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경수는 언제 웃을지 자꾸 신경 쓰이는 배우다. 기본적으로 그는 잘 웃지 않는다. 첫 연기 경험이었던 <카트>(2014)의 태영은 조잘대는 동생 민영(김수안)을 무표정으로 혼내고 부당해고 문제로 엄마 선희(염정아)가 분투하는 사이 조용히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시작한다. <순정>(2015)의 범실은 요란한 친구들 사이에서 다리가 불편한 수옥(김소현)을 조용히 챙겼고, <형>(2016)의 두영은 한순간의 사고로 시력을 잃은 유도 선수였으며, <7호실>(2017)에서는 사채 빚을 갚기 위해 마약을 맡아두는 일을 하다 곤란해진다. 첫 주연 드라마 <백일의 낭군님>은 미소에 박한 그의 이미지를 기막히게 활용한 작품이었는데, 딱 그가 웃음을 비치는 만큼 로맨스가 진전됐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것은 그의 무덤덤한 얼굴이 그간 엑소의 멤버로서 갖던 독특한 포지션과 꽤 겹친다는 것이다. 그에게는 아이돌 특유의 언제나 웃음을 잃지 않는 씩씩함이나 넉살이 없다. 대신 뒤에서 조용히 눈치를 보며 돌아가는 상황을 멀뚱멀뚱 지켜보다가,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얼굴이 무너져라 웃는 쪽이다. 이렇듯 무심한 듯 진지한 인상은 뜻밖에 신인배우로 주목받는 이유가 됐고, 영화계는 아프지만 내색하지 않는 청춘의 얼굴을 소환할 때 도경수를 찾기 시작했다. 배우로서 찬찬히 경력을 쌓아가는 그에게 “배우가 더 어울린다”거나 “아이돌에 전념했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이들이 양극단에서 나타날 때쯤, <스윙키즈>라는 적시타가 나타났다. 요컨대 <스윙키즈>는 앞선 방식으로 도경수를 평가한 이들을 모두 할 말 없게 만드는 작품이다. 춤과 노래에 재능이 있는 그가 ‘춤’이라는 패를 먼저 깐, 댄스 그룹 출신이기 때문에 더욱 잘하는 연기가 있다는 것을 임팩트 있게 각인시킨다. “너무 어두운 인물만 연기하는 거 아니냐”는 걱정에도 한방 먹인다. 탭댄스에 매료되어가는 북한군 포로 로기수는 장난기 넘치고 기쁜 마음을 숨기지 못하는 19살 소년이다.
한편 <카트> 전에는 레슨을 받아본 적도 없다는 도경수는 연기면에서도 눈여겨볼 만한 스타일을 구축했는데, <백일의 낭군님>을 기획한 소재현 PD는 “연기를 신기한 방식으로 잘한다. 표정도 액션도 리액션도 크지 않은데 이상하게 편집하면 잘 붙는다. 눈빛을 타고났다”고 전했다. <스윙키즈> 개봉을 앞두고 도경수를 긴 인터뷰로 만난 것도, 그를 앞선 배우들의 속성으로 이해하기보다는 새롭게 들어볼 이야기가 많을 것 같아서다. 기존 계보에 섞이지 않는 새로운 유형의 배우, 도경수를 만났다.
-최근작인 <스윙키즈> 이야기부터 하자. 깃을 세우고 다니는 로기수는 그간 필모그래피 중 유일하게 ‘까리함’이 느껴지는 캐릭터였다.
=로기수한테 어울리는 게 뭘까 감독님이랑 상의를 많이 했다. 기수의 캐릭터와 굉장히 닮았을 법한 자료 사진이 있었는데, 옛날 교복에 군모를 삐딱하게 쓰고 바지도 힙합 스타일처럼 펑퍼짐하게 입었더라. 이게 당시 유행이었을 테니 거기서 모티브를 많이 따왔다.
-로기수는 춤을 통해 감정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배우로서 이런 연기가 주가 되는 작품을 한다는 건 어떤 경험이었나.
=엑소 멤버로서 무대에 설 때는 안무와 구성이 짜여져 있고 그에 따라 준비를 하면 되는데, 로기수는 동작과 표정 하나하나에 감정을 넣어야 해서 좀 어려웠다. 특히 데이비드 보위의 <Modern Love>에 맞춰 춤을 추는 신은 어떻게 해야 관객이 더 통쾌하고 후련한 감정을 느낄 수 있을까 고민을 많이 했는데, 내가 처음 춤을 췄던 당시를 많이 떠올렸다. 머리로는 되는데 몸으로는 안 될 때의 답답함이, 동작이 하나씩 성공하면서 쾌감으로 이어지던 경험이 있었다. 또한 감독님이 전체적인 루틴과 큰 감정은 잡아주셨지만 표현에서는 자유롭게 열어주셔서 마음이 가는 대로 춤을 췄다. 기쁠 때는 동작을 크게 하고, 답답할 때는 동작을 빨리 했다. 사실 그 시퀀스의 결과물을 보고 많이 놀랐다. 내가 그렇게 활짝 웃고 있는 줄 몰랐거든. 가수 활동을 할 때도 비슷한 감정을 느낀 적이 있지만 춤이 참 행복하고 즐거운 것이라고 강력하게 느끼니 자연스럽게 웃음이 나왔다.
-계산된 연기가 아니었다는 건데, 춤을 계속 추면 당연히 힘들고 얼굴에 힘든 티가 나니까 표정을 의식해야 하지 않나. 다른 배우 인터뷰에서 춤출 줄 아는 배우가 액션 연기도 더 잘한다는 얘기를 본 적 있는데, 가수 활동이 연기에 도움되는 면이 있었나 보다.
=익숙지 않은 동작에 감정을 넣으려고 하면 동작이 망가질 수밖에 없다. 아니면 표정이 흐트러지거나. 그래서 <Modern Love> 신처럼 감정 표현이 중요한 장면은 나에게 친숙한 동작을 했다. 몸이 기억해서 생각하지 않아도 바로 동작이 나오는 수준이 되어야 비로소 감정 표현도 가능하다. 몸이 완전히 동작을 익힐 수 있도록 연습을 많이 하는 수밖에 없다. 또한 액션 연기와 춤에 비슷한 동작이 많다. 그래서 춤추며 배웠던 것을 응용하다보니 동작을 쉽게 따라할 수 있는 노하우가 좀 생겼다.
-<스윙키즈>는 영화 전반부와 후반부 분위기가 완전히 다르다. 원톱 주연배우로서 불균질한 영화의 톤을 잘 잡아주기 위해 신경을 많이 써야 했을 텐데.
=전체적인 흐름은 머릿속에 넣어두고, 기수가 가진 감정의 중심에서 너무 가지 않게 고민한 부분이 있었다. 가령 친구였던 광국(이다윗)이 포로수용소에 온 이후 영화 분위기가 달라진다. 기수가 혼자 탭댄스를 생각할 때 앞에서 선동하던 광국이 “기수 동무, 요즘 미군 모가지를 안 따오는 거 같다”고 공격하는 장면이 있는데, 이때 기수가 기분이 나쁘다고 인상을 쓰는 식으로 연기했다면 영화 톤이 흐트러졌을 것이다. 연설 신의 분위기에 기수 캐릭터까지 너무 쑥 들어가면 안 됐다. 그래서 그 장면은 무표정으로 건조하게 연기했다.
-드라이하게 연기하는 건 원래 본인이 가진 성향 같기도 한다.
=항상 그런 생각을 한다. 왜 화가 나면 인상을 쓰고 소리를 질러야 할까? 왜냐하면 난 그런 식으로 화를 내본 적 없다. 평소에 어떤 신경전이 있을 때도 내 감정을 들키지 않으려고 하는 편이다. 물론 좀 다른 성격을 가진 인물을 연기할 땐 그에 맞게 표현해야겠지만 로기수 같은 캐릭터는 내 기본적인 성격을 토대로 연기했다.
-<스윙키즈>는 잘개 쪼갠 컷과 롱테이크가 혼재한 현장이었다. 리듬감을 살리기 위해 편집실에서 장면들이 어떻게 연결될지 신경 쓰이지 않았나.
=신경 쓰인다기보단 재미있었다. 전에는 안 해본 거니까. 롱테이크 신은 다른 곳으로 튀지 않고 몰입이 잘돼 오히려 좋았고, 기수가 잠자리에서도 탭댄스를 생각한다든지 하는 장면은 각각의 컷에서 탁탁탁! 보여줘야 할 것을 탁탁탁! 연기한다는 게 그냥 너무 재밌었고 결과물이 진짜 궁금했다. 특히 <Modern Love> 신은 양판래 역의 (박)혜수와 같이 연습하지도 않고 촬영도 따로 해서, 이게 서로 교차편집이 된 후 어떤 그림이 나올까 싶었는데, 결과물이 매우 만족스럽다. (웃음)
-tvN 드라마 <백일의 낭군님>은 많은 명대사를 남겼다. “지금 나만 불편한가?” “느낌적인 느낌” “이 새끼 당최 말을 듣지 않는 새끼구나” 같은 코믹한 대사는 잘못 처리하면 사극 자체가 가벼워질 수 있는데 선을 참 잘 탔다.
=그냥 감정을 충실하게 표현하려고 하지 매번 대사를 어떻게 해야겠다는 생각은 안 한다. 유행어를 활용한 대사를 더 가볍게 쳤으면 더 웃길 수는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기억을 잃은 왕세자 캐릭터랑은 맞지 않는다. 사실 대사를 좀더 듣기 좋게 처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을 좀 했는데, 결국 정답은 그거더라. 내가 그 캐릭터로서 그 캐릭터가 할 법한 방식으로 말하는 것. 그런 식으로 대사 처리를 조절했다.
-TV드라마는 시청자가 대충 봐도 캐릭터의 감정을 분명히 알 수 있게 연기를 해야 한다는 통념이 있는데, <백일의 낭군님>은 그와는 상반되는 방식의 연기를 선보였다. 전반적으로 담백했다. 가령 홍심(남지현)을 볼 때 과도하게 다정한 눈빛은 보내지 않더라.
=그냥 하던 대로 한 것 같다. 나는 리얼리티가 좋다. 물론 분명하게 감정을 보여주고, 로맨스 연기에서 이른바 눈에서 꿀이 많이 떨어질수록 더 설렐 수도 있지만 성향 자체가 현실적이고 자연스러운 것을 더 추구한다.
-성동일 배우가 상대배우와 합해서 100을 만든다는 생각으로 연기한다고, 상대가 70을 연기하면 자신은 30을 한다고 인터뷰에서 말한 적이 있는데, 경수씨의 <7호실>이나 <형>도 적절한 예가 될 것 같다. 확실히 <7호실>의 신하균 배우는 경수씨보다 액션이 크다. <형>을 함께한 조정석 배우는 신마다 끼가 넘치는 쪽이고.
=해주신 말이 딱 와닿는다. 업되는 사람이 있으면 반대로 다운되는 사람이 있어야 보는 맛도 있고 톤 앤드 매너도 맞지 않나. 액션이 큰 사람 앞에서 리액션도 크게 하는 것보다는 말이다. 또 함께 연기하면서 하균 선배에게 항상 그 캐릭터로 보이게 하는 현실감, 정석이 형의 연기 스타일 등을 배웠다.
-튀지 않게 부지런한 타입이다. <7호실>에서 경수씨가 프레임 뒤에서 시선을 뺏지 않는 선에서 계속 움직이는 것을 발견했다.
=감독님과 얘기한 부분도 있지만 내가 채우려고 한 것도 있다. 다른 배우를 방해하지 않고 그 캐릭터가 자연스럽게 할 법한 일을 찾는 게 늘 재밌었다. 사실 카메라앵글에 손가락 하나 정도가 잡히거나 아예 벗어나 있을 때도 무언가를 하려고 하는 편이다.
-그간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이질적인 연기 방식을 보여준 건 <신과 함께> 시리즈와 이병헌 감독의 웹드라마 <긍정이 체질>이다. 특히 <신과 함께-죄와 벌>은 누가 봐도 원 일병이 관심병사라는 것을 알 수 있는, 분명하게 보여주는 연기를 했다.
=관심병사 원동연은 플랫하게 연기하지 않은 캐릭터라고 나 역시 생각하고, 극 안에서 당연히 그렇게 했어야 했다. 나는 아직 군대도 안 갔고 사람을 죽이고 죄책감에 목을 매는 상황이 공감도 안 가다보니 연기하기가 너무 어려웠다. 김용화 감독님이 많이 도와주셨다. 자신의 경험담도 들려주고 캐릭터에 대해서도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이때는 다른 영화에 나온 것이라든지 간접경험한 것을 기반으로 표현을 많이 한 것 같다.
-예전 인터뷰에서 <신과 함께-죄와 벌>의 원 일병은 지금까지 연기한 인물 중 가장 안쓰럽고 앞으로도 이렇게 불쌍한 인물은 없을 거라고 했다. 극중에서는 무고한 이를 죽게 만들어 미움받을 수도 있는 ‘관심병사’를 기자에게 그렇게 소개한 게 흥미로웠다.
=그렇지, 그럴 수도 있지만…. (동의를 구하는 적극적인 눈빛으로) 정말 불쌍하지 않나? 사실 얘가 잘못한 건 없는데 실수로 사람을 죽이고 누구에게도 말을 하지 못하고 끙끙 앓는 상황이 너무 안쓰러웠다. 어떤 분들에게는 미워 보일 수 있겠지만, 난 지금도 내가 연기한 인물 중 가장 불쌍한 캐릭터는 원동연 같다.
-사실 <신과 함께-죄와 벌>의 원동연은 연기력을 인정받을 수는 있지만 멋진 캐릭터가 전혀 아니었다. 원래 인상이 그런 배우라는 오해도 받을 수 있고. 그전에 사회문제와 엮인 우울한 청춘을 많이 연기한 것도 있었고, 배우로서 걱정은 안 들었나.
=전혀. 지금까지 했던 캐릭터들이 다 마냥 어두웠던 것도 아니고. 항상 내 안에 있는 어떤 면을 담은 서로 다른 캐릭터를 보여주려고 노력하는데, 새로운 것을 계속해나가면 그런 생각을 가진 분이 있다 해도 오해를 깰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스윙키즈>의 로기수는 중요한 분기점이다.
=정말로. 지금까지 보여준 적 없는, 나에게 너무 소중한 캐릭터다. 다음에 내가 뭘 할지 너무 궁금하다. 관객과 관계자들에게 어떤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까, 굉장히 설렌다.
-예능 프로그램에서도 언급될 만큼 애교를 질색한다는 게 알려져 있어서인지, 애교 많은 캐릭터를 연기했으면 좋겠다는 짓궂은 생각이 든다. (웃음)
=배역으로 맡으면 재밌을 거 같다. 싫지 않다. (웃음)
-네이버 <배우What수다> 출연 당시 직전 출연자였던 김혜수 배우와 함께 드라마를 찍는다면, 같은 회사 내 팀장과 신입사원으로 만나고 싶다고, 장르는 휴먼 드라마가 좋겠다고 했다. 이때 진행을 맡은 박경림씨가 “로맨틱 코미디가 아니라? 김혜수씨 생각은 좀 다를 수 있다”라고 하자 “제가요? 어떻게 (감히)…”라고 반응했는데, 왜 안 될 거라고 생각했나. 못 할 것도 없는데.
=그게 어떻게 되나! 그런 작품이 있다면 나한테 정말 영광이겠지만, 과연 기회가 있을지.
-JTBC 드라마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의 정해인 배우처럼 누나들의 귀여움을 받을 캐릭터라든지….
=그런 거 너무 좋다. <밀회> 같은 드라마도 해보고 싶다. 다음 작품으로 멜로도 기대하고 있고, 스릴러도 해보고 싶고….
-그러고 보니 드라마 <너를 기억해>에서 사이코패스 캐릭터도 잘 어울렸다.
=정말? (웃음) 그런 캐릭터도 좋고, 진짜 평범한 사람도 연기해보고 싶다. 어떤 캐릭터 하나만을 바라기보다는 지금까지 했던 것과는 다른 인물을 다양하게 연구하고 싶다.
-드라마 <괜찮아, 사랑이야>는 대중에게 처음 노출된 연기이자, <카트> 이후 두 번째 연기 경험이었다. 당시 루게릭 환자가 발작하는 상황을 연기했어야 했는데, 이전에 레슨을 받아본 적 없던 배우가 어떻게 신을 준비했는지 궁금하다.
=그때는 다큐멘터리나 영화 같은 것을 보며 간접경험을 한다거나, 내 기억에 남아 있는 것, 혹은 상상으로 만든 것을 통해 만들어나갔다.
-처음 연기를 배울 때는 노희경 작가에게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스타카토로 이야기하면 발음에 도움이 된다든지 하는 스킬적인 부분은 물론이고 캐릭터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해주셨다. 앞으로도 노희경 작가님의 드라마는 무조건 하고 싶다. <라이브>를 정말 재미있게 봤는데, 그런 일상적인 작품도 하고 싶고, 작가님 작품 중에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을 가장 좋아한다. 공감되는 게 많다.
-이후 연기과의 일반적인 교육 과정을 거치지 않은 배우가 어떻게 영화 연기를 준비하게 됐을지 궁금하다. 지금은 자료 조사를 열심히 하는 타입에 가깝나, 자기 안에서 해결하려는 타입에 가깝나.
=내 안에서 많이 찾는다. 물론 내가 경험할 수 없는 부분에 대해서는 자료 조사를 하면서 공통점을 찾긴 하지만, 그다음 단계는 혼자서 상상을 많이 한다. 현장에 놓인 소품을 보며 그때그때 생각해보는 것도 있지만 전체적인 성격이나 성향은 머릿속으로 상상하고, 어떻게 행동하고 말을 할지 계속 생각하다보면 자연스럽게 현장에서 떠오르는 게 있더라. 지금까지는 그렇게 해왔다.
-그 캐릭터가 되어 일기를 써본다거나, 일생 전체를 묘사한 일종의 자서전을 만든다거나, 철저한 연기 노트를 만드는 배우도 있는데.
=음, 메모를 하지 않고 머리로만 생각한다. 시나리오가 깨끗하고 두꺼워지지 않았으면 하는 사람이라, 항상 시나리오는 그냥 보기만 하고 머릿속에 넣는다. 기억력이 좋지는 않은데, 너무 정확히 정해두고 가면 나한테는 연기가 더 복잡해지는 거 같다. 평소에는 머릿속으로 일종의 시뮬레이션을 해보다가 현장에 가서 집중하는 게 오히려 더 편하다.
-<카트> 때 엄마에게 화내는 연기가 원래 안 해봤던 일이라 너무 어려웠다고 하지 않았나. 당시에는 어떻게 연기를 준비했고 요즘 비슷한 난관에 부딪힐 땐 어떻게 헤쳐 나가나.
=그때도 머리로 시뮬레이션만 하고 직접 해보지는 않았다. 그냥 현장에서 한다. 어떻게 혼자서 막 화를 내나. 나는 그 상황이 돼서 상대배우가 있어야 연기를 할 수 있지 혼자 방 안에서 화내는 연습을 한다거나 멤버를 상대로 연기 연습을 한다든지 하는 건 쑥스러워서 절대 못한다. (웃음)
-현장에 가야만 하는 타입인가 보다.
=아직도 현실에서 소리 지르는 걸 못한다. <카트> 때는 “(울상 지으며) 이씨, 현장에 가서 하자”는 마음이었는데, 실제 그 연기를 하면서 굉장히 통쾌해졌다. 내가 느끼지 못했던 것, 못해봤던 걸 하면서 생기는 쾌감이 나한테 크게 다가왔다.
-그간 필모그래피를 보면 감독들이 경수씨의 눈을 엄청 사랑한다는 생각이 든다. 감독들이 유독 얼굴을 클로즈업하고 눈빛을 공들여 보여준다는 걸 의식한 후, 눈에 감정을 담는 연기를 할 때 특별히 더 신경 쓰게 된 부분이 있나.
=어…. (한참 고민하다가) 없다. 그냥 캐릭터에 충실할 뿐이다. 그보다는 원래 눈이 좀 약하다. 면역력이 떨어지거나 자외선에 많이 노출되면 눈이 쉽게 건조해지고 충혈된다. 감정 신을 찍을 때 눈을 깜빡이면 관객에게 방해가 되니까, 건강관리를 열심히 한다. 사실 시력이 진짜 안 좋다. 현장에서 모니터할 때는 잘 안 보여서, 안경을 끼고 나중에 스크린에서 결과물을 볼 때 내 모습을 처음으로 제대로 관찰하게 된다. 중요한 장면을 모니터할 때는 엄청 가까이서 동작들 위주로 많이 본다. 렌즈도 못 낀다. 다른 사람들과 달리 각막 표면이 둥그렇지 않고 각져 있다고 하더라. 렌즈를 끼면 눈꺼풀에 밀려 렌즈가 내려가서 안경을 낀다.
-함께 숙소 생활을 하는 다른 엑소 멤버들 역시 연기 활동을 한다는 점이 어떤 안심이 될 거 같기도 하다.
=안심보다는 응원에 대한 고마움에 가깝다. 우린 서로 연기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아까도 얘기했듯이 창피해서 다른 멤버랑 연기 연습도 안 해봤다.
-서로 쓴소리를 해준 적은 없나.
=안 한다. 내가 자세가 구부정하다거나 거북목이라는 건 멤버들이 지적해주긴 했는데, 내 쪽에서도 멤버들 쪽에서도 연기 조언 같은 건 해본 적 없다. 내가 배우로서 선배도 아니고 같은 선상에 있는 동료들인데 어떻게 그러겠나. (웃음)
-남성성을 규정하는 어떤 편견- 거대한 체구라든지- 을 가진 사람들이 있고, 그런 타입의 배우가 어떤 장르에 더 잘 어울린다고 말하는 이도 있다. 이런 편견에 반대하는 입장인지라, 경수씨가 <백일의 낭군님> 등의 작품을 성공시키는 것을 보며 통쾌해하고 있긴 한데. (웃음)
=얘기하신 특징이 남자다움의 조건이라고 나 역시 생각지 않는다. 그 사람이 어떤 걸 잘한다거나, 성격이나 성향에서 느껴지는 멋짐이 중요하지. 연기도 그냥 나대로 하고 싶다. 내가 추구하는 방향, 내가 보여줄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해보려 한다.
-자기 능력과 매력에 대한 칭찬을 들으면 매번 한결같이 어쩔 줄 몰라 하는데, 여러 모습을 통틀어 결론내리건대 자존감은 굉장히 높다. 이게 어떻게 양립할 수 있는지 궁금하다.
=누가 자꾸 칭찬을 해주면 부끄럽고 정말 미칠 것 같다. (웃음) 내가 생각해도 자존감은 좀 높은 것 같고, 자존감이 있는 게 중요하다. 근데 내가 가진 어떤 능력에 대한 자존감이 아니라, 나의 건강함에 대한 그것이라 공존할 수 있는 것 같다. 내가 단단해야 스트레스를 받아도 무너지지 않으면서 잘해나갈 수 있으니까.
-지난해 출연한 예능 프로그램 <아는 형님>에서 장래희망을 ‘농부’라고 적은 걸 봤다. 요리를 좋아하는 것도 그렇고 혹시 <리틀 포레스트>적인 삶을 꿈꾸나. (웃음)
=일본판 <리틀 포레스트> 시리즈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내가 키운 작물로 요리하고, 조용하고 좁은 집에서 건강하게 사는 것.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가능하다면,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쯤 그렇게 사는 게 내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