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영이 끝나고 나서 생각하니 마음에 걸리는 장면 하나가 있다. 영화의 앞부분, 주인공 크리스티안(프란츠 로고스키)은 지게차 운전을 배우던 도중 선배인 브루노(피터 쿠스)를 밀치게 된다. 물건이 진열된 선반쪽으로 차를 돌린 것이다. 작은 실수인 듯 보이지만 영화가 보여주는 교육의 과정을 생각하면 머리가 오싹해진다. 마트의 지게차는 편리한 물건이지만 자칫 큰 사고를 불러올 수 있다. 영화의 주인공들은 모두 지게차 자격증을 가지고 있는데, 어쩌면 이때부터 이들의 운명은 정해진 것 같다. <인 디 아일>은 캐릭터의 이름을 딴 3개 챕터로 진행되는 영화다. ‘크리스티안, 마리온, 브루노’가 각각 나열되는 에피소드의 명칭이 되고, 이들은 이후 3단계 고통의 주인공이 된다. 프로듀서는 영화를 본 뒤 관객이 ‘지게차를 통해 바다를 떠올리기를 바랐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영화가 전하는 멜랑콜리의 핵심에 물 속 울림이 자리하고 있다. 깊고 푸른 바닷속, 새벽녘 마트에서 흘러나오는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강> 왈츠가 영화의 무의식을 장악한다. 그렇게 타나토스를 향한 매혹을 감춘 채, 영화는 스스로의 행동을 시작한다. 이를 단순히 ‘우울한 결말을 향해가는 움직임’이라고 단정하긴 이를 것이다.
처음부터 <인 디 아일>은 우리의 세계를 ‘대형마트’라는 닫힌 세계 안으로 강하게 밀어넣는다. 이때 느리고 긴 파노라마의 ‘가로선’과 지게차의 ‘세로선’이 영화 속 세계의 주된 관점이 된다. 굳이 크리스티안이 신입이라서가 아니라, 과거의 환경 때문에 그는 변한 것 같다. 현재의 그는 침묵을 향해 나아가는 중이다. 나머지 인물들도 다르지 않다. 아마도 대부분의 인물들은 마트 바깥에서 더 조용해질 것이다. 그렇게 영화 속 모든 이들은 과묵해진다. 그리고 또 외로워진다. 토마스 슈투버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영화의 주된 정서가 바로 이 ‘고독의 모티브’에 있다. <인 디 아일>은 외로움을 기반에 둔 채, 섬세하고 직관적인 자세로 외로움의 반대편을 탐구하는 영화다. 가끔 담배를 태우고 커피를 마시는 등 소소한 행위를 통해 인물들은 예정된 비극의 운명을 피하려고 애쓴다. 하지만 부질없다. 소규모 꿀벌떼처럼 통로를 옮겨다니는 현대인들의 비극성이 그 정도로 무마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냉동고 안에서 크리스티안과 마리온(산드라 휠러)이 나누는 대화에 눈길이 가는 까닭도 여기 있다. 인부들이 ‘알래스카’라고 부르는 창고 안에서, 두 사람은 “만일 이곳에 갇힌다면, 밤새 움직여야지 살아날 수 있을 것”이라고 웃으며 농담한다. 넓게 보아 냉동고는 마트의 축소판이며, 좁게 보아 이는 물고기들의 어항에 비견되는 공간이다. 그러니까 영화는 동일한 장소의 모델을 여러 모습으로 다양하게 내놓고 있다. 같은 맥락으로, 브루노가 과거 ‘화물트럭 작업’을 그리워하는 이유도 추측할 수 있다. 독일 통일 이전의 시대, 그러니까 그가 먼지가 날리는 끝나지 않는 도로를 달리던 시대는 이제 사라지고 없다. 언젠가 유용하게 사용될 것이라고 노끈을 챙겨 담는 이 인물의 행동은, 그런 점에서 몹시 암시적이다. 그의 모습 위로 크리스티안의 마지막 행동이 겹치는 것은 그래서 걱정스럽다. 과연 그도 브루노와 동일한 선택을 하게 될지, 우리는 생각해보아야 한다. 반복되고 전파되는 작은 행동의 패턴이 ‘운명’이 아니라 단순한 선택의 방향성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토마스 슈투버는 동독 출신의 감독이며 원작자 클레멘스 마이어 역시 라이프치히 근교에서 자라난 소설가이다. 약간 단정적이긴 하지만, 이 작품을 이들의 무의식을 통해 읽는다면 어떨까 싶다. 과거 동독의 모습을 기억하는 젊은 예술가들은, 자신들의 영화에서 묘사되는 ‘통일된 현재의 독일’을 “비록 발전하긴 하였지만 행복하지는 않다”고 대놓고 말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브루노가 주조하는 세로의 직선이 그렇다. 그는 어항을 뛰쳐나오는 물고기처럼 위태롭게 묘사되며, 그런 면에서 하늘을 향한 방향을 마냥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없다. 묘한 점은 관객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속 깊이 주인공 크리스티안이 이곳에서 무사히 정착하길 바라게 된다는 점이다. 야생의 존재로 그려지는 예전의 친구들과 교제하는 것보다는, 정직원이 되어 진급하는 결말이 훨씬 더 안심된다. 암묵적 자본주의의 안락함이 ‘해피엔딩’이라는 것에 대해 나로서는 크게 반기를 들지 못하겠다. 우울한 광선으로 가득 찬 독일 슈퍼마켓의 한가운데에서, 열정의 에너지가 삶의 온기로 변하고 있다는 점이 끝내 부각된다. 생각해보면 마리온에게 있어 신입사원 크리스티안이 불러오는 루틴은 ‘행복’과 완전히 다른 것이 아니다. 이유는 간단하다. 일을 마치고 돌아간 집에서 그녀를 기다리는 것은 쉼이 아니라 ‘더 고통스런 고독’이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관객은 크리스티안의 무단침입을 통해 깨닫는다. 처음부터 끝까지 영화는 그의 관점을 통해서만 현상을 관찰하며, 욕조 장면은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중요한 테마 중 하나다. 먼저 크리스티안의 욕실 장면을 통해 영화는 몸을 옥죄는 ‘스스로 새긴 얼룩 문신’을 보여준 뒤, 마리온을 켜켜이 누르는 한때 사랑했던 ‘남편과의 관계에서 생긴 눈물’을 드러내 보여준다. 타인에 의해서 생긴 흔적이나 스스로 선택한 상처나 이들이 가진 현재의 아픔은 과거를 거쳐서 완성됐다. 이런 맥락에서 <인 디 아일>은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영화와 매우 흡사한 방식을 택하고 있다. 소외되고 외롭고, 사랑의 부조리에 빠진 이중적인 인물을 그린다는 점에서다. 다만 핀란드의 차가운 바람을 독일의 실내극에서 만나게 되는 것은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라서 놀랍다. 아무튼 내성적인 직원과 사랑에 빠진 우울한 사탕 판매원의 모습을 통해 영화는 흡사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황혼의 빛>(2006)에서 본 행동들을 떠올리게 만든다. 고통스러운 동시에 우스운 인생의 아이러니가 갑자기 세상을 환하게 밝힌다. 이를 크리스티안은 아주 느리게 깨닫는다.
요컨대 이를 비관적 미니멀리즘이 지배하는 영화라 단정지을 수는 없다. 기묘하게도 숨 막히는 물속 세상의 인상이 끝까지 이어지지 않는다. 쓰레기더미를 쌓는 반복적 일과가 다시금 이를 강조한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왔고, 일이 산더미처럼 쌓였으며, 먹고 장식하기 위한 물건들도 산더미이다”라는 내레이션 목소리가 ‘쓰레기를 뒤적이며 음식을 꺼내는 인물들의 행동들’과 만나 시를 쓰듯 아름답게 합치된다. 슈퍼마켓 통로에 울려 퍼지는 요한 슈트라우스와 바흐의 클래식, 사운드의 어긋남도 같은 흐름을 만들어낸다. 후미진 장소와 어우러지지 않는 고상한 미적 즐거움이 관객을 아이러니로 물들인다. 비록 보이지 않는 곳에 감춰져 있어도, 우리 삶에 사랑이 있을 거라고 영화는 말하고 있다. 모더니즘 문물이 주는 안락함을 마냥 즐기지만 않을 뿐, 영화는 이 또한 현실이라고 숨죽여 외친다. 그런 면에서 이 작품은 정치적인 영화이다. 연대를 맺고 야만과 결별하는 과정의 고통이 희미하지만 끊임없이 빛나는 삶의 광선을 통해 우리를 이끈다. 영화가 만들어내는 서정적 낭만성의 원인을 들여다 보면, 도처에 널린 오브제를 통해 <인 디 아일>은 정치적 시를 쓰는 영화로 변모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