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와 경제의 관계를 언급한 말 중에 가장 유명한 것은, 바로 1994년 “<쥬라기 공원>(1993) 한편으로 벌어들인 돈이 현대자동차 150만대 수출한 효과와 맞먹는다”는, <국가부도의 날>에도 등장하신 ‘김영삼’ 전 대통령의 말이다. 물론 이 말은 영화와 TV드라마 등 첨단영상산업을 진흥하기 위한 통계적 의미로 사용된 것이었으나, 사실 당시는 모든 국내 자동차회사를 통틀어 1년에 수출하는 양 자체가 100만대가 안 되는 시절이었으니, 그 막연한 규모가 충격적으로 다가왔었다. 하지만 ‘우리도 그런 영화를 만들자!’보다 ‘외화에 우리 돈이 그렇게 많이 빠져나간다고?’라는 인식만 더 강해졌을 따름이다. 역시 <국가부도의 날>에 등장하는 ‘한국은행’도 비슷한 발표를 낸 적 있다. 한국 영화산업 시스템 변화의 일대 전환점이 된 영화라고 할 수 있는 <쉬리>(1999)에 대해 “현대자동차 쏘나타 1만1667대”의 생산효과를 냈다는 것이다. 물론 <쉬리>가 내수시장에서 가장 잘됐으니 그 생산효과란 말 그대로 ‘효과’만 가리키는 것일 거다.
이번호 특집은 <국가부도의 날>이다. 역시 영화와 경제의 관계에 있어 <쥬라기 공원>만큼이나 유명한 <타이타닉>(1997)이 이 시기에 등장했다. ‘국가부도의 날’ 이후인 1998년 초, 한국에서는 <타이타닉>으로 인한 외화 유출을 우려하며 불매 운동을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있었던 것. <타이타닉>이 흥행에 성공하자, 그로 인해 금 모으기 운동의 성과가 물거품이 됐다는 비판도 공공연히 회자됐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과거 ‘평화의 댐’ 모금운동만큼이나 국가 차원에서 사태의 본질을 호도했던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물론 대국민 사기극이었던 평화의 댐과 달리 실제적 효과를 낳은 것을 부인할 수 없는 금 모으기 운동의 순수성을 등치시킬 순 없을 것이다. 아무튼 영화 속 외환위기와 IMF 구제금융 시기를 둘러싸고 벌어졌던 실제 사건의 기록과 그 평가에 대해서는, 경제학 복수전공자임을 수줍게 고백한 임수연 기자의 <국가부도의 날> 기사를 참고해주길 바란다.
또 다른 제목으로 <1997>이 어떨까 싶은 <국가부도의 날>(11월 28일 개봉)은 지난해 비슷한 시기에 개봉한 <1987>(2017년 12월 27일 개봉)을 떠올리게 한다. 한국 현대사에 있어 기념비적인 전환의 순간을 얘기한다는 점에서 닮았고, 서로 만나지 않는 다수의 주인공들이 출연한다는 점도 비슷하다. 하지만 <1987>보다는 등장인물 수가 적은 <국가부도의 날>은 배우 김혜수가 단연 서사의 중심에 ‘원톱’으로 버티고 서 있다. 그로 인해 임수연 기자의 주장처럼 “영화가 주목하는 ‘비주류 경제학자들’의 목소리가 ‘여성 캐릭터’와 만나면서 한국영화계에 잔재한 편견을 넘어섰다”고 생각된다.
그러면서 동시에 배우 김혜수의 1997년이 궁금했다. 왜냐하면 그 시기가 바로 그녀의 대표적인 전성기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IMF 구제금융이 발표된 그해, 발표보다 한참 앞서 개봉한 그녀의 영화는 바로 1997년 3월 1일 개봉한 <미스터 콘돔>(1997)이다. 그 영화를 전후로 <닥터 봉>(1995), <찜>(1998) 등에 출연하며 이른바 도톰하고 짙은 입술이 강조된 ‘김혜수 메이크업’을 유행시켰던 때다. 그런데 정작 그 시기를 다룬 <국가부도의 날>에서 김혜수가 연기하는 한시현은 전혀 (당시의) 김혜수 같지 않은 맨 얼굴로 등장한다. 뭐랄까, 그처럼 1997년의 김혜수와 한시현을 내 맘대로 비교해보면서, 안성기가 긴 세월 흘러 <라디오스타>(2006)에 스타가 아닌 매니저로 출연하고, 정우성이 <비트>(1997)의 꿈 없던 청춘을 지나 <아수라>(2016)의 부패경찰로 출연한 것 못지않게, 김혜수도 드디어 자기만의 고유한 역사성을 지닌 배우로 단단히 자리매김했음을 느낀다. 그렇게 김혜수를 다시 보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