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영화 플레이어들이 움직인다. 올해 초 <곤지암>이 260만명의 관객을 동원했고, <컨저링> 시리즈나 블룸하우스 영화 등 할리우드 공포영화들이 국내 관객 사이에서 꾸준하게 사랑받기 시작하면서 한동안 맥이 끊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한국 공포영화 시장도 조금은 분주해진 듯하다. 이러한 흐름 아래 <여고괴담>(1998)의 박기형 감독이 시나리오 공모전을 주최하고 나섰다. <여고괴담>은 한국영화사에서 사실상 공포영화 붐을 일으켰던 영화이며 지금은 톱스타 반열에 오른 수많은 배우들과 개성 넘치는 감독을 발굴해낸 시리즈였다. 그 시작을 함께했던 박기형 감독은, 물론 공포영화의 외길을 걸어온 것은 아니지만 최근 들어 자신이 정말로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되묻게 되었다고 한다. 마침 올해가 <여고괴담> 개봉 20주년을 기념하는 해이기에 그가 준비하는 공포영화 시나리오 공모전이 더욱 의미 있게 다가올 것 같다. 장르영화에 대한 저변이 확대되길 바라는 움직임이 어떻게 이어질지 기대하는 마음으로 박기형 감독을 만나 그가 가장 좋아하는 공포영화에 대해 듣고, 앞으로의 공포영화 시장에 대한 생각을 물었다.
-<씨네21>과는 오랜만의 인터뷰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주로 드라마 현장에 있었다. 최근에는 중국에서 <잠식>(2017)이란 공포영화를 만들었다. 연출하는 내내 내가 공포영화를 정말 좋아하고 있구나 하며 이 장르에 대한 애정을 다시 확인하게 되었다. 마침 또 시장 상황을 지켜보니 공포영화가 오랫동안 편견에 의해 만들어진 것 같다는 염려도 하게 됐다. 공포영화가 어느 순간 저예산으로 적당히 만들 수 있는 영화로 인식되고 있더라. 그러다보니 의미 있는 영화들이 점점 설 자리를 잃게 되고 악순환이 지속된 것은 아닐까. 이 장르를 정말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 치열하게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지금도 분명히 어딘가에는 공포영화 시나리오 한편씩을 가슴에 품고 있는 사람들이 있을 것 같았다. 그들을 다시 불러내 한번 제대로 된 공포영화를 만들어보면 좋겠다는 생각에 공모전을 준비하게 됐다.
-최근에는 블러드픽처스라는 제작사도 설립했다.
=<잠식>을 연출하면서 성격이 뚜렷한 전문 제작사를 꾸려보자는 마음으로 시작했다. 일종의 레이블 개념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마침 블러드픽처스라는 도메인도 사용 가능하더라. 당연히 누군가가 쓰고 있을 것 같은 이름이었는데. (웃음)
-블러드픽처스가 직접 주최하는 시나리오 공모전이 <여고괴담> 개봉 20주년을 기념해 마련됐다고 알고 있다. <여고괴담>이 공모전의 성격을 규정하고 있는 것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내가 생각하기에 <여고괴담>은 한국 영화시장에서 유효한 장르영화로 인정받았다고 여겨진다. 이후 공포영화가 시장 내에서 큰 역할은 아니더라도 꾸준하게 한 영역을 차지하면서 발전되길 기대했다. 그런데 앞서 말한 대로 <폰>(2002), <장화, 홍련>(2003), <알포인트>(2004), <기담>(2007), 그리고 <불신지옥>(2009) 정도가 만들어지고 난 뒤에는 어느 순간부터 공포영화가 나오지 않더라. 이제 다시 출발하자는 의미로서 <여고괴담> 20주년 기념이라는 타이틀을 달게 된 것이지, <여고괴담>이라는 특정한 소재나 취향의 한계를 목적으로 한 것은 아니다. 공포영화 장르의 부흥을 도모한다는 이번 공모전의 개념이 명확하게 전달됐으면 좋겠다.
-공모 조건을 보니, 원작이 있는 경우는 출품이 안 되고 순수 오리지널 작품이어야 한다고 명시했다.
=반드시 영화를 위해 쓰여진 시나리오를 원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싶었다. 영화로서의 장르적 취향이 반영된 시나리오를 통해서 내가 생각지 못한 걸 발견하길 희망하기 때문이다.
-웹툰이나 소설 등 다른 매체를 통해서도 장르 팬이 계속 유입되고 있으니, 다른 매체와 영화와의 협업도 충분히 기대할 수 있지 않을까.
=그 부분은 반대다. 웹툰이나 소설과 영화는 내러티브를 푸는 방식이 너무 다르다. 공포나 서스펜스를 만드는 기본 툴이 다르기 때문에 성공적인 공포웹툰을 영화로 풀었을 때 과연 웹툰의 성취가 극영화에서도 유효하게 작용할까. 나는 그 부분은 확신을 못하겠다. 그래서 애초부터 영화를 목적으로 쓰여진 이야기나 스타일이 공포영화의 시나리오에는 더 적합하다는 생각이다. 웹툰이나 소설을 기반으로 하기보다는 영화로 접근하는 글이 있었으면 좋겠다.
-심사위원 선정과 심사 과정은 어떻게 할 생각인가.
=심사는 예심과 본심을 나눠서 진행할 예정이다. 나와 시나리오작가들이 예심에서 일차적으로 고르고 상업영화 제작자, 투자·배급 담당자와 함께 최종 본심을 치르려고 한다. 영화를 배급하는 입장에서 극장과 밀접한 전문가의 관점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시나리오 심사 기준에 있어서 제작비 규모는 한정짓지 않았나.
=처음에는 20억원 미만의 제작비를 산출해서 기준치를 정하려고 했으나 사실상 의미가 없어 보였다. 물론 산출하기도 쉽지 않을 테고. 기본적으로는 저예산의 미덕을 찾을 수 있는 시나리오면 좋겠지만 대형 상업영화 시나리오라도 그에 걸맞은 제작 과정을 찾아가면 될 일이다.
-시나리오를 준비할 작가들에게도 유효한 질문일 수 있겠는데, 저예산 공포영화의 미덕은 뭐라고 생각하나.
=핵심은 도전과 실험의 상대적인 자유다. <연가시>(2012), <검은 사제들>(2015)도 기본적으로 공포영화 코드에서 출발한 영화다. 상업영화로서의 규모가 커지면 창작자도 예산 부담을 느끼기 때문에 자본과의 접점을 찾게 된다. 규모가 커질수록 도전하기가 어려워진다는 말이다. 나는 공포영화가 기초과학에 가까운 작품이라고 본다. 저예산으로서의 실험이나 도전이 연구소의 연구 개발(R&D) 결과처럼 산업으로 이어지면서 순기능이 작동되리라 믿고, 또 그것이 거의 유일하게 가능한 장르가 공포영화라고 생각한다. 예산이 작은 영화들이 꾸준하게 도전해서 의미 있는 결과가 축적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상업영화에서의 성취 이전에 뿌리로서의 기초가 다져지길 원한다.
-최근 변화하는 젊은 관객층의 공포영화에 대한 반응에도 주목하고 있을 것 같다. 10대들 사이에서 입소문이 자자했고 흥행으로까지 이어졌던 <연가시>를 본 관객이 20대가 되어 인터넷상에서 <곤지암> 후기 놀이를 즐기고, 또한 블룸하우스로 대표되는 할리우드 공포영화를 즐겨보는 관객도 꾸준하게 늘고 있다. 그들이 무엇을 원한다고 생각하나.
=공포영화 자체는 영원 불멸의 장르라고 생각한다. 그 이면에는 리듬감에 대한 반응이 주목할 만하다. 단순히 <곤지암>이나 <서치>(2017)와 같은 빠른 전개를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속도의 전환이 매끈하게 이뤄지는 템포를 잡아내는 영화가 인기를 얻고 있다. 시나리오작가들도 이것을 계산해서 만들어야 한다. 가령 <컨저링>(2013)류의 영화에서 보이는 완급 조절은 여전히 유효하다. 반면에 <할로윈>(2018)류의 슬래셔, 스플래터 영화는 여전히 흥행이 힘들다. <유전>(2017)과 같은 소위 오컬트의 영역은 또 다르고. 한국적인 오컬트 장르의 시장성은 열려 있다고 생각한다. 이렇듯, 공포영화는 워낙 세분화된 하위 장르가 다양하다. 그 안에서 창작자들이 즐겨봤던 것, 좋아하는 것들을 시나리오로 과감하게 풀어보는 게 필요한 시점이다. 공모전이라는 도전 속에서 함께 새로운 방향성을 찾아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