다. 결국 <암수살인>이 제공하는 건 비현실적이고 이상적인 캐릭터 형민을 통한 일종의 대리만족이다. 이 영화의 리얼리티는 사실상 몰락한 형사 송경수에서 끝을 맺는다. 확률적으로 볼 때 송경수야말로 암수살인 사건의 현실이며 끝내 태오를 사회로부터 격리시킨 형민은 아주 희소한 확률로 존재하는, 형사라는 직업에 대해 우리가 바라는 이상향인 셈이다.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는 점은 이 영화의 리얼리티의 근거가 되기보다는 차라리 이상적인 목표지점을 향한 의지를 강화시키는 근거로 작동한다. 아주 희박하게 저런 경우도 있으니 포기해선 안 된다는 격려라고 할까. 나는 송경수와 형민의 관계가 이 영화가 플래시백을 활용하는 방식과 닮았다고 생각한다.

재연과 재현과 체현의 온도 차

영화의 또 다른 반칙, 플래시백은 교과서처럼 딱딱한 이 영화에 긴장감과 찰기를 유지시키는 거의 유일한 수단이다. 심심하고 이상적인 캐릭터를 정직하게 뚜벅뚜벅 따라가는 연출은 사실 그다지 분석할 것도 없을 만큼 평이하다. 그나마 태오의 증언을 기점으로 진행되는 사건의 재연, 플래시백이 트릭 역할을 하며 관객의 착각을 유도하는 것으로 긴장을 유지해나간다. 기본적으로 플래시백은 과거의 재연이다. 말로 푸는 대신 이미지로 보여주는 순간 관객은 화면의 리얼리티를 따라가기 마련이다. 그것이 플래시백의 첫 번째 목적이다. 태오가 떠벌리는 2건의 살인이 플래시백으로 삽입되면 당연히 그 사건은 과거의 재연이라고 인식된다. <암수살인>은 여기에 트릭을 건다. 후반부에 실은 그것이 있었던 일이 아니라 태오의 거짓말, 또는 형민이 증언을 듣고 그려본 상상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드러나며 재연과 환영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것이다. 나는 이 플래시백이 효과적이라고 느꼈다. 단순히 과거를 재연하는 걸 넘어 플래시백으로 제시된 영상이 인물의 심리를 반영하는 형식적 단초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플래시백이 재연이고 어떤 플래시백이 환상인지를 나누는 과정이 영화의 핵심 동력으로 작동할 수도 있다.

처음엔 이러한 연출방식의 효용을 분석하며 이 글을 전개해 나가려 했다. 하지만 <암수살인>이 유족의 동의를 받지 않고 실제 사건의 일부를 묘사했다는 소송이 제기되면서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영화 속 세 번째 플래시백, 2012년 부평동 노상 살인사건은 실은 태오의 거짓말로 꾸며낸 상상이다. 그런데 영화는 그 레퍼런스를 실제 사건에서 빌려와 재현해버렸다. 즉 환상을 그리면서 실화를 기반으로 하는 기묘한 짓을 저질렀다. 물론 단순하게는 상황의 리얼리티를 위해 취재과정에서 얻은 소스를 반영했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환상과 실제, 재연과 상상의 경계를 무너트리는 방식으로 플래시백을 활용한 이 영화에서는 매우 심각한 분열을 야기한다.

플래시백은 기본적으로 과거의 ‘재연’이다. 내러티브 중간 시제를 돌려버리는 이 형식은 일차적으로는 설명의 일환이다. 하지만 시제를 빈번하게 뒤섞고, 여기에 종종 환상과 비전까지 삽입시키면 전혀 다른 형식으로 변모한다.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즐겨 사용하는 플래시백이 그에 해당한다. 가령 <설리: 허드슨강의 기적>(2006, 이하 <설리>)에서 이스트우드는 5번의 플래시백을 사용하는데 악몽과 환영에 시달리는 설리의 모습을 함께 제시한다. 덕분에 <설리>에서의 플래시백은 누구의 시점으로 재연되었는지, 언제 삽입되는지가 매우 중요하게 작동한다. 어떤 플래시백이 설리의 기억이고 어떤 플래시백이 객관적인 사실인지 구분하는 와중에 유령처럼 부유하는 인물의 감정(불안과 부담감)이 관객에게 전달되기 때문이다.

플래시백을 어떻게 묘사하는지도 중요하다. <설리>의 플래시백은 환상, 현실과 구분되지 않고 똑같은 톤으로 제시된다. 반면 <암수살인>에서는 플래시백으로 착각되었던 상상 장면들이 왜곡이 심한 애너모픽렌즈를 활용하여 “컬러풀하고 몽환적인 느낌”(<씨네21> 1175호 기획 ‘황기석 촬영감독의 <암수살인> 포토 코멘터리’)으로 묘사된다. 상상은 왜곡된 이미지로, 실제는 건조하게 묘사하는 도식적인 구분이다. 이를 정반대로 활용한 영화도 있다. 린 램지 감독의 <너는 여기에 없었다>(2017)에서는 플래시백의 과거를 선명하게, 현재를 건조하고 불투명하게 촬영하여 과거의 상흔과 환상 속에 갇혀 살아가는 인물을 표현했다. <암수살인>에서 플래시백의 촬영에 차이를 둔 건 상상(일지도 모르는 재현)과 현실을 구분하기 위한 직관적인 수단이다. 하지만 <암수살인>은 태오의 거짓이나 형민의 상상을 재현할 때, 실제 일어난 사건을 재연할 때 촬영 방식에 차이를 두지 않고 뒤섞는다. 이건 애초 의도했던 상상과 재연을 뒤섞는 트릭의 효과로 작동하긴 하지만 인물의 심리를 입체적으로 형상화하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정확히는 영화가 이를 구분하지 못하거나 구분할 생각이 없는 것 같다. 본래 플래시백은 응당 시점이 주인이 제시되어야 한다. 누구의 플래시백인지, 누구의 기억인지의 문제는 중요하다. 단순히 과거를 재연할 때는 신의 시점일 것이고, 특정인의 시점으로 한정시켜 기억의 왜곡과 인물의 혼란을 묘사할 수도 있다. 일견 흥미로운 플래시백의 활용처럼 보였던 <암수살인>은 이 차이를 구분해내지 못하면서 급격히 편편해진다. 그랬어야 한다.

하지만 <암수살인>의 돌파구는 의외의 지점에서 열린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했지만 사실 판타지적인 비전을 제시하는 영화에 가깝다. 태오와 형민 역시 캐릭터의 변화를 거의 보이지 않고 직진하는 인물이다. 굳이 비교하자면 이 영화는 <조디악>보다는 <설리>와 닮았다. <설리>가 자신의 일터에서 일을 제대로 수행하는 평범한 영웅을 그렸다면 <암수살인> 역시 변하지 않는 인물을 통해 그 소명의식을 부각시킨다. <설리>는 설리의 꿈과 환상, 기억을 묘사할 때 굳이 톤을 구분하진 않으며 설리의 우울과 시대의 불안을 그려나간다. <암수살인>은 현실과 플래시백은 구분하는 반면 플래시백의 영역에서는 상상의 재현과 사실의 재연을 구분하지 않음으로써 심리적 시제를 공유한다. 그 결과 과거의 재연과 상상의 재현, 시대의 체현 사이에서 발생하는, 혹은 발생해야 마땅한 거리감을 관객 스스로 찾아내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밋밋할 수밖에 없는 서사와 연출, 변화하지 않는 캐릭터가 의외의 입체성을 띠는 건 바로 이 순간이다. 이건 의도하지 않는 효과처럼 보이는데 장르적 트릭과는 또 다른 결로 관객을 ‘범인을 잡아야 한다’는 명제에 동참시킨다. <암수살인>은 무수히 존재했을 송경수 형사가 가보지 못했던 길을 대신 상상해주는 환상의 플래시백 같은 영화다. 물론 굳이 사용하지 않아도 상관없을 실제 사건을 그저 리얼리티의 재료로 소비하는 등 패착도 범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이 안일한 접근이 도리어 본래 의도보다 훨씬 입체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통로를 열어준 게 아닌가 싶다. 새삼, 운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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