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쓰백>이 흥행 역주행을 이어가며 50만 관객을 돌파했다. 올해 초 ‘2018 한국영화 기대작’ 특집으로 <미쓰백> 이지원 감독을 미리 인터뷰하고, 용산CGV아이파크몰과 함께하는 ‘용씨네 PICK’ GV 시사회를 함께한 보람을 느낀다. 올해 초 그 특집 기사에서, 인터뷰를 가진 감독의 영화 중 <미쓰백>만 아직 배급사가 정해지지 않았다고 언급한 것이 나름 도움이 됐다고 하니 그 또한 같은 맥락이다. 하지만 최근 GV 시사회에서 이희준 배우가 연기한 장섭 캐릭터가 어떤 ‘성취’를 이뤘다고 말한 것에 대해 뒤늦게 후회하는 중이다. 사실 그것은 ‘장면의 성취’는 될 수 있을지언정 ‘캐릭터의 성취’라고는 할 수 없는데, 성급하게 그런 표현을 썼던 것에 대해 굳이 변명하자면 다음의 이유가 있다. 바로 상아(한지민)와 장섭의 말다툼 장면 때문이었다. 한국영화 속 남녀의 말다툼은 언제나, 남자가 버럭 소리를 지르거나 무언가를 내던지며 마무리되는 걸 익히 보아왔다. 그 순간 남자가 진짜 옳은지, 정말 억울한지는 딱히 설명되지 않는데 어쨌건 거의 모든 말다툼은 언제나 그렇게 끝났다.
하지만 <미쓰백>의 말다툼 장면만큼은 상아가 장섭보다 더 크게 욕하고 소리 질러 상황을 종료시킨다. 개인적으로 배우 한지민의 불길한 표정과 날선 연기가 한데 어우러진 어마어마한 장면이었다고 생각한다. 결과적으로 그 순간 찍소리 못하는 장섭을 보며, 다른 장면에서 장섭이 보여준 폭력성을 싹 잊어버렸던 것이다. 그보다 더 유의미했던 장면은 따로 있다. 후반부 상아가 한참 시간이 흐른 뒤 장섭과 재회한 장면에서, 그 순간까지 상아가 자신의 얼마간의 부재에 대해 구구절절 남자에게 설명하지 않는다는 점 때문이었다. 그 또한 다른 수많은 한국영화의 경우처럼, 여성 캐릭터들은 ‘도대체 어디서 뭘 하고 다닌 거야?’라는 남자의 의문을 반드시 해소해줘야만 했다(여기에 더해 다른 수많은 한국영화에서 여성 캐릭터들이 역시 꼭 남자들에게 해명해줘야만 했던 ‘누구랑 잤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더 말해봐야 입만 아프다). 그래야 장섭이 계속 상아를 도와주는 동기 부여가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아는 장섭의 선의가 고맙긴 하겠으나 지은(김시아)과 함께한 그들만의 시간에 대해 딱히 설명하지 않는다. 무사히 돌아온 것으로 충분하니까.
그처럼 <미쓰백>이 장면의 성취를 안겨준 영화였다면 추상미 감독의 <폴란드로 간 아이들>은 캐릭터의 성취를 느끼게 해준 영화였다. 사실 우리에게 배우로 더 친숙한 추상미는 감독이자 배우로서 “배우에게 ‘상처’라는 것이 과연 얼마나 도움이 될까”라고 묻는다. 그런데 대부분의 배우라는 사람들은 자기가 겪은 것 이상을 상상하여 연기하는 사람들이다. 살인을 저질러야 살인 연기를 잘하고, 꼭 큰 상처를 겪어야 삶의 고통을 더 극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아니니까. 하지만 대부분의 배우라는 사람들은 겪은 만큼 표현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그런데 작품 속에서 추상미와 함께 폴란드로 떠난 탈북 소녀이자 배우 지망생 이송은 연기로 보듬을 수 있는 상처 그 이상의 상처를 실제로 겪은 사람이다. 북한을 떠나 중국을 거쳐 남한에 정착하기까지 자신이 겪은 상처에 대해 입을 닫자, 추상미는 그녀가 아직 자신에게 마음을 열지 않았다고 느낀다. 그렇게 배우이자 감독이자 엄마인 추상미는 ‘연기’와 ‘연출’에 대해 끝없이 질문한다. 그리하여 두 영화가 장면의 성취와 캐릭터의 성취를 넘어 최종적인 ‘영화의 성취’를 거뒀다고 말할 수 있을지는 독자의 몫으로 남겨둔다. 이번호 <미쓰백>에 대한 김소희 평론가의 영화비평과 <폴란드로 간 아이들> 추상미 감독의 씨네인터뷰를 읽어본다면 그 해답을 찾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