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 지난해 이맘때였다. <씨네21>이 한국영화 톱 프로젝트 특집 기사를 위해 <미쓰백>의 이지원 감독에게 인터뷰를 요청한 것이. “사무실 직원이 그러더라. <씨네21>에서 ‘2018년 기약 없는 영화로 선정됐대요. 그래서 아 됐다 그래, 안되는 거 소문났냐 했었다. (웃음)” 이지원 감독은 당시 아무도 <미쓰백>을 몰라주고, 배급도 안 되고 희망도 없는 자기만의 암흑기를 보내고 있었고, 그래서 ‘기대작’을 ‘기약 없는’으로 잘못 들었다고 한다.
<미쓰백>은 아동 학대의 실제 사례를 보고 감독이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개봉하기까지 7년에 걸친 숙고 끝에 나온 작품이다. ‘남자 배우’, ‘더 유명한 배우’를 캐스팅하면 투자하겠다는 투자사의 제안을 받는가 하면 국내 배급사에서 ‘계속 까이고’, 오랜 기다림 끝에 결국 개봉해 관객과 만나기까지 어느 하나 쉬운 게 없는 과정을 거치면서 아주 다행스럽게도 포기하지 않고 우리에게 도착해준 작품. 아주 소중한 결과물이다. 거기에는 여성, 아동이라는 사회적 약자의 피해 서사를 여성이 직접 쓰고, 여성이 앞서 연기하고, 그래서 더 와닿는 디테일로 공감을 이끌어내며 우리가 함께 분노하고 다짐할 수 있게 해주는 단단한 결정체가 존재하고 있었다. 이 영화는 투자금을 회수당하더라도 여성주인공은 포기못한다는 이지원 감독의 누구도 못 말리는 고집과 그 주장에 선뜻 손을 들어준 배우 한지민의 적극적 만남에서 출발한다. 물론 감독의 시간을 함께한 한지민에게도 관객과 만나기까지 걸린 시간은 마음을 졸이는 시간이었다. “감독님께 내색은 안 했다. 그때 <씨네21> 기사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상아 스틸이 처음으로 나갔는데, 그걸 보는 것만으로도 너무 감사하더라.” 이후는 우리가 익히 아는 스토리다. 지난 10월 11일 개봉한 영화는 언론의 호평과 관객의 지지를 얻으며, 한지민이라는 15년차 배우를 다른 각도에서 발견하게 해준 기회였다.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이하 영평상)을 시작으로 청룡영화상, 올해의 여성영화인상, 그리고 <씨네21>이 뽑은 올해의 여우주연상까지 연말 시상식 여우주연상은 모두 한지민에게 돌아갔다. ‘일주일도 못 돼 내릴 거라는’ 편견을 깨고 72만2천명이 넘는 관객을 말 그대로 공분하게 하고 울리며 올해 가장 기억할 만한 영화를 만든 이지원 감독과 배우 한지민, 두 협업자에게 <미쓰백>으로 아직 담아둔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눠보자고 청했다.
-두분의 만남은 2018년에 꼭 기록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인터뷰를 부탁했다. 한지민씨에게 이번 연말은 시상식 참석만으로도 바쁜 시간이 되었다. 예상치 않았다가 지금은 당연한 시간이라는 생각도 든다.
=한지민_ 사람들이 은퇴하라고 하더라. 더이상은 없다고, 이런 작품은 또 만날 수 없으니 은퇴하라고.
=이지원_ (이)희준씨가 나한테도 은퇴하라고 했는데. 첫 작품부터 이렇게 스포트라이트 받는 작품 하면 다음 작품 어떻게 할 거냐고. (웃음) 그래서 뭔 소리야, 다음 작품으로 100만명 넘길 거야 했다.
매 순간이 고비였던 <미쓰백>
한지민_ 공개 후 기사를 보고 이런 소재의 영화가 많이 나왔으면 하는 생각에 잘 써주시나 할 정도로 호평이 계속 나와서 놀랐다. 감독님은 현장에서 계속 나한테 무조건 여우주연상 받게 할 거라고 했다. “상은 무슨 상이에요” 하고 말았다. 예상을 못했다. 나보고 운다고 하지만 감독님은 더 많이 운다. 눈물의 여왕이다. 늘 빨간 립스틱이 백상아처럼 감추고 있는 거다. 얼마 전에 팬들이 단관 대여를 해서 감독과의 대화(GV)를 했는데 그때도 눈물을 보이시더라. 그만 우시죠. (웃음) 감독님은 예상하셨어요?
이지원_ 한두개는 받겠거니 했고, 내가 받게 할 자신도 있다고는 생각했는데 이제 좀 그만 받아야 하지 않나. (웃음) 10개 채우면 나 하나 달라고 했다. 여우주연상 밑에 감독상 이름 파 가지고. 처음 영평상 받고 전화 와서 “이 상 감독님 가져가시라”고 하더라. 사실 그렇게 계속 울게 되는 게 알려진 것보다 과정이 훨씬 더 어려운 영화였기 때문인 것 같다. 투자 과정도 어려웠지만 그래도 씩씩하게 해왔는데, 후반작업을 1년 7개월에 걸쳐 하면서 죽을 만큼 힘들더라. 투자 과정에서는 내가 영화를 이렇게 만들어서 보여줄 거라는 자신감이 있었지만, 영화를 다 찍어놓고 배급이 되지 않는다는 건 ‘이 영화는 끝난 거야’ 하는 사형선고를 받은 거나 마찬가지니 참담했다. 실제로 “이 영화는 개봉해봤자 관객이 얼마 들지도 않고 내릴 걸, 배급해봤자 득 될 게 없다”는 말도 전해 들었다. 촬영하면서 한번도 안 아팠는데, 편집할 때 병원에 두번 실려가서 링거 맞고 그랬다. 말 그대로 벼랑 끝에 서 있는 기분으로 혼자 편집 버전을 70개나 만들었다. 그러다 보니 막상 개봉 때는 설레지도 두렵지도 않고 멍하더라. 그 기분이 언론시사 당일에 몰려와서 아침에 혼자 울고 토하고 그랬다.
한지민_ 다른 작품을 하면서 내가 내 연기에만 신경 쓸 수 있었다면, <미쓰백>은 온전히 내가 연기에만 신경 쓸 수 있는 유의 영화는 아니었다. 캐스팅부터 제작, 촬영까지 모든 과정에 어려움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런 어려움을 나 혼자 겪는 게 아니라 다 같이 겪었고, 그 모든 과정이 작지만은 않은 힘든 일이었다. (권)소현씨가 영평상 여우조연상 받으면서 우리 영화를 두고 ‘애증의 작품’이라고 했다. 내게도 그렇게 남는 것 같다. 시상식 끝나고 집에 와서 한참 눈물을 흘리다가 감독님께 장문의 문자메시지를 보냈더니, 감독님이 전화해서 “왜 울고 있어 혼자” 하시더라. 기쁨의 눈물이라기보다는 <미쓰백>을 위해 고생해주신 분들한테 이 상이 조금이나마 보답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눈물이 났다. 힘들었던 우리의 상황이 이 상 하나면 충분히 보상될 것 같더라. 원래 성격이 들뜨거나 하지 않고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하는 편인데, 그때는 감정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아, 그동안 나조차 내 무게감을 바라봐주지 않았구나, 생각했던 것보다 나한테 더 많은 압박감이 있었구나 그때 느꼈다.
-어려운 시간을 거치면서 일종의 오기 같은 것이 생겼을 것 같다. 무언가 증명하겠다는 생각이 단단해졌을 텐데, 반드시 지켜야 할 그 목표가 있었다면 무엇이었나.
이지원_ 시나리오 쓰기 시작했을 때도 상업영화로 시작하지 않았다. 오랫동안 쓰던 영화가 엎어지고 나서, 뭐라도 찍겠다라는 생각으로 썼는데 운 좋게 저예산의 상업영화로 만들어진 거다. 솔직히 그런 생각은 있었다. 재미로 쓴 영화는 아니지만 시나리오 쓸 때도 편집 과정에서도 분명한 목표는 대중이 볼 때 어렵거나 이해하기 힘든 영화는 만들지 말자. 주변에 있는 학대받는 아이를 한명이라도 더 돌아보게 하려면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영화를 만들자. 말 돌려서 하지 않고, ‘이것이 지금의 문제입니다’하고 화두를 던져줄 수 있는 영화를 만들자. 그 문제의식만 있다면 이 영화가 바라는 관객에게는 다가설 수 있을거라는 마음으로 만들었다. 그 확신으로 버텨온 것 같다.
한지민_ 시나리오 읽자마자 내가 연기적으로 변신할 수 있겠다, 나한테 좋은 기회다 하는 느낌보다 지금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실을 마주한 느낌이었다. 상아와 지은(김시아) 두 캐릭터를 보면서 마음이 너무 아팠다. 아이들을 많이 좋아해서 뉴스에서 아동 학대 관련 뉴스를 볼 때마다 분개한다. 영화 한편이 세상을 다 바꿀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바꾸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도가니>(2011) 때도 그랬고. 이 영화가 시사하는 바를 진심으로 가지고 간다면, 대중이 목소리를 내고 힘을 실어줄 거라는, 이 사회에 어느 정도 경종을 울릴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있었다. 그 믿음으로 스탭들도 모여준 것 같았다. 그렇게 촬영하는 동안만큼은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어떻게 보일까 하는 걱정을 하나도 안 한 것 같다. 다른 영화를 할 때는 시나리오 보고, 투자·배급사는 정해졌어? 감독님 누구야? 제작사는 어디야? 다른 배우들은 어떻게 들어와? 이런 것이 당연히 묻게 되는 질문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이상하게 이 작품 내가 할 수 있어? 하는 말이 제일 먼저 나왔다. 왜냐하면 그때는 감독님이 이 시나리오를 보고 날 생각할 것 같지 않았다. 선택할 때도 여타의 것이 하나도 궁금하지 않고 무조건 하고 싶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다만 배급이 안 되면서 나 스스로 주인공이라는 책임감이 있어서 ‘내가 아니고 다른 배우가 했으면 배급이 잘됐을까’ 하는 생각을 많이 했다. 어찌 됐건 세상에 공개돼야 한다, 진짜 개봉만 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컸다. 물론 투자자들은 상업적으로 결과가 나와야 하고, 그 과정에서 소위 ‘사공들’도 많다. 그런데 감독님이 하고 싶은 걸 밀고 나갔으면 한다는 마음이 나한테는 있었다.
이지원_ 그 시간 동안 영화를 보는 기준이 무엇인가 하는 고민을 많이 했다. 사공들이 치고 올라오기 전에 초반에는 개인적인 사리사욕이 있었다. 그래서 연출이 돋보이는 편집본을 냈다. 그러다 보니 아트영화가 돼버리더라. 그 과정에서 관객에게 쉽게 다가가려면 감독이 돋보이기보다 배우가 돋보이는 쪽이 훨씬 좋다는 판단이 섰다. 사리사욕을 단절하고 배우가 더 잘 보이게, 진심이 잘 전달되게, 영화의 핵심만 딱 던져줄 수 있게 그런 방향으로 편집본을 수정해갔다. 편집기사님이 그러시더라. “감독님이 이 작품하면서 편집 과정에서 많이 성장한 것 같다”고. 배급이 금방 됐으면 달라졌을 텐데, 배급이 길어지면서 오히려 시야가 넓어진 것 같다. 이젠 우스갯소리로, 우리 영화를 깐 배급사들이 성장의 동력이었다는 말도 한다. (웃음) 결국 나 자신이 제일 힘센 사공이 된 거다.
● 백상아 메이크업
완벽하게 백상아가 되기까지. 서사의 구축 이후, 다음 단계로 외형을 만드는 작업이 이루어졌다. 테스트 촬영을 하면서 화장은 단계별로. 눈 화장을 연하게 시작해 점점 진하게 해보고 아이라이너만 그려봤다가, 그렇게 바삐 살아가는 상아가 그걸 제대로 그렸을까 하는 생각에 찍찍 그려보기도 하고, 아이섀도도 그려보면서 백상아의 얼굴을 만들어나갔다. 지금의 염색한 머리는 처음에는 검은색이었다. 한지민은 ‘상아가 염색할 것 같지 않다’고 했지만, 이지원 감독은 “그 작은 체구의 상아가 세상과 맞서서 살려면 ‘나 건들지 마’ 하는 기운이 있어야 한다”며 그 방법으로 머리색의 변화를 제안했다. “숍에서 머리를 탈색하는데, 색도 다 입혀지기 전에 감독님이 갑자기 뒤에서 그만! 여기서 멈춰 하시더라. (웃음)”는 한지민의 증언. 미쓰백의 헤어 컬러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미쓰백을 닮은, 감독을 닮은 도입부
-<미쓰백>은 관객에게 의미를 전달하면서 세련된 접근 방식을 취한다. 서두 없이, 무 자르듯이 단호하게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는 콤팩트한 구성이, 참 ‘미쓰백’다운 화법 같다. 영화의 긴장을 끝까지 가져가는, 장르적인 재미가 충분하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물론 70가지 편집본을 거치면서 도달한 지점이었을 것 같다.
이지원_ 원래 시나리오는 서론이 있었고, 찍어놓은 것도 있는데 편집하면서 바뀌었다. 난 돌려 말하지 않고 직설적인 스타일인데 성격대로 간 거다. 원래 영화가 감독을 닮지 않나. 시사 후에 오래 알고 지낸 투자사 분이 ‘감독님하고 꼭 닮은 영화네요’ 하고 문자메시지를 보냈는데 그 말이 수긍이 가더라. 내가 놓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 건 백상아라는 캐릭터의 디테일이었다. 제목도 <미쓰백>이고, 미쓰백이라는 여자, 백상아라는 캐릭터에 동화되지 않으면 관객이 이 이야기를 절대 따라갈 수 없다고 생각했다. 백상아가 평범한 여자가 아니지 않나. 밑바닥에서 구르고 굴곡 있는 인생, 이런 상황을 신 안에 함축적으로 보여주자는 생각을 했다. 이 여자의 행동, 얼굴 표정 하나에 이걸 넣자. 화장기 하나 없고 다크서클은 있는데 입술만 바른다든지, 구부정하게 앉아 있는 자세라든지. 이런 세세한 디테일이 통해야 관객이 이 여자한테 다가갈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고 봤다. 거기서 한지민이 보이면 절대 안 되고 백상아가 보여야 했다. 프리 프로덕션 때부터 이 배우에게 파고드는 작업을 많이 했다. 한지민이 나온 영상과 사진을 다 본 것 같다. 지금 내게 한지민 개론을 쓰라고 하면 논문을 쓸 수 있다. 왜 <엽기적인 그녀>(2001)의 견우(차태현)가 그녀(전지현)를 다른 남자한테 보내는 것처럼, 우리 한지민 배우는 뭘 좋아하고요, 뭘 싫어하고요 이런 거 조목조목 다 쓸 수 있다. 인간 한지민을 감히 안다고 할 수 없지만, 배우 한지민은 잘 안다고 자신한다. 영화라는 매체는 첫 관객이 감독이라고 생각한다. 모니터를 통해 감독이 제일 먼저 배우를 보고, 그 배우가 연기하는 수많은 테이크 중 고르고 이어붙이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 감독이다.
한지민_ (이)희준씨도 질투하고 그랬다. (웃음) 감독님 진짜 집요하다. 내가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계속 궁금해하셨다. 감독님은 내가 떨어뜨리는 침의 농도까지 중요한 사람이었다. (웃음)
이지원_ 그렇지. 내가 떨어지는 그 침을 만지기도 했어. (웃음) 한지민이 뱉으면 내가 손으로 끊어주는 협업.
한지민_ 왜냐하면 침 뱉는 연기가 너무 어렵다. 침을 뱉고 산 사람이 아니니까. (웃음) 근데 감독님은 툭 하고 떨어지는 침이었으면 좋겠다고 하더라. 맨날 그걸 연습했다.
이지원_ 그날 집에 가서 이런 문장을 썼다. ‘한지민의 아밀라아제는 좀 강한 거 같다.’
-<밀정>(2016) 뒤풀이 때 감독님이 ‘올 블랙 의상에 일수 가방 같은 클러치백을 쥔 한지민의 모습에서 예상하지 못한 아우라를 느꼈다’는 말은 이젠 <미쓰백> 서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전설이 됐다. 그 아우라가 무엇이었나? 사실 이런 기획이 있다면 한지민이라는 배우는 쉽게 떠오르는 카드가 아니다.
한지민_ 나도 내가 떠오르지 않더라. (웃음)
이지원_ <밀정> 뒤풀이 때 한지민씨를 봤는데, 남자한테 첫눈에 반한 느낌이었고, 전기가 통했고 그 이야기는 영화 개봉하면서 ‘한지민 배우 어떻게 캐스팅하셨어요?’ 하는 질문을 들을 때마다 클리셰처럼 반복하던 이야기다. 돌아보면 캐스팅까지가 어쩜 그렇게 무모했나 싶고 한편으로는 용감했던 것도 같다. 사실 <미쓰백>은 충무로에 시나리오가 돌지 않았다. 이전에 엎어진 작품이 있는데, 그땐 시나리오를 돌렸고, 하겠다는 배우도 많았는데, 투자받기까지는 쉽지 않더라. 그 과정을 다시 거치기가 싫었다. 그래서 이 작품은 누구든 잡는 사람과 하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때 운명처럼 한지민씨가 소속된 BH엔터테인먼트에서 시나리오를 읽고, 망설이지 않고 답을 준 거다.
한지민_ 난 대체 내가 그날 어떻게 걸어갔는지 보고 싶더라. (웃음) 내가 원래 편하게 입고 다니는 걸 좋아해서 그날도 올 블랙 차림에 운동화 신고, 클러치백 들고 그냥 갔다. 사실 그때 뒤풀이 자리는 안 가고 싶었다. 무대인사 끝내고 또래 배우들이 다 일이 있어서 못 가게 됐고, 나도 피곤하기도 했다. 우리가 워낙 술자리가 많아서 오늘도 또 가야 해? 하는 마음도 있었다. (웃음) 그런데 송강호 선배가 감독님들이 많이 영화를 보러 와주셨는데 같이 가서 인사라도 드리자고 해서 따라갔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게 운명인 것 같다. 그 자리에 감독님이 안 계셨다면 지금의 이 자리도 없었을 거다.
이지원_ 어제 ‘쓰백러’(<미쓰백> 팬덤을 만든 관객들)들이 글을 올린 걸 봤는데, 감독님 차기작에 누가 나올지 너무 궁금하다고, 원하는 배우를 막 이야기하는데. ‘감독님께 캐스팅되려면 기분 나쁜 상태에서 술집에 클러치백 들고 가면 된다. 절대 웃으면 안 된다’ 이런 이야기를 하더라. (웃음) 첫인상이 그만큼 강렬했고, 생각해보니 그전에 내가 한지민 작품을 제대로 본 게 없더라. 영화는 <밀정>, <조선명탐정: 각시투구꽃의 비밀>(2010)밖에 없었고, 드라마를 안 보니 기존 만들어진 한지민에 대한 이미지, 정형화된 이미지가 없었다. 내 안에 만들어진 이미지가 없었기 때문에 망설이지 않고 첫인상을 믿고 갈 수 있었던 것 같다. 저런 에너지를 가진 배우라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만들 수 있겠다는 확신이었고. 뭣보다 사람이 사랑에 빠지면 좀 다르게 보이지 않나. 그 자리에서 그런 감정을 느꼈다.
한지민_ 나도 지은 역의 (김)시아와 촬영할 때 그런 기분이 들더라. 감독님한테 그래서 우리 영화 멜로 같다. 달려가서 지은이를 안고 그럴 때도 감정이 그랬다. 미친 사랑이었던 거지.
상아의 과거를 상상하기
-배우의 전작이나 이미지를 크게 염두에 두지 않고, 완전히 새롭게 만드는 경우도 많은데, 어떻게 보면 감독님의 작법은 그 반대가 아닌가 싶다. 강렬한 첫인상 이후에는 배우의 외형뿐만 아니라 내장까지 속속들이 알아가는 과정을 거쳐 한지민의 모든 걸 백상아로 조합하는 시간을 거쳤다.
이지원_ PD님이 그러더라. ‘아마 감독님은 한지민이 양말을 벗어서 던져놔도 그 냄새를 맡고 이 냄새는 어떻게 다르다고 할 사람이다’. 정말 그랬다. 내가 한지민을 캐스팅하기 전에 만들어 놓은 시나리오가 있지 않나. 그런데 한지민이 들어오기 전후의 갭이 굉장히 크다. 이 캐릭터가 철저하게 관객에게 다가가고 동화될 수 있는 캐릭터가 되려면 시나리오도 배우쪽으로 움직이고, 배우도 시나리오쪽으로 움직이게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중간지점에서 만나야 시너지가 생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 초반 시나리오는 존 카사베츠가 연출한 <글로리아>(1980)의 글로리아(지나 롤랜즈)에 가까웠는데, 한지민이 연기한 백상아와는 정반대 지점에 떨어져 있는 캐릭터였다. 이 시나리오에 한지민을 구겨넣으려면 삐거덕거릴 수밖에 없다. 한지민이 캐스팅된 순간부터 한지민과 백상아가 붙을 수 있는 그런 결과를 만들어야 했고, 그래서 한지민을 알아야 했다. 그러니 양말 냄새까지도 맡아야 한다고 생각한 거지. (웃음)
한지민_ 대중이 생각하는 ‘배우 한지민’의 이미지가 어떤 건지 내가 가장 잘 알았기 때문에 영화가 시작하고 나서 한지민이 보이면 안 된다, 어떻게 하면 내가 안 보일 수 있을까 그 생각으로 작업했다. 가장 한지민답지 않아야 했지만 그걸 1순위로 두고 접근했다면 되게 불편했을 거다. 가령 이 영화는 담배를 피우는 장면으로 시작되는데, ‘뭐야, 한지민이랑 담배 진짜 안 어울려’ 하면 영화 자체가 망하는 길이었다. 그래서 내 목표는 무조건 영화 시작할 때부터 어딘가 살고 있는 상아를 만드는 거였다. 감독님이 말씀하신 상아의 디테일은, 상아니까 이렇게 할 거 같아, 상아니까 이렇게 입을 것 같아 처럼 외모를 먼저 만들어나가는 게 아니라, 서사를 다 쌓아서 그녀의 심리 상태를 이해한 다음에 만든 디테일이었다. 외형이나 행동을 통해 한지민처럼 보이지 않게 하려고 애써 만들었다면 관객에게는 거북할 수 있겠더라. 한지민을 지우기 위해서 세팅한 모습, 머리를 탈색하고 진한 화장을 하면 오히려 과할 수 있는 거다. 한지민의 이미지 변신보다 이 영화가 갖고 있는 게 무엇인지 어필하려 했다.
이지원_ 편집실에서 보여주면 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같은 말을 한다. 한지민 맞느냐고.
한지민_ 사실 촬영 현장에서 모니터링할 때는 내가 한번도 보지 못한 얼굴이 진짜 많더라. 그동안 연기하면서 우는 장면도 많이 찍었는데 내가 저런 모습으로 울지는 않았던 것 같다. 처음에 내 연기를 보면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더라. 내가 저때 힘들었지 하는 마음에 눈물이 난 게 아니라, 나 역시 그 안에 들어가서 그 감정을 느끼면서 영화를 봤던 것 같다. 특히 상아가 건물에 매달려 있던 지은이랑 마주쳤을 때, 모텔에서 상아가 우는 장면에서는 눈물이 막 쏟아지더라. GV 때도, ‘그런 신을 찍었어요’ 이런 장면 이야기를 하다 보면 눈물이 나더라. 돌아보면 너무 힘든 시간이었다. 모든 게 새로운 경험이었다.
-그사이 감독님의 감정 변화도 드라마틱하게 흘러갔다. 처음에는 친구, 그다음에는 남자친구, 그리고 모성애까지 느껴졌다고 했는데, 그 감정의 변화는 어떤 이유로 왔고 지금은 어떤 단계인가.
이지원_ 영화 자체가 연애랑 비슷한 과정을 겪는 것 같다. 사랑에 빠지기 시작해 좋았다가 마무리되고. 감독이 배우를 어떻게 느끼는가 하는 감정이 관객에게 전달된다는 생각이 들어서 프리 프로덕션 단계에서는 어쭙잖게 사랑을 해봐야겠다 했다. 그런 마음이 생기다 보니 촬영 중간에는 많이 아프더라. 내가 그렇게 사랑하는 대상인데, 내가 해야 하는 일은 한지민을 굉장히 힘들게 하는 일이었고, 제일 필요한 건 한지민에게 미움받을 용기였다. 한지민 배우는 눈이 너무 투명해서 그날그날 감정이 내 눈에 다 보인다 모니터를 통해서. 그런 사람을 최대한 다운시키고 고통스럽게 하는 게 내 몫이었다. 프리 프로덕션 단계부터 나를 미워하는 게 느껴졌는데 그중 최고는 역시 마지막 격투 신 찍을 때였다. 그때는 분노, 회한 같은 오만 감정이 느껴져야 하니 그러려면 이 사람을 내가 화나게 만들어야겠다 한 거다. 누구나 사랑하는 사람에게 미움받기 싫을 거다. 물론 감정이 없으면 이 사람이 나를 미워하든 말든 상관없는데, 너무 사랑하는데 상대가 미워하면 고통스럽지 않나. 그런데 그 장면에서는 그 감정이 꼭 필요했기에 무리수를 둬가며 분노하게 만들었고 결국 그게 표현이 됐다. 그런데 내가 마음이 너무 여린 사람이라 그 뒤가 감당이 안 되더라. 촬영 막바지라 그 뒤로 회복이 안 됐다. (한지민도) 뒤풀이 때 나한테서 멀찍이 떨어져 있더라.
한지민_ 뒤풀이 때 원래 나는 스탭들이랑 같이 있는다. 감독과 배우는 늘 대화할 시간이 있는데, 스탭들과 배우는 대화할 기회가 상대적으로 적다. 특히 우리 현장은 내 감정이 다운되어야 하니 제대로 시간을 못 보내 미안한 마음도 컸다. 회식도 3회차 남기고 처음 해서 미안하기도 했고. 감독님은 촬영 때 나를 몰아붙였다고 하시는데, 그런 게 서운하지는 않았다. 감독님이 어떤 의도로 그러는지 아니까.
이지원_ 나는 나대로 그런 상태로 정리가 안 되고 끝나버렸다고 생각하니 이별 후에 극심한 고통이 오는 단계에서 편집을 했다. 헤어진 연인을 보는 심정이었다. 안 보면 그냥 끝나는데 1년 반 이상을 우울한 마음으로 계속 보는 거잖나. 그러면서 모성이라는 게 생겼다. 마음을 정리해야 하는 단계에서 계속 편집 작업을 하며 보게 되니 뭔가 우러러보는 감정이 생긴 거다.
한지민_ 확실히 그게 감독님 스타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쨌든 그 사람 내가 먼저 만나봐야겠다. (웃음)
이지원_ 물론 이제는 미련이 없다. 아련한 감정으로 남아 있다고 할까. 한편으로는 이번 영화에서는 어쨌든 내 방식이 장점이 됐다. 한 배우를 완전히 사랑해서, 그 배우의 새로운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고, 영화가 그렇게 보여줄 수 있게 감정이 전달됐다. 그런데 앞으로 어떤 작품을 찍을지 모르겠지만, 또 그렇게 격렬한 연애를 하듯 할 수 있을까. 내가 너무 깊이 빠지니 주변 지인들도 걱정하더라. 사실 이 작품 하면서 나도 조금은 성숙했기 때문에 덜 아프자면, 덜 하자는 생각도 든다. 자꾸 말하다 보니 내가 그만큼 다시 아파야 한다면 차라리 죽는 게 낫지. 영화를 만들지 말지 싶다. (웃음)
한지민_ 지금은 이별하고 떠나보내는 중일 것이다. 돌아보면 힘들고 더딘 과정이었지만, 감독님도 그렇게 성장하셨다고 하고, 나 역시 그 안에서 다른 작품에서 겪지 않았던 것을 경험하면서 성장한 것 같다. 나도 주변 분들이 <미쓰백> 찍고 나서 성격이 변했다고 하더라. 이 영화는 나란 사람을 바꿔놓은, 큰 전환점이 된 작품임에 틀림없다.
● 백상아 작명법
백상어는 바다의 포식자로 불리는 물고기 백상아리에서 따온 이름이다. 이지원 감독이 이미 엎어진 작품부터 고수해온 이름이기도 하다. “내 작품 속 여성 캐릭터들이 다 세다. 시나리오를 쓰면 고분고분한 여자들이 안 써지더라. 듣기만 해도 날카로워 보이는 그런 이름을 주고 싶었다.” 백상아리뿐만 아니라 코끼리의 상아처럼 뾰족한 것도 모두 연상되는 이름이다. 참고로 백상아를 늘 지켜주려 하는 형사 장섭(이희준)의 섭은 다혈질의 우직한 성격을 나타내기 위해 불꽃 섭(燮)자를 썼다고 한다.
연대라는 화두
-얼마 전 <국가부도의 날>로 김혜수 배우를 인터뷰할 때 한지민씨의 근성을 누차 강조한 게 인상적이었다. “남들이 열광하는 이면에는 정말 백조처럼 물갈퀴질을 해서 스스로 만들어낸 성과라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는 말을 했다. 한지민이라는 배우가 우리가 익히 아는 ‘스타성’이 아닌, 그걸 떠난 배우의 입지를 마련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는 말이자, 비단 <미쓰백> 한편을 통한 변화보다 더 많은 것이 축적되어 일어난 과정이었다는 말로 들렸다.
한지민_ 아무래도 영화보다 TV드라마에서 여성 캐릭터들의 성격이 비슷한 면이 있다. 장르적으로 멜로가 많은데 그 안에서 여성은 수동적으로 사랑받는 존재가 된다. 촬영하다 보면 다른 캐릭터인데 왜 나는 똑같은 연기를 하고 있지, 늘 비슷한 캐릭터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캐릭터는 달라도 어찌 됐건 나란 사람을 통해 대사를 하고 목소리를 내다 보니 나는 한계에 다다른 게 아닌가, 창피해지는 순간이 있더라. 신인 때는 당연히 작품이 들어오면 물불 가리지 않고 했고, 열심히 하다 보니 점차 많은 작품을 하게 됐는데 어느 순간 자꾸 한지민화해서 연기하고 있는 건 아닌가 고민하는 시점이 온 거다. 그래서 어느 정도 내가 할 수 있는 걸 보여주자는 생각에 영화를 하려고 했더니, 여성 캐릭터가 거의 없더라. 그렇다면 내가 주인공이 아니더라도 이 작품에서 그전과 다른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면 한 신이라도 해봐야지 한 거다. 이렇게 좋게 평가해주시기까지 사실 운이 좋았다. 일부러 계획하고 한 게 아니라 나한테 기회를 주신 건데, 마침 한해에 이 작품들이 개봉하고 또 우연찮게 여성 캐릭터들이 이끌어가는 영화다 보니 결과적으로 의미가 생겼다. 그 현장에서 나도 모르게 배우게 되고 경험이 쌓여서 <미쓰백>을 만나서도 그걸 표현할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청룡영화상 받고 나서 감독님들이 축하 문자메시지를 많이 보내주셨는데, <미쓰백> 한편으로 상을 받았다는 생각이 안 들더라. 그 작품들이 있어서 지금의 내가 있고, <미쓰백>이 있었다는 생각에 같이 작업한 감독님들 모두에게 감사하다.
-‘여성’이라는 화두를 던졌다는 측면에서 <미쓰백>이 제기한 이슈는 크기도 하고, 아직 스코어로는 성에 차지 않을 수도 있다. 2019년에도 여성감독, 여성의 서사는 여전히 부족한 상황이다.
이지원_ <미쓰백>을 찍으면서 나는 이게 여성영화라고 생각하고 찍지 않았고, 등장하는 인물 중 여성이 이렇게 많은지도 몰랐고, 내가 여성 영화계의 잔다르크처럼 될지도 몰랐다. 그런데 개봉하고 나서 이게 여자가 주인공이고 여성영화라는 걸 깨달은 부분이 많은 것 같다.
한지민_ GV를 하러 갔는데, 나, 감독님, 시아, 소현씨 다 여자인거다. 여자밖에 없는 경우는 정말 드문 광경이다.
이지원_ 그래서 그때 여성영화라는 걸 명백히 알게 됐다. 의도하지 않았는데 사실 그렇다. 투자나 배급 과정에 힘들었던 거, 내가 깨닫지 못한 안 된 이유 중 여성감독 영화고, 여성영화라는 점도 있었겠구나 이제는 그런 생각이 든다. 여성이 감독인 영화가 시장에 워낙 없고, 잘 안 된 누적치가 그런 결정에 반영되기도 했을 터다. 또 한편으로는 여자가 주인공이어서 안 된 게 아니라, 캐릭터에 대한 심도 깊은 고민, 인간적인 면의 부각, 감정의 방향에 대한 고민이 더 필요하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여성영화가 더 잘되려면 <미쓰백>이 수치적으로 더 잘되어서 기준점을 제시했어야 한다는 생각도 들지만, 작게나마 한두발 내디디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큰 시장의 변화를 떠나 <미쓰백>이 불러일으킨, 각자 다음 스텝의 변화 역시 감지하나.
한지민_ 전혀 없다. (웃음) <미쓰백>을 했다고 해서 갑자기 여성 캐릭터가 돋보이는 시나리오가 만들어지지는 않지 않나. 수상소감 말할 때도 ‘이 상의 무게감을 전혀 느끼고 싶지 않다’고 했는데, 어떤 분이 그러시더라. 한번 받기도 힘든 상, 한번 받았으니까 막 하라고. 이제 더 막 해도 되는 거 아니냐라고. 그 말을 실천하는 마음으로 앞으로도 ‘생각 없이’ 작품을 선택 하고 싶다. 청룡영화제 때 (김)혜수 선배님이 해준 말씀이 기억난다. ‘지민씨, 상을 받고 장밋빛이든 가시밭길이든 그냥 천천히 걸어갔으면 좋겠다.’ 전에는 내가 작품을 선택하는 기준들이 있었다. <그것만이 내 세상>(2017) 때는 이병헌 선배처럼 연기 잘하는 배우와 눈 마주치고 연기해봐야지 해서 한 거고, 그다음 작품들도 그런 기준이 있었다면 <미쓰백>을 하고 나서는 그런 의미에서 뭘 해야겠다 생각을 안 한 것 같다. 나는 연기를 하는 사람이고, 내가 할 일은 나이가 들어가니, 그에 맞는 연기를 하는 일이라는 생각을 한다. 나는 나이 들어가는 게 좋다. 나이가 들면서 감정들이 더 다양해지는 걸 느낀다.
이지원_ 이렇게 차기작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게 너무 감사하다. 투자사나 제작사에서도 콜이 조금씩 오고, 배우들이 영화를 잘 봤는지 같이 하고 싶어 한다는 이야기도 들려와서 기분 좋다. 한편으로는 사실, 차기작을 내놓으면 사람들이 놀라겠다 생각이 든다. 들어오는 시나리오들은 세고 다크하고 사회적 문제의식이 있는 작품들이 오는데. 사실 지금 쓴 차기작은 전혀 그런 톤이 아니다. 앞으로 내가 어떤 작품을 만들지 모르겠지만 <미쓰백>과 공통점은 캐릭터 중심적이라는 것이다. 배우와 캐릭터를 깊이 파고 드는 영화인데, <미쓰백>보다는 훨씬 더 톤이 경쾌하고 파워풀할 것 같다. <미쓰백>이 여자와 아이의 연대였다면 이번엔 와해된 부부가 연대하는 영화다. 연대라는 화두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
-어쨌든 이제는 미쓰백을, 상아를 떠나보내는 시간이 필요한 시점이다.
한지민_ 작품은 끝났지만, 이제 나는 떠났어, 이런 마음이 아직은 안 드는 것 같다. 시간이 지난다고 그때 감정들이 잦아들지 않을 거다. 상아의 감정이나 지은을 생각하는 마음도. 스스로도 분리하려고 하지 않았던 것 같고 자연스럽게 내 생활을 하면서 돌아오고 있지만. 그만큼 농도가 짙은 작품이다.
이지원_ 많은 분이 차기작을 궁금해해주시고, 무척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요즘 즐겁지 않느냐고 하는데 왜 그런지 모르게 우울하더라. 엊그제는 그래서 <미쓰백> 관련 용품을 창고에 다 집어넣었다. 포스터도 떼내고, 휴대폰도 바꾸고. 이제 <미쓰백>을 하면서 몸을 담갔던, 우물 같은 시간을 빨리 털어내려 한다. 너무 골이 깊었던 사랑이라 떨쳐버리지 않으면 더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을 것 같다. 한지민도 당분간은 안 봐야 할 것 같고. (웃음) 당분간은 보지 말자. 우리. 요즘 택시앱에 자꾸 나오던데, 그래서 다른 앱으로 바꿔 탄다.
한지민_ 감독님이 얼마나 애정을 기울였는지 아니까 이런 감정이 올 것 같다. 배우는 이런 작업을 많이 해봤고, 또 <미쓰백> 촬영 끝내고, 원래 예정된 다른 작품을 하기도 했는데, 감독님은 몇년간 붙잡고 있던 작품에서 빠져나오기가 힘들 것 같다.
이지원_ 그래서 사람들이 나한테 감정으로는 딱 배우 같다는 말을 하더라.
한지민_ 어느 날 사진 찍어서 보내야겠다. 내 셀카. (웃음)
이지원_ 차단하겠다. 비록 짝사랑이었지만, 어차피 배우보다 감독의 사랑이 더 클 수밖에. (웃음)
● 미쓰백이 제목이 되기까지
한지민도 “나는 좋지만 흥행 면에서 볼 때 모두 반대해서 바뀌지 않을까” 했다는 문제의 제목이 <미쓰백>이었다. 부제 제안도 많았지만, “고집 한번 부릴 때는, 삭발하겠다, 할복하겠다는 말을 쓰며 싸울 건 싸우고 마는 스타일”이라는 이지원 감독이 제목을 사수하고 나섰다. ‘미쓰’라는 여자를 낮춰 부르는 말 속에 숨어 살던 어떤 여자가 한 아이를 만나고 자기를 다 까 보이기 전에 ‘미쓰백이라고 불러’라고 하는 것 안에 미쓰백의 모든 것이 담겨 있었고, 이보다 더 영화를 잘 표현할 제목은 없다고 생각했다. 물론 많은 사람이 무슨 영화인지 모를 때 ‘한지민 나오는 코미디영화’로 인지하고 ‘제목만 아니면 10만명은 더 들었을 거다’라고 댓글을 단 걸 보면서 “제목 바꿔야 했나 싶기도 했다”고. 그래도 ‘내 손을 잡아줘’ 이런 제목으로는 절대 못 바꾼다는 게, 그래서 절대 후회는 없다는 게 이지원 감독의 굳은 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