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분 같아서는 <아쿠아맨>보다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 이야기를 하고 싶다.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는 지난 10년 동안 나온 할리우드 슈퍼히어로영화 중 최고작일 뿐만 아니라 그동안 수없이 쏟아져 나온, 같은 유니버스에 갇힌 비슷비슷하고 둔중한 코믹북을 각색한 할리우드영화들이 지금까지 어떤 즐거움을 놓치고 있었는지 발랄하고 경쾌하게 정곡을 찌르며 보여주는 작품이기도 하다. 하지만 기분이 그렇다고 해서 고객의 요청을 멋대로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큰 그림에 무심한, 유니버스 속 성공작들
제임스 완의 <아쿠아맨>은 DCEU에 속해 있다. 이는 ‘The DC Extended Universe’의 약자로,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DC 확장 유니버스라고 번역한다. 매스컴에서는 DCEU가 MCU, 그러니까 ‘Marvel Cinematic Universe’의 라이벌이라고 생각한다. 두 진영의 팬들에게 할리우드는 이 두 세력이 싸움을 벌이는 전쟁터다. 이렇게 보았을 때 지금 이기고 있는 쪽은 MCU인데, 보다 안정적으로 시네마틱 유니버스를 구축했고 히트작도 많기 때문이다. DCEU 진영은 조금 다급한 처지인데 얼마 전 선보인 <원더우먼>의 흥행 성적과 평판이 좋았고, <아쿠아맨>은 상당한 히트를 기록하는 중이라 한시름 놓았다고 할 수 있다. 이들 유니버스를 묶는 <저스티스 리그>(2017)는 큰 재미를 못 보았지만.
마치 종군기자의 기사를 영혼 없이 요약한 것 같은 위 내용은 나에게 별 의미가 없다. DCEU의 영화들이 MCU의 거울상이 되어 프로레슬러처럼 붙는다고 세상이나 할리우드가 특별히 더 재미있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중요한 건 개별 영화가 얼마나 재미있고 자기만의 개성을 담고 있느냐 하는 점이다. 이런 면에서 보았을 때 코믹북을 원작으로 한 이런 시네마틱 유니버스는 개별 영화에 그다지 크게 기여하지 못한다. 각 캐릭터의 개성과 그들이 속해 있는 환경을 죽여버리고 결국 비슷비슷하고 밋밋한 연속극의 흐름 속에 가두어버린다.
양쪽 진영의 영화 중 성과가 좋은 작품은 자신이 속해 있는 보다 큰 유니버스를 그렇게 심각하게 인식하지 않는 작품이다. 최근 예로는 <블랙팬서>(2018)가 있다. 이 작품은 이들을 연결하고 있는 더 큰 이야기를 적당히 무시하고 볼 때 더 좋아 보인다. 그렇다면 안정된 유니버스를 구축하지 못한 것이 DCEU의 큰 결점이긴 한가 생각해보는 것이다. 앞으로 나올 영화들의 감독과 작가진의 개성이 비교적 뚜렷한 편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원더우먼>이 그랬던 것처럼 <아쿠아맨>도 큰 그림엔 무관심하다. <저스티스 리그>를 본 관객이라면 캐릭터 설정에 대해 이해가 좀더 빠를 수도 있지만 그래 봤자 몇초일 뿐이다. 처음부터 흔해빠진 이야기를 하는 영화다. 정당한 왕위의 계승자인 남자주인공이 자신의 자리를 차지하거나 지키기 위해 피터지게 싸우는. 심지어 길 건너 MCU에서도 몇 개월 전에 비슷한 일이 있었다. <블랙팬서>와 <아쿠아맨>의 세계와 갈등은 지루할 정도로 닮았다. 우리의 몇십배는 되는 과학 기술을 갖고 있지만 지도자는 몸싸움으로 뽑는 문명권 이야기다.
<아쿠아맨>의 아틀란티스는 <블랙팬서>의 와칸다보다 더 믿을 수 없는 곳이다. 가장 큰 이유는 이 영화의 액션 대부분이 물속에서 진행된다는 데 있다. 이 영화의 바닷속은 단 한순간도 진짜 바다처럼 보이지 않는다. 어떤 비평가는 이 영화가 CGI 오브젝트들이 떠다니는 아쿠아리움 같다고 말했다가 SNS에서 놀림감이 되었는데,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그건 나름 정확한 기술이 아니었나?
물론 이건 제임스 완의 잘못이 아니다. 실제 바닷물을 물리법칙에 맞추어 정확히 그리면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 이미 보여준 1980년대 걸작 영화가 있기 때문이다. 궁금한 분들은 유튜브에서 ‘top secret underwater fight scene’을 검색해보라. 타협은 피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맥이 좀 풀릴 수밖에 없다. 물속에서 벌어지는 액션이 임의로 진행된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아쿠아맨>의 액션은 물속에 있을 때보다 물 위나 물 밖에 있을 때 더 재미있다. 그때도 물리법칙을 마구 위반하는 건 마찬가지이긴 한데, 그래도 물속에서 만큼 대놓고 그러지는 않는다.
<아쿠아맨>이란 제목을 단 영화에서 가장 약한 액션 장면이 수중 액션이라면 이를 어쩐다? 그런데 이게 의외로 큰 단점은 아니다. <아쿠아맨>에서 가장 재미있는 부분은 이 영화가 프랜차이즈가 던져준 기본 설정에서 벗어날 때 더 재미있다는 것이다. 영화의 거의 모든 부분이 그렇다.
예를 들어 이 영화의 이야기는 슈퍼히어로와 빌런의 대결이라는 구조를 띠는 것처럼 보이지만 최종 보스와의 대결은 그렇게까지 중요하지는 않다. 그랬다면 문제였을 것이다. 이 영화의 최종 악당 옴 왕은 따분하기 짝이 없는 백인 남자 이상도 이하도 아니기 때문에. 대신 영화는 최종 보스를 쓰러뜨리기 위한 아이템을 얻는 과정에 더 집중하는데, 그 여정을 이루는 각각의 챕터는 그리스 신화, 아서왕 전설, 헨리 라이더 해거드, H. P. 러브크래프트, 에드거 라이스 버로스, 로버트 E. 하워드의 이야기에서 이것저것 잘라 끼워 맞춘 것 같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반에 이르는 영어권 펄프 문학 서사의 잡탕인 것이다.
러브크래프트스럽고 또한 해거드스럽고
코믹북 슈퍼히어로는 대부분 펄프 문학의 영향을 받았으니 그 자체는 신기할 게 없지만 영화 <아쿠아맨>은 이들의 기원을 포기하지 않는다. 러브크래프트스러울 때는 러브크래프트스럽고, 해거드스러울 때는 해거드스럽다. 물속에서 숨쉬는 사람이 주인공이어야 한다는 점을 제외하면 주인공이 슈퍼히어로가 아니어도 괜찮은 챕터들이 종종 이어진다. 그리고 이 영화의 가장 좋은 부분인 <에이리언>을 연상시키는 호러 파트는 장르적 성격을 고려하면 슈퍼히어로 이야기 성향을 오히려 배척한다.
<아쿠아맨>의 이 잡다한 성격은 영화의 ‘완성도’를 꾸준히 갉아먹는다. 하지만 그 때문에 영화가 재미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아쿠아맨>에는 영화가 정통 슈퍼히어로물의 이야기와 논리를 추구했다면 없었을 재미가 있다. 익숙한 이야기지만 슈퍼히어로영화의 틀 안에 들어가서 이를 꾸준히 배반하거나 무시하는 과정에서 불균질한 재미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 결과물은 늘 흥분하게 하지는 않지만 의외로 다채로운 무언가다. 그리고 이 다채로움은 종종 영화가 대놓고 소스로 삼았던 원전을 즐겁게 배반한다. 예를 들어 많은 이들이 지적하듯 이 영화는 러브크래프트를 대놓고 인용하지만 (심지어 책까지 한권 잘 보이는 곳에 던져놨으니 평론가들만 볼 수 있는 비밀도 아니다) 이 백인우월주의자이자 성차별주의자였던 작가의 공포를 밝은 곳으로 끄집어내 의미를 정반대로 뒤집어버린다.
DCEU가 어느 방향으로 갈지는 나는 알 수 없고 관심도 크게 가지 않는다. 하지만 제임스 완이 <아쿠아맨>으로 제시한 다채로움의 가능성은 앞으로 나올 영화들에 하나의 유익한 표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굳이 슈퍼히어로 이야기일 필요도 없다. 굳이 프랜차이즈가 제시하는 길을 따를 필요도 없다. 재미있어 보이는 길이 있다면 계산 없이 가보자. 그게 큰 그림을 그리는 물밑 작업에 방해가 된다면? 그래서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