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15일 국내 개봉한 애니메이션 영화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는 지난해 개봉한 동명 실사영화를 리메이크한 작품이다. 일본의 경우 만화를 원작으로 한 콘텐츠는 TV 애니메이션→극장판 애니메이션→실사영화의 순으로 제작된다.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는 만화가 아닌 소설이 원작이지만 극장판 애니메이션과 실사영화의 순서가 바뀐 것은 독특한 사례. 그렇다면,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처럼 실사가 먼저 등장한 후 이를 바탕으로 애니메이션화된 영화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몇 안 되는 선(先) 실사, 후(後) 애니메이션 영화들을 모아봤다. 리메이크뿐 아니라 리부트, 스핀오프 작품들도 포함했으며 TV 시리즈가 아닌 극장 개봉 애니메이션 영화만 선정했다.
넷플릭스 <고질라> 시리즈
괴수영화의 시작점이라 할 수 있는 혼다 이시로 감독의 <고지라>(1954). 혼다 이시로 감독의 영화는 모르더라도 고질라(해외로 수출되며 고지라에서 고질라로 이름이 변경됐다) 캐릭터를 모르는 이는 드물 것이다. 1954년 첫 등장한 고질라는 영화를 넘어 하나의 캐릭터로 자리 잡았다. 원작의 뒤를 잇는 시리즈, 일본 내에서 이루어진 리메이크, 미국판 리부트 등 수많은 고질라 영화들이 탄생했다. 또한 영화를 넘어 TV 애니메이션, 게임, 소설 등 여러 분야에서 다양하게 캐릭터 활용이 이뤄졌다.
롤랜드 에머리히 감독의 <고질라>(1998)를 비롯해 수많은 실사영화들이 등장했지만 고질라는 극장용 애니메이션으로는 좀처럼 모습을 볼 수 없었다. 그러다 2017년, 넷플릭스에서 최초로 애니메이션 영화 <고질라 괴수행성>을 제작했다. 넷플릭스 영화지만 일본에서는 극장에서도 개봉해 흥행했으며 이후 속편인 <고질라 결전기동증식도시>, <고질라 별을 먹는 자>가 각각 2017년, 2018년 일본 개봉했다. 국내에서는 1편과 2편이 넷플릭스에 공개됐으며 3편은 아직 번역본이 나오지 않은 상태다.
<명탐정 코난>의 극장판 애니메이션을 연출한 바 있는 시즈노 코분 감독이 연출을 맡았으며 고질라 캐릭터와 SF 장르를 결합했다. 방사능으로 오염된 미래의 지구, 갑작스레 등장한 고질라가 인류의 존립을 위협한다는 내용이다. 그들을 피해 우주로 도망친 인류, 외계 문명의 도움 등 기존의 고질라 콘텐츠에서는 볼 수 없었던 요소들을 앞세웠다.
<오시리스 최후의 비행>
<오시리스 최후의 비행>(이하 <애니 매트릭스>)도 애니메이션이 나중에 제작된 대표적 사례다. 다만 세 편으로 구성된 <매트릭스> 시리즈 이후가 아니라, 1편과 2편 사이에 제작됐다. 총 여덟 편의 단편 애니메이션으로 구성됐으며 각각 다른 감독들이 연출을 맡았다. 미국의 애니메이션 감독들을 비롯해 <사무라이 참프루>의 와타나베 신이치로, <뱀파이어 헌터 D> 극장판을 연출한 카와지리 요시아키 등 일본의 유명 애니메이션 감독들도 참여했다. 자연스레 각각의 에피소드가 다른 작화, 분위기를 자랑했다.
세계관만 같을 뿐 각 에피소드에 담아낸 인물, 내용도 다르다. 첫 번째 에피소드인 <오시리스 최후의 비행>에서는 기계들의 전쟁 준비를 목격한 테디우스 일행이 이를 인류에게 전달하기 위해 희생하는 과정을 그렸다. 이는 실사영화의 2편인 <매트릭스 2 - 리로디드>의 시작으로도 이어진다. 또한 두 번째 에피소드인 <두 번째 르네상스>는 기계와 인류의 전쟁이 왜 시작됐는지, 그 배경을 내레이션을 중심으로 담았다. 복잡한 <매트릭스>의 세계관을 이해하기 어려웠다면 이에 대한 친절한 해답이 될 수 있는 에피소드.
이외에도 실사영화 속 조연으로 등장했던 마이클 칼 포퍼(클레이튼 왓슨)의 각성 과정을 그린 <꼬마 이야기>, 전혀 새로운 인물들이 등장하는 에피소드 등 <매트릭스>와 연관된 다양한 이야기가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됐다. 거기에 흑백 누아르, 전통 일본 배경 등 각 감독들의 개성까지 더해진 <애니 매트릭스>는 <매트릭스> 팬이라면 놓쳐서는 안 될 작품이 됐다.
<서울역>
2016년 <부산행>으로 천만영화 타이틀을 거머쥔 연상호 감독. 그는 애니메이션으로 유명했던 감독이다. 학교폭력을 다룬 <돼지의 왕>, 군대 부조리를 다룬 <창> 등의 애니메이션으로 여러 영화제에서 수상하며 이름을 알렸다. 그리고 실사영화로 눈을 돌려 <부산행>을 연출, 큰 성공을 거뒀다.
<서울역>은 연상호 감독의 장기인 애니메이션으로 <부산행> 이전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독특한 점은 사실 <서울역>은 <부산행>보다 먼저 완성된 작품이라는 것. <서울역>이 <부산행> 보다 약 한 달 늦게 개봉해 관객들을 만났다는 점에서 이 리스트에 포함시켰지만, 제작 시기로 따지면 <부산행>이 <서울역>의 속편인 셈이다.
<부산행>에서 열차 안 좀비 바이러스를 퍼트리는 시발점이 됐던 가출 소녀(심은경). <서울역>은 그녀가 어떻게 좀비 바이러스에 걸리게 됐는지를 그렸다. 심은경이 그대로 목소리 연기를 맡았으며 이외에도 류승룡, 이준 등이 합류했다.
먼저 제작돼서 일까. <서울역>은 <부산행>보다는 연상호 감독의 전작들에 가까운 분위기를 보여줬다. 좀비라는 소재를 활용한 추격전과 액션 등으로 장르적 쾌감을 끌어올린 <부산행>과 달리, <서울역>은 좀비가 중심이 아니었다. 대신 극한의 상황을 이용해 한국 사회에 대한 비판의식을 담았다. 영화는 갈 곳 없는 노숙자, 성매매를 시도하는 가출 소녀 등 궁지에 몰린 약자들을 중심이 된다. 그리고 그들을 외면하는 경찰, 군인, 정부 등을 통해 흔히 말하는 ‘헬조선’을 여과 없이 담아냈다.
<서울역>은 짙어진 메시지로 브뤼셀판타스틱영화제에서 수상하는 등 평단의 호평을 받았다. 그러나 <부산행>의 연장선의 기대했던 관객들에게는 어색한 목소리 연기, 개연성 부족 등으로 혹평을 받으며 흥행에 실패했다.
<하나와 앨리스: 살인사건>
채도를 뺀 색감, 덤덤한 감정 묘사 등으로 독보적인 감각을 선보였던 이와이 슌지 감독. 두 편의 애니메이션 영화가 그의 영화를 바탕으로 제작됐다. 첫 번째는 이와이 슌지가 직접 연출을 맡은 <하나와 앨리스: 살인사건>(이하 <살인사건>)이다. 그는 <릴리슈슈의 모든 것>에서 발굴한 신인, 아오이 유우를 주연으로 2004년 <하나와 앨리스>를 제작했다. 청소년들의 암담한 현실을 담아낸 <릴리슈슈의 모든 것>과 달리, <하나와 앨리스>는 밝고 잔잔한 분위기로 세 고교생의 삼각관계가 담겼다.
이후 이와이 슌지는 11년이 지난 2015년, <하나와 앨리스>의 프리퀄인 <살인사건>을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했다. 주인공인 하나(스즈키 안)와 앨리스(아오이 유우)가 어떻게 단짝이 됐는가를 그렸으며 아오이 유우, 스즈키 안이 그대로 목소리 연기를 했다.
부제인 ‘살인사건’만 보면 마치 스릴러로 장르가 바뀐 듯하지만, <살인사건>은 <하나와 앨리스>처럼 청춘들의 소소한 성장담이 중심이 된 영화다. 앨리스가 첫사랑으로 인해 겪는 갈등, 고민 등이 주를 이루고 있다. 그렇다고 살인이 등장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살인사건>에서 ‘살인’은 가장 핵심이 되는 사건이다. 그러나 영화는 의문이 들 정도로 발랄한 분위를 자랑했으며 후반부, 반전과 함께 ‘살인’은 그저 한 소녀 내면을 표현하기 위한 소재에 불과했다는 것을 보여줬다.
<살인사건>은 독특한 소재, 전개 등으로 여러 영화제에 초청되며 호평을 받았다. 확실히 이와이 슌지가 직접 메가폰을 잡은 만큼, 그만의 감성이 애니메이션으로도 잘 구현된 성공적 사례.
<쏘아올린 불꽃, 밑에서 볼까? 옆에서 볼까?>
그 두 번째는 <러브레터> 이전, 이와이 슌지의 필모그래피를 장식한 <쏘아올린 불꽃, 밑에서 볼까? 옆에서 볼까?>(이하 <쏘아올린 불꽃>)다. <쏘아올린 불꽃>은 무려 25년 후 동명 애니메이션으로 재탄생했다. 또한 스핀오프, 프리퀄이 아니라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처럼 동일한 내용을 리메이크했다. 다만 기존의 스토리에서 많은 부분을 재구성해 50분짜리 이야기를 90분으로 만들었다. 연출도 이와이 슌지가 아닌 신보 아키유키 감독이 맡았다.
원작은 “만약 나였다면?”이라는 상상이 중심이 되는 반면, 애니메이션은 ‘하루 전으로 시간을 되돌린다’라는 타임루프가 가장 중요한 소재가 됐다. 또한 삼각관계가 두드러졌던 원작에 비해 두 아이들의 사랑이 중심적으로 그려졌다. 그러나 애니메이션 <쏘아올린 불꽃>은 “달라진 스토리가 산만하게 진행된다”는 혹평을 받았다. 원작에서는 볼 수 없었던 화려한 색감의 작화, 영상과 어우러지는 O.S.T.는 호평을 받았지만 이야기의 구멍을 메우기에는 부족했다는 평.
‘독보적’이라는 수식어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 그런 이와이 슌지의 감성을 재현해내는 것은 역시 쉽지 않은 듯하다. 영화감독뿐 아니라 소설 작가도 활동하고 있는 이와이 슌지는 2017년 원작의 대본을 다듬어 <소년들은 불꽃놀이를 옆에서 보고 싶었다>라는 소설을 출간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