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씨와 하녀의 로맨스가 만든 결과라기엔 너무도 섬뜩한 풍경이 <리지>의 문을 연다. 고즈넉한 정원의 빛 너머로 집 안에는 도끼로 짓이긴 두구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다. <리지>는 1892년 미국 매사추세츠주의 한 대저택에서 실제로 일어난 살인사건을 다룬 영화다. 대지주 보든가의 상속녀 리지(클로에 세비니)가 자신의 아버지와 계모를 살해했다는 결말을 먼저 제시한 다음, 그 전말을 향해 거슬러 올라가는 방식이다. 영화는 사건이 일어나기 얼마 전에 들어온 하녀 브리짓(크리스틴 스튜어트)과 리지의 관계가 난폭한 살해의 동력이라고 본다.
<리지>의 서사는 감춰진 진실을 발견하는 놀라움과는 거리가 멀다. 후반부로 갈수록 스릴은 증발하고, 두 사람 사이의 애틋한 감정이 그 자리를 채운다. 그러나 영화의 흐름과 별개로 관객에게는 이 심리 스릴러의 배경 무대가 되는 19세기 말 미국 남부의 이면을 상상하는 오싹한 즐거움이 허락된다. 소피아 코폴라 감독의 <매혹당한 사람들>(2017)처럼 탐욕과 광기, 날 선 불안이 음침하게 뒤섞인 남부 고딕 소설의 정서가 유효한 영화다. 소작농을 착취하고 하녀 브리짓을 강간하는 포악한 남성상인 아버지 보든(제이미 셰리던)이 응징당하는 방식, 간질을 앓는 상속녀가 계모와 외삼촌에게 느끼는 위협, 그리고 리지를 통해 글을 깨우치는 브리짓의 입장 등 인물별로 제각기 더 살펴보고 싶은 여백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