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배우 유태오의 <레토> 포토 코멘터리
2019-01-03
글·사진 : 유태오 (배우)
정리 : 이화정
청춘이 거기에 있었다

한국 배우가 러시아영화에서 러시아의 영웅 빅토르 최를 연기한다. 공연 장면을 촬영하는 동안 “러시아 사람들이 마치 네가 우리의 김광석을 잘하나 보자(웃음)” 하고 주시하는 듯한 시선을 느꼈다는 배우 유태오의 말이 과장처럼 들리지 않는다. 빅토르 최를 모티브로 한때 그의 연인이던 나탈리아 나우멘코의 회고록을 바탕으로 만든 <레토>는 ‘영웅 빅토르 최’가 아닌 당시 억압된 사회에서 음악을 통해 자유를 꿈꾸던 ‘청년 빅토르 최’의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제작 소식이 전해지자 러시아 전역에서 빅토르 최 역할에 캐스팅되고자 오디션이라도 한번 보려는 배우들의 요청이 끊이지 않았지만, 2000:1의 경쟁을 뚫고 행운을 잡은 건 한국 배우 유태오다. 자기 집 차고에서 오디션 영상을 만들어 러시아로 보내고, 촬영을 위해 혼자 러시아로 가고, 영화를 만든 키릴 세레브렌니코프 감독이 촬영 중 구속돼 촬영이 중단되기도 했고(공금횡령이 명목인데, 러시아와 세계 각국의 영화인은 창작자에 대한 압박으로 보고 지지와 구명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편집자), 이후 힘을 내고 뜻을 모아 완성한 영화가 칸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돼 호평받기까지. <레토>는 유태오를 세계 영화인들에게 알리고 그의 배우 필모그래피를 바꾼 엄청난 작품이지만, 영화가 제작되는 1년 반의 여정은 지금의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불투명한 상황의 연속이었다. 유태오에게 <레토>는 그간 <여배우들>(2009)을 시작으로 한국뿐만 아니라 할리우드(<이퀄스>(2015), <서울 서칭>(2015)), 베트남(<비트코인 하이스트>(2016)), 타이(<더 모먼트>(2017)) 등 현장이, 배역이 있는 곳은 어디든 문을 두드리고 찾아가서 연기해온 유태오의 여러 작업 중 하나다. 낯선 현장, 낯선 언어를 쓰는 상황에서 연기하는 어려움, 영화를 만들고자 하는 의지를 가진 전세계 ‘친구’들과의 만남은 이번에도 어느 하나 다르지 않았다. 그렇게 함께한 또 하나의 작업. 유태오의 스마트폰 용량 대부분을 차지하는 건 <레토> 현장에서 찍은 사진, 그리고 함께 일한 배우와 스탭들이 보내준 현장 사진과 영상이다. “제가 가지고 있는 현장 사진을 <씨네21> 독자들과 함께 보면 좋지 않을까요?” 유태오가 먼저 제안했다. 저장된 비하인드 신의 공개, 포토 코멘터리는 그렇게 시작됐다.

키릴 세레브렌니코프 감독이 찾던 배우는 “빅토르 최와 영혼이 닮은 배우”였다. 실제 러시아의 영웅이었고 한 시대를 상징하는 인물. 그 인물을 연기한다는 것은 내게 큰 부담이었다. 빅토르 최에 관한 것이라면 도서, 음반, 음악 모든 것을 찾고 흡수하고 받아들이려 노력했다. 특히 내가 꼭 가고 싶었던 곳이 두곳 있었는데, 한곳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빅토르 최의 무덤이었고, 또 한곳은 빅토르 최 추모벽이 있는 모스크바의 아르바트 거리였다. 무덤은 촬영에 앞서 찾아갔는데, 추모벽은 촬영이 한참 진행될 때까지 찾아갈 짬을 내지 못했었다. 그사이 감독님이 구금되었다. 마무리 촬영이 한창이던 2017년 12월, 빅토르 최의 추모벽이 있는 아르바트 거리를 찾았다. 촬영을 시작하고 처음으로 자유 시간이 주어진 날이었는데, 제일 먼저 그곳에 가고 싶더라. 기념관 한쪽에 빅토르 최 팬들이 가져다놓은 꽃, 담배, 술 등이 가득했다. 한 무리의 팬들이 와서 기념촬영을 하는 동안 나도 그를 그 자리에서 추모했다. 굉장히 인상적인 시간이었고,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키릴 세레브렌니코프 감독님이 구금되기 전, 영화 <레토> 촬영 현장에서 디렉션을 하는 모습이다. 감독님은 칸국제영화제에 초청된 전작 <스튜던트>(2016)를 비롯해 영화 연출도 꾸준히 하셨지만, 러시아에서 고골센터라는 극장을 운영하며 배우들을 양성하고 연극 작업도 많이 하신다. <레토>에 구현된 일반 영화와 구별되는 연극적 요소는 감독님이 연극과 영화를 창의적으로 접목한 결과다. 또 리허설 때는 마치 연극 연습을 하듯 배우들의 동선을 맞춰보고, 다른 영화 현장과 다른 방법으로 배우들의 연기를 끌어내곤 하셨다. 그렇게 연기 지도를 하는 한편, 촬영 현장에 긴장감이 돌면 감독님이 나서서 배우들을 다독거리곤 하셨다. 현장에 활력을 불어넣는 감독님의 모습이 더없이 인상적이었다.

촬영 내내 호텔 방 벽에 붙여놓았던 <레토>의 시나리오 분석 메모들. 러시아어로 된 대본을 마스터하는 것은 빅토르 최를 연기하기 위한 기본 과제였다. 러시아어 대본을 코치해줄 선생님에게 촬영 전부터 러시아어 강습을 받았다. 처음 접하는 언어. 신을 쪼개서 대사로 나누고, 대사를 한 문장 한 문장 나누고, 문장을 단어로, 단어를 음절로 나눠서 외웠다. 틈날 때마다 메모를 보며, 입에 붙을 때까지 대사를 외운 기억이 난다. 대사를 다 외웠다고 해도 현장에서 대사가 바뀌는 일도 적지 않았다. 그러면 또 새로 외우는 과정의 반복이었다. 매일매일 치열하게 연습한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때의 흔적이 이 메모에 가득하다.

영화에 실제 빅토르 최와의 접점이 있었다. 바로 빅토르 최의 트레이드마크 중 하나인 기타다. 보통 기타가 5줄인데 반해 빅토르 최는 12줄 기타를 썼기 때문에 나는 촬영 내내 그 기타를 익히기 위해 자주 연습했다. 요즘 장비로 얻는 소리와 완전히 다른 사운드라 당시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옛날 장비를 찾고 복원하고 조율하는 과정을 거쳤다. 심지어 그들이 녹음하고 노래했던 레닌그라드의 분위기를 재현하기 위해 몇곡은 일부러 퀄리티를 낮춰 녹음하기도 했다. 기타 연주뿐 아니라 노래도 문제였다. 3곡을 부르면 된다는 애초의 주문과 달리 막상 현장에서는 총 9곡(!)의 노래를 부르라는 과제가 떨어졌다. 그것도 러시아어로. 짧은 시간에 기타와 노래를 익혀야 하는 상황이었고 연습 또 연습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러시아와 한국. 국적은 달랐지만 어려운 조건에서도 영화를 만들고자 하는 배우들의 마음은 똑같았다. 특히 배우들이 비슷한 또래라 촬영하는 동안 많이 친해졌다. 빅토르 최와 음악적인 생각을 나누던 멘토 마이크 역의 배우 로만 발릭은 전문 배우가 아니라 러시아에서 유명한 로커로, 연기뿐만 아니라 우리 영화의 음악 작업에 참여하기도 했다. 연기는 처음이라 연기적인 부분은 현장 경험이 있는 내게 묻고 의지하기도 했다. 처음엔 “슛 들어간다”는 간단한 러시아말도 몰라 눈치를 보던 나도, 그들에게 하나하나 배우며 파악해나갔다. 그렇게 서로 모자란 부분을 도와주면서 촬영했다. 내내 활기차고 기분 좋게 촬영한 기억이 난다. 키릴 세레브렌니코프 감독님은 물론이고 함께 촬영한 배우 모두 참 고마웠다.

극중 밴드 ‘키노’의 멤버인 필립 아브디브 배우와 현장에서 담소를 나누는 모습이다. 촬영 현장에서 가장 가까웠던 배우이기도 하고 마음이 많이 가는 동료다. 연기와 음악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 좋은 에너지를 주고받았다. 사실 우리 영화에서 음악적 동지로 나오는 배우 중 상당수가 지금 러시아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젊은 뮤지션 혹은 포토그래퍼, 아트디렉터 등 러시아의 새로운 문화를 이끄는 아티스트라 이들과 함께 있는 현장은 항상 크리에이티브한 기운이 넘쳤다.

바쁜 촬영 중에도 나는 종종 눈을 감고 다음 신을 준비하곤 했다. 어울리기 좋아하는 러시아 배우들이 함께 회식을 제안하기도 했지만 아쉽게도 모두 거절해야 했다. 그들처럼 언어가 자유롭지 않으니 그들보다 몇배의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매일 주어진 러시아어와 노래, 연주를 마스터해야 했고 한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는 상황이었다. 집중하며 에너지를 모아 매 장면 빅토르 최를 밀도 있게 담아내고 싶었다.

레닌그라드의 록 클럽에서 촬영하던 날 찍은 비하인드 컷이다. 영화 촬영 초반이었고, 로케이션 문제 때문에 크랭크인 후 촬영 2회차 때 공연 신을 모두 찍어야 했다. 러시아인의 영웅이자 가슴속에 살아 있는 아이콘을, 한국에서 온 낯선 배우가 연기한다고 하니, 다들 ‘얼마나 잘하나’ 하고 지켜보고 있을 텐데, 그 생각을 하니 식은땀이 났다. 떨림, 긴장, 설렘 등 내 모든 감정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사진이다.

영화 속에서 빅토르 최가 마지막으로 연주하는 장면이다. 개인적으로 영화에서 가장 좋아하는 스틸이 이 장면이고, 모든 스탭이 만족스러워한 장면이기도 하다. 연주할 때 350명가량의 엑스트라 배우들이 앞에 있었는데 기분이 묘했다. 촬영이 끝나고 감독님이 나를 꽉 안아주더라.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라 생각하니 그간 고생하며 촬영했던 때가 주마등처럼 지나가며 아쉽기도 하고 만감이 교차했다.

<레토>에는 당시의 현실을 재현한 장면뿐만 아니라 현실을 벗어난 초현실적 장면, 뮤직비디오를 연상할 수 있는 장면 등 내러티브에서 벗어난 실험적인 장면이 많다. 이 장면도 영화에 등장하는 초현실적 장면 중 하나다. 당시 서구에서 밀수되어 러시아에 들어왔던 앨범 커버 사진을 재현하는 내용인데, 이리나 스타르셴바움과 함께 존 레넌과 오노 요코의 사진을 재연했다. 빅토르 최와 친구들이 사랑하고 열광했던 레드 제플린, 데이비드 보위, 이기 팝, 토킹 헤즈 등 수많은 뮤지션의 음악과 그들을 모티브로 한 숨은 코드가 영화 곳곳에 있고, 우리도 그 모습을 재연하며 촬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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