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안톤 체호프의 희곡 <갈매기> 각색한 마이클 메이어의 <갈매기>, 다른 듯 같은 서사를 따라서
2018-12-26
글 : 황진미 (영화칼럼니스트)
유구한 착취의 서사

안톤 체호프의 희곡 <갈매기>는 1896년에 초연한 이래 전세계에서 수천번 무대에 올랐지만, 영화로 만들어진 적은 거의 없다. <갈매기>가 무대에 최적화된 텍스트이고, 누가 연출하느냐에 따라 매우 다른 결과물이 나오는 작품이기에, 영화화 할 엄두를 내지 못한 탓이다. 하지만 이번 영화화는 매우 성공적이다. 마이클 메이어 감독은 19세기 희곡을 각색한 뮤지컬로 토니상을 받았던 관록을 십분 발휘하였다. 여기에 시나리오작가 스티븐 카람과 의상감독 앤 로스가 합류하고, 아네트 베닝과 시얼샤 로넌이 캐스팅됨으로써 드림팀이 완성되었다. 영화는 원작을 충실히 옮기면서도, 영화의 장점을 최대한 활용한다. 1900년대 러시아 코스튬의 완벽한 재현과 러시아 전원의 아름다운 풍광이 시각적 쾌감을 극대화한다. 4막에 해당하는 부분을 오프닝 시퀀스로 끌어오는 등 편집의 묘미를 살린 데다, 딱 떨어지는 클래식 음악의 사용으로 관객의 감정선을 매끄럽게 조율한다. 영화는 클로즈업을 활용하여 세밀한 표정도 읽을 수 있고 작은 읊조림도 들을 수 있어서, 인물의 감정이 섬세하게 전달되고 서사가 압축적으로 진행된다.

통속적인 사랑 이야기 속의 예술에 대한 갑론을박

영화는 인물들간의 갈등을 균형감 있게 보여줌으로써 원작이 담고 있던 의미들을 선명하게 살려낸다. 체호프는 <갈매기>에 대해 “코미디, 문학에 대한 많은 대화가 있고 움직임이 적음, 다섯푼짜리 사랑 이야기다”라고 밝혔지만, 코미디라고 하기엔 사건들이 꽤 비극적이다.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는 말처럼 인물들은 극심한 애욕과 질투에 사로잡히지만, 한발 떨어져서 이들을 보면 씁쓸한 웃음이 지어진다. 인물들은 각자 욕망과 콤플렉스에 시달리며, 인물들의 내적 모순에 의해 사건이 벌어지는 성격비극의 성향이 강하다. 영화의 표면적인 서사는 ‘어긋난 사랑의 작대기’로 볼 수 있고, 예술가의 자의식을 이기지 못한 사람들의 선망과 질투가 빚은 비극으로도 볼 수 있다. 한발 더 들어가면, 지리멸렬한 지식인에 대한 냉소를 품은 잔혹한 부조리극으로도 읽히고, 체호프의 예술론과 인생관을 담은 메타적인 텍스트로도 읽을 수 있다.

영화는 1904년 모스크바 황실극장의 박수 소리로 문을 연다. 1904년은 체호프가 사망한 해로, 체호프의 원작을 옮긴 영화의 배경으로 삼을 수 있는 가장 최근의 시간이다. 이는 원작에 충실하면서도 가장 현대적인 각색을 하겠다는 의지로 읽힌다. 또한, 고급스러운 극장의 모습은 이리나(아네트 베닝)가 콘스탄틴(빌리 하울)의 비하와 달리 대배우임을 각인시킨다. 영화는 조명과 촬영기술을 활용하여 여름과 겨울의 풍광을 다르게 보여준다. 이를 통해 2년 전 한여름 밤의 꿈처럼 들떠 있던 분위기와 2년 후 겨울밤의 착잡한 현실 인식이 대비된다.

영화는 콘스탄틴의 연극을 흥미롭게 재현한다. 그의 연극은 실험적이지만 추상적이다. 이리나의 조롱에 화가 난 콘스탄틴이 연극을 중단시켜버려 끝은 알 수 없지만, 작품을 좋게 평한 사람은 콘스탄틴을 짝사랑하는 마샤와 한갓진 관조자인 의사 도른밖에 없다. 주연배우 니나(시얼샤 로넌)조차 나중에 뒷부분을 들려달라는 마샤에게 “왜요?”라고 반문할 정도이다. 콘스탄틴은 기존 연극이 진부함을 비판하며, 새로운 형식의 연극이 필요함을 역설한다. 하지만 이리나는 콘스탄틴의 연극이 허세만 가득한 얼치기 푸념이라고 악평한다. 니나는 콘스탄틴의 연극에 살아 있는 사람이 나오지 않는다고 불평한다. 이러한 예술에 대한 갑론을박은 체호프의 예술론을 스펙트럼화한 것이다. 체호프의 연극은 기존 연극과 달리 큰 사건들이 표면에 등장하지 않으며, 사건을 대하는 인물들의 감정을 더 중시한다. <갈매기>에서도 마샤가 결혼하고, 니나와 보리스(코리 스톨)가 동거하고, 이들의 아이가 죽고, 다시 보리스가 이리나에게 돌아오는 등의 굵직한 사건들이 모두 콘스탄틴의 대사로 처리된다. 이는 굉장한 형식의 변화이다. 하지만 생생한 인물들이 등장하는 통속극의 서사를 따른다는 점에서 콘스탄틴의 추상적인 연극과 다르다. 즉 극중 인물들이 갑론을박하던 예술론을 체호프가 작품을 통해 변증법적으로 합일시킨 것이다.

“나는 갈매기예요. 아니야 나는 여배우예요”

콘스탄틴은 이리나의 비평이 니나에 대한 질투 때문이라고 폄훼한다. 영화는 이리나의 나르시시즘을 잘 보여준다. 굳이 마샤와 외모를 비교하고, 니나가 노래로 주목받을까 봐 냉큼 노래하는 모습은 우스꽝스럽다. 한편 이리나는 보리스에 대한 콘스탄틴의 반감을 재능 없는 자의 열등감 때문이라고 몰아붙인다. 서로 상대의 행동을 질투 때문이라고 말하는 광경은 서로 속물이라고 험담하던 김승옥의 소설 <무진기행>이나 홍상수 영화 속 분위기를 연상시킨다. 하기야 당대에 체호프가 던진 새로움은 한국의 60년대에 김승옥 소설이나 90년대에 홍상수 영화가 던진 모더니즘의 충격과 비슷한 성격을 띤다. 더욱이 니나와 보리스의 스캔들 역시 <무진기행>에서 윤희중이 서울 남자를 지렛대 삼아 탈출하고픈 시골 여교사와 일회적인 관계를 맺고 떠나는 서사나 <오! 수정>에서 인물들이 펼쳐놓는 치졸한 욕망의 교차와 다르지 않다.

니나는 보리스를 만나기 전부터 그의 명성을 선망했다. 콘스탄틴의 연극은 실패로 끝났지만, 보리스의 관심을 얻는 데 성공한 니나는 보리스의 뮤즈가 되고 싶다. 니나의 변화를 눈치챈 콘스탄틴은 갈매기를 쏘아 니나 앞에 던진다. 지질한 남자의 이별 폭력과 자살 협박에 니나의 마음은 더욱 멀어진다. 언제나 글 쓸 궁리에 빠져 있는 보리스에게 순진한 열망으로 끓어오르는 니나는 호기심의 대상이다. 보리스는 죽은 갈매기를 보고, 시골 처녀가 우연히 끼어든 낯선 남자로 인해 파멸되어가는 이야기를 떠올린다. 2년 후 삼류배우가 된 니나는 고생한 흔적이 역력하다. 니나는 자신이 갈매기 같다고 인식한다. 콘스탄틴이 별 뜻 없이 쏘아죽이고, 보리스가 파멸의 주인공으로 떠올렸던 그 갈매기 말이다.

이것은 유구한 착취의 서사로 읽을 수 있다. 콘스탄틴과 니나는 보리스와 이리나처럼 되고 싶었지만, 기성세대의 조롱과 착취로 고통을 겪는다. 그중 콘스탄틴은 그나마 작가로 데뷔할 수 있었지만, 젠더적으로 약자인 니나는 모든 것을 잃고 추운 바깥을 헤맨다. 하지만 한편으로 니나의 성장극이다. 니나의 마지막 독백은 횡설수설 같지만, 나름 단단함을 지닌다. 그는 이제 유명해지기 위해 배우가 되려는 것이 아니라, 운명을 견디기 위해 계속 연기한다고 말한다. 이는 니나가 고통을 통해 허영이나 선망이 아닌 성찰에 도달했음을 말해준다. 극중 인물들은 모두 사랑과 꿈과 욕망을 이야기했지만,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용기 있게 결단하고 길을 나선 사람은 니나밖에 없다. 콘스탄틴은 니나와 같은 자기 확신에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 자살하고 만다. 니나의 독백이 체호프의 희곡 <바냐 아저씨>에 나오는 “그래도 살아야지요!”로 시작하는 소냐의 마지막 독백과 일맥상통 하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체호프가 희곡을 통해 말하고 싶은 인생론도 결국 “자신의 십자가를 질 줄 알고 믿음을 가져야지요”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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