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너는 여기에 없었다> 호아킨 피닉스가 그곳에 있다
2018-10-25
글 : 홍은미 (영화평론가)
육체의 언어

<너는 여기에 없었다>(2017)와 관련된 흥미로운 반응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제목이 다소 난해함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이 그 의미에 관하여 각자의 해석을 즉각 내어놓는다는 사실이고, 다른 하나는 칸국제영화제에서 각본상을 수상한 것에 대해 의아해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수상 경력에 거는 우리의 통상적인 기대와 달리 이 영화의 서사는 아주 간결하고 한편으론 헐겁다. 소량의 정보만을 제공하고 있어 나머지는 관객의 상상력에 의존한다. 그런데도 불평하는 의견은 의외로 드물다. 비슷한 반응과 자연스러운 수긍은 아마 몇몇 이유에서 연유할 것이다.

몇 가지 정황만으로도 우리는 인물들의 전사를 직조해낼 수 있다. 조(호아킨 피닉스)에게 일어났던 외상적 사건들은 파편적으로 노출되지만 핵심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찰나에 삽입되는 유년 시절의 학대 현장과 전장에서의 죽음은 전체를 조망해볼 필요도 없이 관객의 시선을 파고든다. 생동하는 인물들을 응시하는 중에도 조의 머릿속에는 굳어버린 주검들이 어른거리고, 그의 들숨과 날숨은 신음하는 짐승의 것처럼 날카롭다. 요컨대 집약적인 서사가 참혹한 이미지의 효용성을 극대화하며 자살 충동에 시달리는 조의 트라우마를 이해하는 데 자극을 주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캐릭터의 한계 또한 인지하게 된다. 조의 트라우마는 지극히 상투적이다. 오랜 시간 지속되는 학대와 전쟁터에서 입는 상흔이 한 인간을 처절히 짓이겨놓을 수 있음을, 뒤틀린 폭력성으로 제 위상을 다시 드러낼 수 있음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말하자면 조의 내적 상흔은 불변의 고정점에 박혀 있는 클리셰다. 그와 마찬가지로 아버지에게 학대받은 어머니에게 갖는 연민과 유대감이 이후 니나(예카테리나 삼소노프)에게 전이되는 관계의 도식도 예사롭게 그릴 수 있는 방식이다. 그럼에도 <너는 여기에 없었다>는 진부한 풍경들을 돌파해낸다. 린 램지는 승부사적 기질을 다시 한번 동원해 영화의 헐거운 지점들을 조여 맨다. 장편 데뷔작 <쥐잡이>(1999)부터 <케빈에 대하여>(2011)까지 감독은 사고나 살인으로 인한 누군가의 죽음 이후를 다루는 이야기에 주력했다. 명백한 심리묘사는 배제한 채 살아남은 자들의 육체와 얼굴을 집요하게 포착해왔다. 그렇기에 램지에게 배우는 어떤 요소들보다 중요하다.

지옥이 새겨진 몸

이번 작품에서도 램지가 승부수를 두는 쪽은 단연 야수성을 뿜어내는 호아킨 피닉스의 육체다. 그의 몸은 유심히 지켜보아도 미지의 세계 같다. 앞으로 살짝 굽은 어깨를 조금만 더 웅크려도 기형적으로 뒤틀려 보이는 그의 등은 마치 상처 입은 짐승이 잔뜩 웅크린 채 벌어진 상처를 굳혀버린 것 같은 모습을 연상시킨다. 주변의 생동하는 기운을 모조리 빨아들여 끈끈하게 엉겨붙는 고통의 상태로 만드는 듯한 몸, 우울함과 번뜩이는 야수적 본능이 치열하게 충돌을 일으키고 충동적으로 새어나오는 그런 육체의 소유자가 호아킨 피닉스다. 우리는 여러 작품에서 그 전능한 몸을 목격해왔지만 아직도 그의 한계를 가늠하기 힘들다. 그러니 호아킨 피닉스를 이야기할 때 연기를 잘한다는 말로는 모자랄 것이다. 이 영화가 조의 심리 상태를 세부적으로 다루지 않으면서도 모호함이나 진부함에 함몰되지 않는 이유는 그의 기이한 육체가 질식할 것 같은 지옥도를 관통해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어린 소녀들이 유린당하는 성매매 소굴과 가녀린 소녀 니나가 결국 살인을 저지르게 되는 윌리엄 주지사의 집에서 홀로 안온하게 흐르고 있던 노래 는 그곳의 처참한 광경으로 보자면 너무나 이질적이다. 그렇다고 해서 잔인한 시각적 이미지와 부드러운 선율의 음악을 중첩시키는 방식이 새롭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범죄 스릴러 영화에서 아름다운 음악이 흐르는 사이 범죄 행위가 이뤄지는 현장들을 우리는 적잖이 보아왔다. 어울리지 않는 뉘앙스를 뒤섞어 관객에게 감정적 충격효과를 주려는 시도는 생경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기이한 풍경보다 더 기형적으로 보이는 조의 육체와 그가 내장까지 토해낼 듯 오열하는 모습을 카메라가 집요하게 비추며 공간들을 가로질러 나가면 몸이 저릿해지는 느낌을 피할 수가 없게 된다. 어둠과 우울함과 야수성을 한몸에 지닌 호아킨 피닉스가 스크린 위에 현현하면 그 자체로 필름누아르가 아니고 무엇이겠냐고 말하고 싶은 유혹 또한 피할 길이 없다.

그렇지만 그의 육체를 움직이게 하려면 호명이 필요하다. 자살 충동에 시달리는 조를 깨워낼 수 있는 존재가 있어야 한다. 처음은 조의 어머니다. 그가 입속으로 칼을 집어넣으며 자살 연습을 할 때 그를 불러내는 이는 어머니다. 사실 이 장면을 보지 않더라도 그의 생을 향한 의지는 어머니로부터 비롯된다는 점을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다. 깊게 연민하고 고통을 유대하는 관계, 끈끈한 둘의 관계는 어머니의 죽음으로 인해 끊어진다. 하지만 조는 죽지 않는다. 어머니를 수장하며 함께 생을 마감하려 했던 조에게 니나의 환영이 비치기 때문이다. 이 환영은 소리 없는 호명이며 강력한 명령이다. 사창가에서 니나를 구출해냈지만 더 큰 배후 세력에 의해 그녀를 다시 잃을 때, 조에게 들려왔던 그를 부르는 음성이 시각적으로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시청각적인 호명이 강력해질 수 있었던 다른 장면들을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죽음 가까이에서

조가 사창가를 급습해 처음 니나를 구출해 나오는 장면들엔 흥미로운 면이 있다. 보통이라면 어린 소녀를 악의 소굴에서 구출해 나올 때 강인한 두팔로 안고 나오는데, 조는 니나를 등에 업고 나온다. 조에게 업힌 니나의 두 다리가 흡사 도살당한 가축들의 그것처럼 무방비 상태로 축 늘어져 있고, 조의 기이한 등 위로 니나의 가녀린 등이 겹쳐 있다. 과격한 표현이긴 하지만 이 장면들에서 둘의 모습은 마치 주인을 섬기는 짐승이 상처 입어 몸을 가누지 못하는 주인을 제 등에 태워 나오는 것처럼 보인다. 애초부터 이 영화에서 영웅주의란 있을 수가 없었지만 악의 소굴이라고 여겨지는 곳에서조차 선악의 관념적인 경계보다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삶의 방향으로 나와야 하는 몸부림이 있을 뿐이다.

조는 어떤 사명이 아니라 숙명을 안고 필사적으로 지켜야 하는 존재를 위해 행동할 수밖에 없는 인물이다. 그에게 죽음과 멀어지는 방법은 누군가에게 호명되어 매 순간 삶으로 돌아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어머니의 죽음 이후 그 자리를 채우는 건 니나다. 그런 존재가 자신과 마찬가지로 손에 피를 묻히며 살인을 저지르게 되는 상황을 막지 못했기에 그는 온몸을 떨며 울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오랜시간 지속된 고통과 죄의식으로 나약해진 영혼을 린 램지는 지난한 서사가 아니라 조의 육체로 형상해냈고, 호아킨 피닉스는 본연이 지닌 괴력을 화면 안에 쏟아부으며 육체의 언어를 써내려간다. 그러니 ‘너는 여기에 없었다’가 진정 해석할 수 있는 말이라면 나는 존재가 희미해 보일 정도로 죽음 가까이에서 신음하고 있는 듯한 호아킨 피닉스의 육체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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