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31일 개봉,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하고 있는 <완벽한 타인>. 베테랑 배우들의 협주가 어우러진 영화는 여러 인물들이 휴대폰을 공유하는 게임을 하며 벌어지는 해프닝을 그렸다. 또한 <완벽한 타인>은 집이라는 한정된 공간을 배경으로 쉴 새 없이 이어지는 대사, 암전 등으로 연극적인 재미를 더했다.
연극과 달리 영화는 쉽게 시간, 공간을 전환시킬 수 있다. 또한 연극 무대에서는 불가능한 거대한 스케일, 디지털 시대의 부산물인 CG 등을 이용해 화려한 비주얼을 뽐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장점을 포기하고 참신한 상황, 배우들의 찰진 대사를 바탕으로 연극 같은 느낌을 연출한 영화들이 있다. <완벽한 타인>의 개봉과 함께, 연극 요소를 적극 활용한 영화들을 모아봤다.
<8명의 여인들>
그 첫 번째는 프랑스 극작가 로베르 토마가 1958년 출간한 동명 희곡을 2002년 영화화한 <8명의 여인들>이다. 폭설로 인해 고립된 시골의 외딴 저택, 저택의 주인인 마르셀이 시체로 발견된다. 저택에는 그의 딸, 부인, 하녀 등 8명의 여인만 있던 상황. 용의자이기도 한 그들은 서로를 의심하며 범인을 밝혀내려 한다.
<8명의 여인들>은 사건 전개, 인물 설정 등을 연극에서 그대로 가져왔다. 다양한 볼거리를 선사하지는 않지만 돈, 치정 등으로 얽히고설킨 인물들의 설전은 전혀 지루할 틈이 없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비밀을 감추려 다른 이의 비밀을 폭로하는 등 점점 난장판이 돼가는 상황은 웃음을 자아낸다. 원작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중간중간 노래를 부르는 뮤지컬 요소로 분위기를 환기시킨 다는 점. 이마저도 화면이 아닌 무대를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까뜨린느 드뇌브, 이자벨 위페르 등 프랑스의 국민배우들이 대거 출연해 상황과 대사만으로 꽉 찬 재미를 보여준 <8명의 여인들>. 명배우들을 통해 유명 연극을 스크린으로 불러온 영화는 8명의 주연 배우들이 함께 베를린영화제 은곰상 예술공헌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대학살의 신>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대학살의 신>도 야스미나 레자의 희곡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8명의 여인들>과 마찬가지로 케이트 윈슬렛, 크리스토프 왈츠, 조디 포스터 등의 명배우들이 한정된 공간과 시간 속에서 쉴 새 없이 대사를 몰아붙이는 영화다. 아이들의 다툼을 논의하기 위한 두 부부. 그들은 처음에는 교양 있는 모습을 보여주지만, 대화는 점점 신경전으로 변해 유치함의 극치에 다다른 비난으로, 심지어 육탄전으로 이어진다.
<8명의 여인들>이 각개전투였다면, <대학살의 신>은 두 부부가 등장해 2대2 팀매치를 펼친다. 재밌는 것은 각자의 상황과 목표에 따라 팀의 구성원이 뒤바뀐다는 것이다. 그 모습은 결국 가식과 교양은 한끝 차이며, 인간은 본성을 따라갈 수밖에 없는 얄팍한 동물이라는 것을 보여줬다.
로만 폴란스키 감독은 연극이 아닌, 영화만이 할 수 있는 방법으로 메시지를 강화하기도 했다. 배우와 관객의 거리를 조절할 수 없는 연극. 이와 달리 영화 <대학실의 신>은 오프닝과 엔딩을 장식하는 아이들의 다툼을 먼발치에서 포착한다. 아이들이 무슨 대화를 하는지, 시시비비 따위는 등장하지 않으며 그저 ‘싸운다’만 알 수 있을 정도다. 로만 폴란스키 감독은 이러한 카메라와 피사체와의 거리 두기를 통해 어른들의 부질없는 싸움을 부각했다.
<페르마의 밀실>
‘빠져나올 수 없는 공간’은 공포를 유발하는 좋은 소재다. 제임스 완 감독의 <쏘우>, 빈센조 나탈리 감독의 <큐브>도 이를 소재로 큰 호평을 받았다. 다만 두 영화는 연극에서는 불가능한 잔혹한 고어 장면, 특수 효과를 위주로 했으므로 연극적 색채가 강하다고 보기에는 어렵다.
밀실 공포증을 소재로 확실히 연극 같은 느낌을 준 영화는 따로 있다. 국내에 정식 개봉하지는 않았지만, IPTV와 웹상에서 인기를 끈 스페인 영화 <페르마의 밀실>이다. 영화는 점점 줄어드는 방 속, 살아남기 위해 제한시간 안에 수학 문제를 풀어야 하는 네 명의 수학자들을 그렸다. 필사적으로 문제를 푸는 인물들의 대화가 중심이 되었으며 비약적으로 시간을 이동하지도 않는다. 수학 문제들과 풀이 과정이 매우 자세하게 등장, 관객들도 함께 문제를 풀 수 있도록 유도하는 연출도 관객 참여형 연극을 닮았다.
자칫 지루할 수 있는 수학을 소재로 긴장감 넘치는 상황으로 풀어낸 <페르마의 밀실>. 연극의 큰 특징인 ‘장소의 일치’를 스릴러에 접목시킨 사례다. 이처럼 좁은 공간을 이용한 스릴러 영화로는 <베리드>, <룸 이스케이프>, <이그잼> 등도 있다.
<도그빌>
파격적인 소재와 스토리로 늘 논란의 중심에 서는 라스 폰 트리에 감독. 그는 <도그빌>을 통해 매우 독특하게 연극을 표방했다. <도그빌>은 한정된 공간이라고 하기에는 애매한 마을 전체를 배경으로 했다. 시간 전개 역시 하루가 아닌 1년이 넘어가는 이야기다. 시놉시스만 보자면 전혀 연극적 요소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도그빌>은 매우 투박한 방법으로 연극을 끌어왔다. 영화는 배경인 마을을 연극 세트처럼 꾸몄다. 깔끔한 시멘트 바닥에 경계선을 그어 ‘집’, ‘길’ 등의 글자만 새겼으며, 배우들은 그 공간이 실제 하는 것처럼 행동했다. 심지어 연극도 사실적인 소품, 무대 등으로 관객들에게 ‘이것은 무대다’를 인지시키지 않으려는 반면, <도그빌>은 연극 세트, 조명 등을 과감히 노출시켰다. 영화를 위해 연극 요소를 차용한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연극처럼 보이고 싶어 하는 가히 실험적인 영화.
<도그빌>은 여타의 라스 폰 트리에 영화들처럼 추악한 인간 본성을 끄집어낸다. 마을 사람들은 처음에는 곤경에 처한 이방인 그레이스(니콜 키드먼)에게 호의를 베풀지만, 점점 욕망을 드러내고 학대를 일삼는다. <도그빌>은 처음에는 여태껏 보지 못한 형식으로 괴리감을 자아냈지만, 눈살이 찌푸려질 정도로 암담한 이야기는 시간이 지날수록 어색함을 지우며 몰입감을 선사했다. 사실적인 요소들 없이 최대한의 효율로도 충분히 영화가 탄생한다는 것을 증명한 셈이다.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은 이후 <도그빌>의 후속편인 <만덜레이>에서도 동일한 방식을 택했다.
<버드맨>
<버드맨>의 연극적 요소는 영화의 가장 큰 특징인 ‘원테이크’(장면 전환 없이 한 장면을 길게 이어가는 촬영 기법)에 있다. <버드맨>은 실제 원테이크로 촬영이 진행되진 않았지만 교묘한 촬영, 편집을 이용해 영화의 대부분을 원테이크처럼 보이게 했다. 카메라는 인물들을 끈질기게 따라가며 공간, 시간 이동을 최대한 자제했다. 이를 통해 관객들에게 인물들과 같은 공간, 시간을 공유하는 듯한 현장감을 주며 몰입감을 높였다.
<버드맨>은 한물간 배우, 리건(마이클 키튼)이 연극을 통해 재기를 꿈꾸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그러나 주위의 시선, 예기치 못한 사건 등은 점점 그를 압박한다. 자신이 연기했던 캐릭터인 ‘버드맨’과 대화를 나누고, 환각을 보는 등 거의 미쳐버린 모습을 보여주는 리건. 그는 일상생활에서도 마치 무대 위에 오른 것처럼 “음악 큐” 등의 혼잣말을 내뱉는다. 그리고 실제 그의 말에 따라 음악은 흘러나온다. 이런 리건의 독특한 캐릭터를 통해서도 영화는 연극 같은 느낌은 살렸다. 동시에 시간 경과를 나타내주는 타임랩스, CG 등 영상으로만 가능한 장점들을 살린 영화기도 하다. 영화와 연극의 장점을 결합해 독특한 체험을 선사한 <버드맨>은 그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촬영상을 비롯해 4관왕을 기록하며 작품성을 입증했다.
<지구를 지켜라!>
국내 영화도 빠질 수 없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연극으로 입지를 다진 장진 감독이 연출한 <박수칠 때 떠나라>가 있다. 장진 감독의 희곡을 원작으로 한 영화는 실시간으로 범죄 수사를 중계하는 과정을 담았다. 스튜디오를 중심으로 하는 공간, 48시간이라는 제한된 시간 등을 활용해 연극의 느낌을 그대로 살렸다.
그러나 이보다 더 독특한 작품이 있다. 신하균, 백윤식 주연의 <지구를 지켜라!>다. 설정부터가 매우 독특하다. 외계인 침략으로 인해 지구가 멸망할 것이라 믿는 청년 병구(신하균). 그는 외계인이라고 의심되는 사업가 만식(백윤식)을 납치해 심문한다. 그 과정에서 만식은 살아남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한다. 자연스레 영화의 공간은 심문이 이루어지는 병구의 집 지하실이 위주가 됐으며 두 인물이 우스꽝스러운 행동, 말이 중심이 됐다.
<지구를 지켜라!>는 참신한 소재, 철학적인 메시지 등으로 부산국제영화제, 로테르담국제영화제 등을 휩쓸며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잘못된 마케팅으로 인해 B급 코미디 영화 정도로 치부되며 흥행에 실패한 비운의 영화기도 하다. 이런 <지구를 지켜라!>는 이후 연극으로 각색되어 대중들을 만났다. 연극 요소가 강한 작품인 만큼 비교적 쉽게 연극화될 수 있었다. 연극을 원작으로 한 영화들인 많이 있지만, 영화를 원작으로 연극이 제작된 독특한 사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