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슬러 올라가보자. 쓰마부키 사토시에게서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2003)의 츠네오가 보여준 그 찬란한 웃음을 거둔다는 것. 그건 그렇게 단순한 변신의 문제는 아니었을 것이다. ‘청춘의 아이콘’으로 굳건한 자리를 내주고 새로운 장을 맞으려는 시도 이후 사토시는 <악인>(2010)과 <분노>(2016) 등에서 보여준 자신의 ‘반전’을 통해 성공적으로 그 가능성을 입증해냈다. <우행록: 어리석은 자의 기록>은 그 궤도에 오른 쓰마부키 사토시 연기의 활용편이다. 일가족 살인사건의 전말을 캐기 위해 나서는 주간지 기자 그리고 한편으로는 욕망의 희생양이 된 여동생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오빠. 두 얼굴의 급격한 변화가 아닌, 미동 없는 냉소적인 표정 하나만으로 쓰마부키는 주인공 다나카가 가진 두 가지 내면을 동시에 보여준다. 공식적으로 9년 만의 한국 방문인 쓰마부키 사토시를 단독 인터뷰했다. “부러 더 했다”는 구레나룻보다 쓰마부키의 변화를 실감케 하는 것은 그의 연기를 더 안정적으로 만들어줄, 한층 깊어진 목소리였다.
-누쿠이 도쿠로의 동명 소설을 바탕으로 한다. 어떤 점이 매력으로 다가오던가.
=원작 소설을 읽었을 때는 인터뷰 형식으로 진행되는 소설 형식이 신선했다. 스토리가 앞으로 전진한다는 느낌보다 등장인물들의 발자국이 과거로 되돌아가는 전개가 흥미로웠다. 또 사람들이 머릿속으로 그리는 상대방의 이미지가 이렇게 쉽고 간단하게 자신의 시각으로 규정된다는 사실이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이누도 잇신, 이상일, 야마다 요지 등 일본영화의 색깔을 규정할 수 있는 감독들과 작업하는 한편으로 새로운 연출자와의 협업도 엿보인다. 이시카와 게이 감독과의 작업은 어땠나.
=이시카와 감독은 신인감독이라 일본에서도 아직 잘 알려지지 않은 감독이다. 유럽에서 공부하고, 주목도 받았다. ‘오피스 기타노’(기타노 다케시가 운영하는 제작사.-편집자)에서 재미있는 감독이 있다고 소개해줬는데 단편을 보니 흥미가 생기더라. 일본에서 활동해온 감독들에게서 보지 못한 독특한 이미지를 느꼈다.
-일가족 살인사건을 취재하러 다니는 주간지 기자 다나카는 원작에서는 이야기를 듣는 존재일 뿐 구체적으로 행동이 묘사되지 않아 영화에서 완전히 새로 동작과 표정을 만들어야 했다.
=다나카는 실체가 있는 역할이 아니다보니 캐릭터에 이미지를 부여하는 데 고생했다. 원작 소설이 있는 작품을 했는데도 이번처럼 뚜렷하게 잡히지 않은 건 처음이었다. 캐릭터가 너무 확실히 드러나면 스토리를 방해하는 것 같고, 너무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으면 인상이 남지 않으니, 어떻게 완급조절을 할지 고민이 컸다.
-그 방법론으로 구체화시켰던 지점들이 있다면.
=다나카가 각각의 사람을 인터뷰할 때, 그 등장인물의 족적을 따라갈 때 조금씩 반응을 달리하면서 그런 인상을 보여주려 했다. 특히 첫 장면에서 버스 좌석에 앉아 있다가, 다른 승객이 “노인에게 자리를 양보하라”고 할 때 다리가 불편한 척해 지적한 사람을 곤욕스럽게 하는 장면은 원작에는 없었다. 그런 행동 하나로 다나카가 어떤 사람인지 각인될 것 같아서 감독님과 얘기를 많이 했다.
-<유주얼 서스펙트>가 연상되는, 이중적인 속성을 가진 다나카 캐릭터를 규정하는 인상적인 장면이었다.
=‘다리가 불편하다’는 것 말고는 상대의 반응도 없었고, 자세한 지시도 대본에 없었다. 그런데 다나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감독님과 이야기하다보니 이미지가 잡히더라. 그 장면을 크랭크인한 첫 날에 촬영했는데 찍고 나니 다나카라는 인물에 좀더 다가간 느낌이었다. 뒷이야기를 더하자면 이 장면을 첫 장면에 넣을지, 중간에 넣을지 감독님이 편집 막바지까지 상당히 고심했다.
-표현 방식은 다르지만 캐릭터가 가진 어둠의 정도로 보자면 <악인>(2010), <분노>(2016) 등 일련의 작업 속 인물들을 떠올리게 된다.
=<악인>을 하기 전의 내 연기 스타일을 돌아보면 ‘이런 스타일로 말할거고, 이런 자세로 있을 거다’같이 내 안에서 어떤 플랜을 세워서 해 나가는 스타일이었다. <악인>을 하면서 그런 연기 방식을 완전히 뒤집었다. 나를 버리는 방향으로 전환했고, 머릿속으로 생각해서 연기하는 대신 그 캐릭터로 행동하려고 노력했다. 나를 완전히 역할에 몰아세우다 보니 한번 연기하면 그 역할에서 빠져나오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더라. <악인>을 끝내고 나서 2년 동안 그 분위기에서 빠져나오기 힘들어서 사람들과 만남도 힘들었다. 그래서 술도 많이 마셨다. (웃음) 이번 작품에서도 다나카라는 캐릭터에 완전히 몰입하겠다는 생각으로 작업에 임했다. 원래 내가 엄청 밝은 사람인데 밝지 않은 캐릭터를 연기하고 나를 그렇게 몰아붙인 거다. 그러다보니 사생활도 영향을 받았다. 어느 날 친구가 “너 정말 괜찮냐”라며 걱정하더라. (웃음)
-최근 한국을 방문한 이상일 감독이 “쓰마부키 사토시만 승낙한다면 나의 페르소나였으면 좋겠다”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감독님이 페르소나라는 말을 해준다면 그건 나한테 최고의 찬사다. 처음 <69 식스티나인>(2005)으로 인연을 맺었고, 지금은 사적으로도 일로도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상대이다. 감독님 덕분에 연기자로서 자세도 바뀌었다. 배우는 연출자가 원하는 것이 있다면 어떤 존재로도 바뀔 수 있다는 생각이 이상일 감독님과 작업하면서 한층 커졌다.
-스무살 청춘을 대변하는 이미지, 아이콘을 넘어 지금 39살의 자신의 클로즈업을 스스로 평가한다면.
=‘비교적 동안’이라는 말을 듣는데, 그런 말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려고 한다. 나이 든 연기도, 또 젊은 역할도 아직은 양쪽 다 할 수 있으니 좋은 거 아닐까.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상당히 멋진 일이라고 생각한다. 나이 드는 것에 무리해서 저항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한국의 송강호 배우도 예전에 비해서는 몸집이 불어났을 테지만 그런 부분도 멋스럽게 다가온다. 주름이 는다든지, 살이 찐다든지 그런 것들도 그대로 괜찮지 않을까. 결국 가지고 갈 것은 스스로를 속이지 않고 나아가는 것이다.
-최근 아사노 다다노부, 후쿠야마 마사하루 등이 자신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반영한 일상적인 드라마를 선택해 또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역시 다양한 도전에 대해 생각할 텐데.
=맞다. 선배 배우들이 이제 아버지 역할을 하고 있는데, 나로선 아버지 역할은 아직은 경험이 부족한 것 같다. 아이가 없다보니 그런 이미지가 아직 없지 않나 싶기도 하고. 한국에 왔다는 이유로 괜한 소리를 하는 게 아니라 한국이나 중국에서 작업하면서 내가 모르는 세계를 경험하고 싶다. 지난해 중국영화에 출연하면서 느낀 점이 일본영화와 작업 스타일이나 방법이 확연하게 다르다는 것이었다. 그런 면을 느끼고 싶다. 돌아보면 <악인>을 만나면서 차기작을 선택하는 방법도 바뀌었다. 그전까지 나는 일을 기다리는 스타일이었다면 지금은 내가 나서서 앞으로 전진하는 스타일이 되었다. 가장 큰 변화는 그래서 하고 싶은 일은, ‘이 일이 하고 싶다’라고 주장을 펼칠 수 있는 사람이 됐다는 거다. 같이 일하는 이들에게 나를 속이지 않는 사람이 되었고, 그렇게 한 작품 한 작품 진실히 대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