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사랑, 디테일
2019-01-02
글 : 김혜리 |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사랑, 디테일

* <로마>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로마>

<로마>를 여는 4분여의 도입부는 그 자체로 미니 영화다. 입주 가정부 클레오(얄리트사 아파리시오)가 물청소하는 마당의 포석을 카메라가 오랫동안 지켜보는 숏 위로 크레딧이 깔리는 긴 숏이다. 바닥은 반복해서 밀려드는 물로 찰나의 거울이 되어 창공을 머금고 비행기가 땅으로 임한 조각난 하늘을 건너간다. 알폰소 쿠아론은 그렇게 “이 영화가 당신을 씻어내리도록 그냥 허락하세요”라고 권고한다. 동시에 희로애락이 출렁이는 개인의 삶 바깥에는 언제나 거대한 세계가 초연히 운동하고 있음을 말한다.



12/13



알폰소 쿠아론 감독은 <칠드런 오브 맨>(2006)을 마무리한 시점에 생후 9개월부터 본인을 키우고 가족을 돌본 여성 리보에 대한 영화를 만들기로 결심했다. <로마>는 감독의 유년기를 재현한 영화지만 일인칭 회고록이 아니다. 깊이 사랑하고 사랑받았지만 어렸기에 그 사랑을 당연시하고 나의 필요를 채워주는 편한 존재로만 바라보았던 아이가 중년의 예술가로 성장해 예술의 힘으로 시간을 건너고 “그때 미처 보지 못했던 당신의 모습”을 재현하려는 경건한 시도다. 감독의 전작 대부분을 찍은 파트너 에마누엘 루베스키 촬영감독이 막판에 스케줄이 겹쳐 하차했다지만, <로마>는 쿠아론이 직접 촬영했다는 사실이 마땅하다 못해 필수적인 작품으로 보인다. (쿠아론은 각본, 공동편집, 제작을 맡았고 갈로 올리바레스 촬영기사의 도움을 받았다. 루베스키를 대체할 촬영감독을 고려했으나 모국어로 커뮤니케이션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프로젝트라고 판단해 스스로 카메라를 들었다.) <로마>에서 감독 본인은 캐릭터가 아니라 카메라의 시선으로 현존한다. 50대의 쿠아론은 어린 자신이 몰랐던 클레오의 휴일과 일을 마친 다음의 밤 시간, 말하지 못한 슬픔을 지켜본다. 논리적 귀결로 <로마>는 노스탤지어를 부르는 고전적인 필름 룩을 배제하고, 알렉사 65mm의 쨍하고 샤프한 ‘2010년대스러운’ 디지털 흑백 이미지를 선택했다. 색보정 후반작업 역시 같은 노선을 취했다. 요컨대 <로마>는 현재의 태도로 기억하는 과거다. 쿠아론은 지혜롭게도 시각적으로 감상과 주관을 멀리 하는 동시에 극사실적 사운드 믹싱으로 몰입을 유도한다. 프레임 안에선 보이지 않는 시간여행자 쿠아론을 대신하듯, 극중 소년은 “내가 늙었을 때 뱃사람이었어. 그런데 큰 파도에 휩쓸렸어”라는 예언처럼 알쏭달쏭한 말을 클레오에게 던진다. <로마>의 쿠아론은 시곗바늘을 되감는다. 전작 <해리 포터와 아즈카반의 죄수>(2004)의 마녀 헤르미온느처럼.



12/14



<로마>의 한 대목에서 클레오는 아이들이 위험에 처하자 헤엄도 칠 줄 모르면서 바다로 감연히 걸어 들어간다. 간신히 두 아이를 건져 모래사장으로 나온 클레오를 자신의 네 아이와 얼싸안은 소피아(마리나 데 타비라)는 “우리는 너를 아주 많이 사랑해”라고 속삭인다. 적잖은 관객은 <로마>가 중산층 백인 남성 아티스트가 유색인 노동자를, 계급적 갈등과 개인적 욕망을 사상한 채 아낌없이 주는 성자로 미화한 영화가 아닐까 의심한다. 유효한 지적이지만 클레오를 오직 억압의 대상으로 그리는 것이 그의 삶을 가장 존중하는 태도라고 확신할 수도 없다. 적어도 쿠아론은 가족이면서도 가족이 아닌 1970년대 멕시코 가내 노동자의 모호한 지위를 냉정히 묘사한다. 클레오는 가사노동뿐 아니라 4남매에게 부모가 해야 할 일도 대신한다. 아침이면 노래를 불러 깨우고 밤에는 사랑한다 말하며 재운다. 소피아와 그의 어머니 테레사 역시 클레오가 임신한 사실을 털어놓자 두말없이 검진과 출산 준비를 돕는다. 그러나 현재의 눈으로 과거를 돌아보는 <로마>는 계층 사이의 엄연한 벽도 못지않게 보여준다. TV를 보는 주인 가족에게 간식을 가져다준 클레오는 자연스레 거실 바닥에 앉아 함께 쇼를 시청하며 웃지만, 남편의 차를 준비하라는 소피아의 지시에 곧장 일어선다. 클레오를 산부인과에 데려간 테레사는 원무과 직원의 물음에 클레오의 생일도 나이도 대답하지 못한다. 같은 병원에 의사로 근무하는 고용주 안토니오는 클레오를 격려하지만 막상 분만실까지 동석하겠느냐는 동료 의사의 제의에는 뒷걸음친다. 남편의 외도로 홀로 남겨진 소피아와 애인에게 버림받은 클레오는 무책임한 남자들의 빈자리에서 아이를 지키는 입장을 공유하고 교감한다. 그러나 계급과 문화 차이로 말미암아 두 여자가 터놓고 대화하는 상황은 오지 않는다.



12/15



자전적 영화는 대개 감독의 커리어 초기에 만들어진다. 명성을 굳힌 감독이라도 <로마>처럼 사적인 프로젝트는 저예산 예술영화의 조건으로 제작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로마>는 거대한 수익과 오스카 수상을 포함한 비평적 성과를 올린 <그래비티>(2013) 다음에 만든 영화다. 그러니까 감독이 동원할 수 있는 자본과 자원이 정점인 시점에 제작한 셈이다. 블록버스터급은 아니지만 필름메이커로서 축적한 역량과 신용도를 활용한 <로마>는 이례적으로 프로덕션 가치(production value)가 높은 자전적 영화다. 일단 쿠아론은 <로마>를 어떤 전작보다 오래 찍었고 배우들에게 당일 촬영분 시나리오만 제공하면서 시간 순서대로 촬영하길 고집했다. <칠드런 오브 맨> <그래비티> <이투마마> 등 쿠아론의 영화에는 입이 떡 벌어지는 영화적 기교를 파가니니의 카덴차처럼 전시하는 장면이 있다. 하지만 <로마>의 촬영과 블로킹, 미장센과 후반작업에 투여된 명인적 기교는 너무나 빈번하고 은근해서 가진 자의 여유라고밖에 표현할 길이 없다. 예컨대 머릿속에 집의 평면도를 그릴 수 있을 만큼 선명한 공간 연출이 아니었다면, 가족을 등진 아버지 안토니오가 책장을 빼낸 다음 이어지는 거실 숏에 식구들과 동시에 관객이 시각적 충격을 받을 수는 없었을 터다. 안토니오의 마초적 자아를 대변하는 대형 세단의 극적인 쓰임새, 부모의 긴장을 무의식적으로 감지한 아이들이 깨뜨리는 유리창, 요가 달인의 자세를 유일하게 수월히 따라하는 클레오의 평정은, 가장 작은 단면으로 큰 이야기를 전하는 영화적 제유법의 사례다.



입이 떡 벌어지는 무빙 롱테이크는 쿠아론 영화에서 예삿일이다. 다만 <로마>에서 그것들은 항상 정의하기 어려운 깊은 감흥으로 마무리된다. 식구들의 잠자리 시중을 마치고 1층으로 내려와 전깃불을 하나씩 끄는 클레오를 따라가는 360도 패닝 숏은 스위치를 다 내린 후에야 자기 목을 축일 물을 뜨는 클레오의 이미지로 끝난다. 이어 영화는 전기를 아끼기 위해 촛불만 밝힌 가정부 숙소로 건너간다. 잘 구성된 노래를 듣는 듯한 흐름이다. <할리우드 리포터>의 <비하인드 더 스크린> 팟캐스트 인터뷰에서 알폰소 쿠아론 감독은 <로마>를 연출하는 동안 “모든 프레임은 한치 한치 정보로 가득 차 있어야 한다”는, 완벽주의 풍경사진가 안셀 애덤스의 방법론을 염두에 뒀다고 밝혔다. 과연 쿠아론은 정사진에 관한 애덤스의 명제를 움직이는 카메라와 피사체를 갖고 수행한다. 지진과 화재, 대규모 시위 장면이 등장하는 <로마>에는 어떤 전쟁영화 못지 않게 많은 군중 신이 들어 있다. 브뤼헐의 풍속화를 방불케 하는 크리스마스 시퀀스는 프레스코 벽화 같은 스펙터클 안에서 계급으로 구분되는 인물들의 동선을 가려낸다. 임신 사실을 알고 도망간 애인을 클레오가 찾아간 장면의 벌판에는 알바레스 대통령의 공적을 찬양하는 선전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가난한 사람들이 오간다. 이 복잡한 광경 뒤로 무엇을 기념하는지 모를 대포가 발사된다. 클레오의 동선을 따르는 관객의 시선과 원경의 대포가 스크린에서 교차할 즈음 정확히 포탄이 발사된다. 앞서 묘사한 바다 장면의 기나긴 테이크에서는 온 가족이 포옹하는 순간 오차 없이 정수리 뒤에서 햇살이 부서진다. 마법 같은 숏들이다. 꼼꼼히 준비한 조명과 블로킹의 수십 테이크를 거치기도 했으나, 쿠아론은 후반작업에서 모든 레이어의 노출을 조정하고 로토스코핑(부분적으로 매트를 만들어 다른 테이크의 요소를 집어넣는 기법)도 마다하지 않았다. (안셀 애덤스는 사진은 찍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이라는 말도 남겼다.) <로마>는 1970년대 초 멕시코 사회의 격동을 직시하되 클레오가 체감한 만큼 프레임 안에 들인다. 우리는 감히 그릴 수 없는 두려운 부피의 이야기를 4:3 비율의 좁은 프레임으로 서술한 <엘리펀트>와 <사울의 아들>을 안다. 반대로 내밀한 스토리를 와이드스크린에 펼친 작품들도. 거기에 관점의 전환이나 역설이 있다면 <로마>는 훌륭한 협주곡처럼 오케스트라로 독주를 휘감는다. (다음에 계속)



<버드 박스>

좋아요



서바이버



지난 12월 21일 공개된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버드 박스>는 <콰이어트 플레이스>의 시각 버전이라는 표현이 적합한 종말 스릴러다. 갑자기 세상을 뒤덮은 악령은 신화 속 메두사처럼 그를 보는 사람들을 자살로 몰고 가고, 따라서 생존자들은 눈을 가린 채 역경과 싸워야 한다. <버드 박스>는 평준화된 장르물이지만 주인공 말로리 역의 샌드라 블럭만큼은 치하할 만하다. 출산을 고대하지 않는 산모였던 말로리는 5년 후 두 아이와 살기 위한 마지막 모험을 감행한다. 언제 잃을지 모르는 아이들에게 이름조차 지어주지 않는 그는 서바이벌 기술의 교육으로 애정을 표하는 보호자이자 공평무사한 리더다. 철저한 실용주의자이면서도 이기주의와 거리가 먼 인물 말로리의 초상을, 샌드라 블럭은 <그래비티>에서조차 드러났던 배우 특유의 위트를 완전히 제거한 냉연한 연기로 표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