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뷰티풀 데이즈>, 착취 속에서도 책임의 주체를 다한 여성 캐릭터에 대하여
2018-11-28
글 : 황진미 (영화칼럼니스트)
오직 여성만이 살아남았다

*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뷰티풀 데이즈>는 다큐멘터리 <마담B>(2015), <레터스>(2017), 극영화 <히치하이커>(2016) 등을 찍은 윤재호 감독의 극영화다. <마담B>에는 돈을 벌기 위해 탈북한 여성이 중국 농촌 총각에게 매매혼을 당한 뒤 다시 한국으로 건너와 탈북한 가족들을 만나는 사연이 나오는데, <뷰티풀 데이즈>는 전작의 굉장한 사연과 문제의식을 극영화의 방식 속에 절충하여 담고 있다. 영화는 탈북여성이 겪는 착취를 다양하게 그리지만 이를 신파나 <인간극장>의 방식으로 소비하지 않는다. 오히려 진실을 알아가는 아들의 시선을 통해, 가부장적 통념이 놓치는 지점을 폭로해낸다. 영화에서 가장 신선한 점은 여주인공 캐릭터다. 그는 모성애적 강박에 사로잡혀 있지 않다. 다만 인간으로 책임과 의리를 다하고, 자기 삶을 갱신해나가려는 의지를 지닌다.

매매혼이나 성매매나 여성 착취라는 점에서 동일하다

영화는 대학생 젠첸(장동윤)이 병든 아버지(오광록)에게 14년 전 집을 나간 엄마(이나영)가 한국에 살고 있다는 말을 듣는 것으로 시작된다. 한국에 온 젠첸은 술집에서 일하는 엄마를 보고 충격을 받는다. 젠첸이 엄마와 대면하는 시퀀스는 불화와 오해와 폭력으로 덜컹거린다. 영화는 ‘엄마와 창녀’라는 오이디푸스적인 이분법으로 괴로워하는 아들의 치기어린 시선을 따라가는 듯하지만 이는 이후 장면들을 통해 변증되기 위한 예시에 해당된다. 영화는 엄마가 젠첸의 짐 속에 넣은 낡은 일기장을 통해 액자식 구성으로 엄마의 삶을 보여준다.

2003년 중국 시골의 아낙이던 엄마에게 탈북 브로커 황 사장(이유준)이 찾아와 협박하자 다음날 엄마는 집을 나간다. 2004년 황 사장의 유흥업소에서 일을 하게 된 엄마는 짙은 화장을 한 채 붉은 조명 아래에서 춤추고 있다. 불과 1년 만의 이런 변화가 뜨악한가. 하지만 이는 순수와 타락의 이분법으로 재단할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매매혼이나 성매매나 여성착취의 연장선에서 보면 같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1997년에 탈북한 엄마는 브로커인 황 사장에게 진 빚을 갚기 위해 중국의 농촌 총각인 아버지와 매매혼을 했다. 애초 몇달만 살다 도망치게 하려는 것이 황 사장의 속셈이었지만 덜컥 임신이 된 데다 황 사장이 감옥에 가는 바람에 결혼생활이 2003년까지 연장된 것이다. 엄마의 결혼생활은 행복했을까. 부모의 걱정을 빙자한 출입통제를 겪으며, 가사와 육아를 떠맡았고, 버릇없는 아들을 타이를 권한도 갖지 못했다. 출소한 황사장이 찾아왔을 때 엄마에게 결혼생활은 절대적으로 지키고픈 것이 아니었을 수 있다. 그는 집을 나와 돈을 벌어 보냄으로써 책임과 의리와 자존을 지키고자 했다.

집을 나온 지 1년 만에 찾아온 남편은 황 사장의 불법적인 일을 돕는 엄마를 부도덕하다고 나무란다. 하지만 매매혼으로 아내를 얻은 아버지도 황 사장의 고객이었다. 영화는 매매혼의 여성 착취를 꼬집으며, 그것이 성매매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음을 지적한다. 또한 탈북과정에서 브로커에게 큰 빚을 지게 되고, 여성이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이 매매혼이나 성매매 밖에 없는 구조를 놓아둔 채, 순수와 타락을 논하고 가출한 여성의 부도덕을 논하는 것이 얼마나 기만적인지를 보여준다.

착취의 구조 속에서 존엄을 지키며 살아남은 여성

엄마는 14년 만에 찾아온 아들을 담담하고 서늘하게 대한다. 엄마는 계속 송금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를 버렸다”라는 아들과 인식 차이가 있었지만 굳이 설명하려 들지 않는다. 그는 아들에게 돈을 쥐어주고 양복을 사주는데, 이는 그가 지금껏 남편과 아들을 대해온 방식이다. 애초에 돈을 벌기 위해 탈북했고, 마침내 돈을 벌게 되었을 때 그는 새로 맺은 가족에게 돈을 보냈다. 그는 죄의식을 강요하는 남편과 아들에게 “내 덕에 편하게 살지 않느냐”,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다”라고 답한다. 이는 ‘가정에 충실하지 않다’라는 죄의식에 시달리는 수많은 워킹우먼들이 참조해야 할 대목이다.

남편이 황 사장의 머리를 내려쳤을 때, 엄마는 제 손으로 살인을 마무리한다. 그리고 남편을 따라가지 않고 새 길을 떠난다. 손에 피를 묻힌 채 다시 예전의 삶으로 돌아가는 것이 불가능함을 직감했기 때문이리라. 이는 그가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고 행위와 책임의 주체임을 말해준다. 이후 그는 남한 자본주의 환경에 완벽하게 적응한다. 말투, 패션 등에서 현지화에 성공하고, 유흥업에 종사하되 착취의 상태에 놓이지 않는다. 그는 바의 ‘새끼마담’으로 같은 업소에서 ‘기도’ 일을 하는 남자와 동거 중인데, 이는 과거 황 사장에게 종속되어 착취당하던 관계와는 차이가 있다. 엄마는 죽어가는 남편을 만나러 중국에 간다. 그는 15년 만에 만난 시부모나 남편에게 인간에 대한 예의로 대할 뿐 원한과 애증의 감정을 섞지 않는다. 그는 “젠첸을 다시 보면 미워할 것 같다”라는 말과 함께 종이 한장을 남기고, 먼발치에서 아들을 보고 간다. 종이는 그가 아들에게 일기장을 줄 때 찢어놓았던 첫장이다. 아들은 아버지가 죽은 뒤, 엄마의 송금통장과 엄마가 남긴 일기의 첫장을 본다.

일기의 첫장은 매매혼을 당하기 전의 일이 적혀 있다. 젠첸은 자신이 황 사장의 성폭행으로 잉태된 존재임을 알고 충격에 빠진다. 아버지는 젠첸이 자신의 친자가 아님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자해하려는 엄마에게 “아이에게는 죄가 없다. 네 잘못도 아니다”라 말하는 장면은 이를 암시한다. 엄마가 굳이 종이를 남긴 것은, 남편에게나 아들에게나 진실을 알리는 것이 인간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 반전은 굉장한 아이러니를 품는다. 엄마에게 창녀 짓을 한다고 비난하던 아들이, 자신의 존재가 가장 경멸하던 성적 착취의 산물임을 알게 되는 것이다. 이는 황 사장의 입장에서도 굉장한 아이러니이다. 몇달만 참으면 되는데 임신했다며 엄마를 윽박질렀지만 그를 임신시킨 것은 바로 자신이었고, 아동매매를 하겠다며 호시탐탐 노리던 아이가 바로 자기 아들이었던 것이다. 아들과 황 사장의 여성 혐오적 행태는 결국 자기 존재의 밑동을 찍는 도끼질이었던 셈이다. 진실을 아는 자, 즉 엄마 혹은 신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아들과 황 사장의 행태는 어리석고 같잖다. 즉 그리스 비극처럼 놓인 출생의 비밀은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를 통렬히 비웃는 서사를 완성한다. 요컨대 남성들은 더러운 성적 착취의 구조를 만들어놓고, 그 속에 놓인 여성을 부도덕하다느니 미련하다고 비난하지만, 정작 가장 추악하고 가장 어리석은 것은 가부장제 구조를 재생산하고 있는 남성들 자신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탈북 이후 엄마는 온갖 여성 착취를 겪었지만 그의 인격은 망가지지 않았다. 그는 자기연민이나 자기혐오에 빠지지 않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살아간다. 그는 친부를 닮을까 걱정했던 아들이 비교적 잘 자라주었음을 확인한 뒤, 한국에 돌아와 동거남과 결혼하고 아이를 낳는다. 과거의 한 시절을 떠나보내고, 새로운 행복을 향해 다시 발을 내딛는 것이다. 그 길이 왜 하필 정상가족 만들기인지에 대해선 이견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과거에 연연하지 않고, 죄의식에 사로잡히지 않으며, 인간에 대한 예의와 책임을 다하면서, 행복을 위해 새로운 용기를 내는 그가 무엇을 선택하든 응원하고 싶다. 부디 그의 앞길에 ‘아름다운 날들’만 펼쳐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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