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이 30여일밖에 남지 않았다. 아쉬움과 후련함이 반반 섞인 연말 기분 시즌이 다가온 것. ‘한 건 없지만 올해도 다 갔다’는 생각에 울적해하긴 아직 이르다. 아래의 영화들과 함께 남은 한 달을 꽉 채워 보내는 건 어떨까. 놓쳤다면 꼭 보길 추천하는 올해의 개봉작 12편을 소개한다. 1월부터 10월까지의 개봉작 중 월별로 한두 편을 골랐고, 작품성에 비해 낮은 관객 수를 기록한 영화, 그중에서도 평론가와 관객의 입맛을 모두 사로잡은 영화를 위주로 선정했다. 아래 영화들과 함께 남은 2018년을 영화롭게 보내보시길!
굿타임, Good Time
감독 조슈아 사프디, 베니 사프니 출연 로버트 패틴슨, 베니 사프디 개봉 2018.01.04코니(로버트 패틴슨)는 비참한 삶을 청산하기 위해 은행털이를 결심한다. 거액의 현금을 들고 도주하던 중 공범인 지적장애 동생 닉(베니 사프디)이 구치소에 수감되고, 더럽게 안 풀리는 코니의 ‘굿 타임’이 시작된다. 동생을 구하고 범죄를 성공시키고자 하는 코니의 하루는 폭발 직전의 에너지로 가득하다. 발버둥 칠수록 희망은 멀어지고, 코니의 얼굴은 최고치의 위태로움으로 얼룩진다. 밀랍인형 같은 얼굴로 뱀파이어를 연기하던 로버트 패틴슨의 절절 끓는 연기를 만날 수 있는 영화. 네온 빛으로 물든 화면과 째질 듯한 음악은 이 영화의 트레이드 마크다.
패딩턴 2, Paddington 2
감독 폴 킹 출연 벤 위쇼, 휴 그랜트, 샐리 호킨스 개봉 2018.02.082014년 제작된 <패딩턴>의 후속작. <패딩턴 2>는 런던 생활 3년 차에 접어든 패딩턴(벤 위쇼)이 숙모의 생일 선물을 사려다가 도둑 누명을 쓰게 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았다. 숙모의 생일선물을 사기 위해 사고뭉치 알바몬으로 거듭난 패딩턴의 재롱, 팝업북 같은 런던의 풍경, 악당 피닉스를 연기한 휴 그랜트의 코믹 변신, 쫀득한 긴장을 전하는 추격 신 등 볼거리가 풍족한 영화. 그중에서도 가장 큰 매력 포인트는 진심과 선의의 힘만으로 제 앞에 닥친 위기를 극복해나가는 패딩턴의 무한 긍정 에너지다. 갓 만든 마멀레이드 잼처럼 달큼하고 따스한 영화.
팬텀 스레드, Phantom Thread
감독 폴 토마스 앤더슨 출연 다니엘 데이 루이스, 빅키 크리엡스 개봉 2018년 3월 8일영화를 좋아하는 이들에게 올해 3월은 호화로움 그 자체였다. 해외 유수 시상식에서 호명된 명작들이 쏟아졌던 시기. <팬텀 스레드>는 그중에서 가장 우아하고 치명적인 매력을 지녔다. 완벽주의자 디자이너 레이놀즈(다니엘 데이 루이스)와 그의 강박을 파괴하고자 하는 알마(빅키 크리엡스)의 사랑 이야기. 촘촘하게 서로를 옭아맨 두 사람의 팽팽한 기싸움이 사랑에 대한 색다른 의미를 재정립한다. 폴 토마스 앤더슨, 다니엘 데이 루이스의 이름도 놀랍지만 영화를 보고 나면 그들을 압도하는 연기를 펼치는 빅키 크리엡스에 주목하게 될 것.
레디 플레이어 원, Ready Player One
감독 스티븐 스필버그 출연 마크 라이런스, 사이먼 페그, 타이 쉐리던 개봉 2018.03.28<레디 플레이어 원>은 80년대의 향수와 가상 현실이라는 최신 트렌드를 한 데 녹여놓은 스티븐 스필버그의 능력에 온갖 찬사를 가져다 붙이고 싶은 영화다. 가까운 미래, 가상 현실 세계 ‘오아시스’의 소유권을 상속받기 위해 미션을 수행하는 이들의 여정을 담은 영화. 스필버그의 상상력이 탄생시킨 가상 현실 세계, 오아시스는 말 그대로 영화 덕후들이 꿈꿔왔던 세상이다. 처키, 킹콩, 건담 등 반가운 레퍼런스가 쏟아지니, 영화를 온전히 즐기고 싶다면 미리 예습을 하고 봐도 좋을 것. 러닝타임 내내 테마파크를 체험하는 기분이니 큰 화면에서 보길 추천한다.
레이디 버드, Lady Bird
감독 그레타 거윅 출연 시얼샤 로넌, 로리 멧칼프 개봉 2018.04.04크리스틴(시얼샤 로넌)은 특별해지고 싶은 소녀다. 머리를 빨갛게 물들이고 스스로를 레이디 버드라 명칭 하지만, 엄마 메리언(로리 멧칼프)의 잔소리 한 마디면 그녀는 곧장 현실 바닥으로 처박히고 만다. 그녀는 그런 엄마가 밉다. 아니, 미운 줄 알았을 거다. 구질구질한 집을 떠나고 싶은 마음, 우월해 보이는 친구들과 어울리고 싶은 욕망, 엄마와의 치열한 사랑. <레이디 버드>는 아직 그곳에 그대로 머물러있을 우리의 과거를 소환한다. 모두가 공감할 보편적 이야기로 하이틴 장르 공식을 벗어난 전개를 펼치는 그레타 거윅의 연출력이 돋보이는 작품.
콰이어트 플레이스, A Quiet Place
감독 존 크래신스키 출연 에밀리 블런트, 존 크래신스키 개봉 2018.04.12소리 내는 순간 죽는다. <콰이어트 플레이스>는 단 한 줄의 설정으로 러닝타임 내내 관객의 숨통을 조이는 영리한 스릴러다. 소리를 내는 순간 공격받는 극한의 상황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한 가족의 숨 막히는 사투를 담은 영화. 옷깃 스치는 소리마저 예민해질 수밖에 없는 ‘청각 공포’는 별다른 대사가 없는 이 영화에 엄청난 몰입감을 선사한다. 블록버스터의 1/10 수준의 제작비로 탄생한 <콰이어트 플레이스>는 전 세계에서 제작비 20배에 이르는 흥행 수익을 거뒀다. 이 영화만큼은 꼭 고요한 곳에서 관람하길 권한다. 팝콘과 콜라는 물론 금지다.
버닝, BURNING
감독 이창동 출연 유아인, 스티븐 연, 전종서 개봉 2018.05.17<어벤져스: 인피니티 워>가 극장가를 장악하고 있을 동안 이창동 감독의 신작 <버닝>이 개봉했다. 올해 칸 국제영화제의 경쟁 부문에 이름을 올리고, 내년 아카데미 시상식 외국어영화부문 한국영화 출품작으로 선정된 작품. 종수(유아인)가 실종된 해미(전종서)의 행적을 추적해나가는 과정에서 미스터리한 남자 벤(스티븐 연)을 의심하는 이야기를 담았다. 인물들의 무력감, 그를 둘러싼 기묘한 아우라가 뭉근한 긴장을 더하고, 종수의 분노가 끝까지 치닫는 결말은 강렬한 잔상을 남긴다. 어디서부터가 진실이고 환상인지, 판단은 관객의 몫이다.
유전, Hereditary
감독 아리 에스터 출연 토니 콜렛, 밀리 샤피로, 알렉스 울프 개봉 2018.06.07치고 빠지는 자극적인 공포보단 촘촘히 쌓아올린 서스펜스로 관객을 압도하는 작품. <유전>은 <로즈메리의 아기> <엑소시스트>와 같은 고전 오컬트 호러 명작의 뒤를 잇는 영화다. 생애 내내 불운한 가정사를 지녔던 애니(토니 콜렛)는 자신의 어머니로부터 시작돼 본인의 자녀들까지 관통하는 저주의 실체를 알게 된다. 가족을 둘러싼 저주에 맞서기 위해 고군분투하지만, 초자연적 존재 앞에서 인간은 한없이 나약할 뿐이다. 토니 콜렛만이 할 수 있는 표정 연기가 <유전>이 전하는 공포의 핵심 포인트. 무력한 표정만으로도 공포감을 전하는 밀리 샤피로의 연기와 저주에 대한 공포와 죄책감을 온몸으로 표현하는 알렉스 울프의 연기 역시 놀랍다.
어느 가족, Shoplifters
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 출연 릴리 프랭키, 안도 사쿠라, 키키 키린 개봉 2018.07.26올해 칸 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 <어느 가족>은 그간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그려왔던 가족 이야기의 최종판 같은 느낌의 영화다. <아무도 모른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등 감독의 전작들을 관통하던 테마가 조화롭게 녹아든 작품. 혈연으로 묶이지 않은 가족을 조명했지만 그의 가족 영화 연대기에서 가장 따스한 온도를 지닌 작품이라는 점도 눈에 띈다. 좀도둑 가족의 엄마 역할을 했던 노부요, 그를 연기한 안도 사쿠라의 눈물 연기만으로도 이 영화를 볼 이유는 충분하다. 올해 칸 국제영화제 심사위원이었던 케이트 블란쳇은 “이제부터 우리가 찍는 영화에 우는 장면이 있다면, 안도 사쿠라를 따라 한 것일 것이다”라며 극찬의 말을 전했다.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 One Cut of the Dead
감독 우에다 신이치로 출연 하마츠 타카유키, 아키야마 유즈키, 나가야 카즈아키 개봉 2018.08.23좀비 영화 촬영 현장. 배우들이 분장을 고치며 쉬고 있는 동안 촬영장에 진짜 좀비 떼가 들이닥친다. 좀비 떼들은 사람들을 한 명씩 죽이기 시작하고, 순식간에 현장은 아수라장이 된다. 이 정도의 정보만으로도 충분하다.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는 예고편은 물론 사전 정보 없이 봐야 훨씬 재미있는 영화다. 한 치 앞을 예상할 수 없는 재기 발랄함을 지닌 올해의 코미디. 영화의 도입부 37분의 원테이크 신이 있으니 독특한 구성에 익숙지 않은 관객이라면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해놓는 것이 좋겠다.
죄 많은 소녀, After My Death
감독 김의석 출연 전여빈, 서영화 개봉 2018.09.13작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되었을 때부터 꾸준히 주목받았던 작품. 경민(전소니)이 갑자기 실종되고 그녀와 마지막까지 함께 있었던 영희(전여빈)가 가해자로 지목된다. 영희에게 쏟아지는 의심과 비난이 감당할 수 없는 무게로 늘어나고, 벼랑 끝에 선 영희는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려 발버둥 친다. 점점 무너져내리면서도 흔들림 없이 극을 이끌어가는 전여빈의 연기에 찬사가 쏟아진 작품. 예측하기 힘든 전개에 극한의 감정을 몰아붙인 연출력이 돋보이는 작품이기도 하다. 그간 쉽게 볼 수 없던 십 대 소녀들의 성장 서사라는 점도 주목해보자.
할로윈, Halloween
감독 데이빗 고든 그린 출연 제이미 리 커티스, 주디 그리어 개봉 2018.10.31블룸하우스가 또 한 번 일을 저질렀다. 40년 만에 등장한 1978년작 <할로윈>의 오리지널 속편. 로리 스트로드(제이미 리 커디스)가 다시 한 번 살인마 마이클 마이어스(닉 캐슬)과 마주하고 그와 마지막 대결을 펼치는 내용이다. <할로윈>은 원작의 감성을 그대로 유지함과 동시에 현시대를 반영한 통쾌한 변주를 선보인다. 노년의 로리 스트로드를 중심으로 3대에 걸친 여성들의 반격은 슬래셔 무비의 기념비적인 이정표가 될 것. 한국에선 흥행에 쓴맛을 봤지만, 현재(11월 21일 기준)까지 전 세계적으로 제작비 25배에 다다르는 흥행 수익을 거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