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M. 나이트 샤말란은 <글래스>에서 니체를 말하는가
2019-01-31
글 : 이용철 (영화평론가)
우리가 봐왔던 슈퍼히어로는 여기에 없다

※ 영화의 결말에 관한 중요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9년 만에 완성한 빅 픽처? 창작자들의 호기 어린 발언을 믿는 편은 아니다. 그런데 <언브레이커블>(2000), 그리고 앞서 나온 <식스 센스>(1999)를 다시 보면서 M. 나이트 샤말란이 시작부터 하나의 큰 그림을 그리고 있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언브레이커블>의 주인공은 데이비드(브루스 윌리스)인데, 영화는 이상하게도 엘리야(새뮤얼 L. 잭슨)가 태어난 순간으로 시작한다. 그의 어머니는 아마도 쉼터 같은 곳에 머물렀던 듯하며, 흑인 아기의 문제를 보살피러 온 의사도 흑인이다. 그는 세상 낮은 곳에서 태어났을 뿐만 아니라 비극적인 운명을 부여받았다. 부여받았다는 표현은 다소 이상하게 들리겠으나, 그가 (예언자의 이름에 어울리게) 이후 풀어나갈 사명을 생각하면 그 표현이 맞는 것 같다. 태어날 때부터 팔과 다리가 부러진 채 세상에 나와 평생 그 몸으로 살아야 하는 그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간단한 자막에 이어지는 오프닝 크레딧에서 성인 데이비드는 열차에 앉은 모습으로 처음 등장한다. 여자 승객이 곁에 앉자 그는 손에 낀 반지를 슬쩍 뺀다. 그리고 물을 싫어한다는 말과 함께 이런저런 농을 건다. 불편한 여자가 자리를 피한 뒤 데이비드는 다시 반지를 끼다 뭔가 수상한 낌새를 느낀다. 잠시 후 열차 탈선 사고가 일어나고, 그는 병실 유리 앞에 앉은 모습으로 다시 등장한다. <식스 센스>를 본 관객은 이 장면에서 그런 예상을 했을 법하다. 그는 아마 죽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자신은 그걸 모르고 있다고. 그런데 <언브레이커블>에서는 그가 살아 있음을 의사가 확인시켜주고, 승객 전원이 죽은 열차 탈선 사고에서 상처 하나 없이 살아난 그는 모든 사람의 주목을 받는다. <식스 센스>와 <언브레이커블>의 주인공을 연기한 배우는 브루스 윌리스다. <식스 센스>의 초반, 그가 연기한 말콤은 집에 침입한 괴한의 공격을 받아 현장에서 사망한다. <언브레이커블>의 도입부에서 일어난 사고 또한 누군가가 꾸민 사고였음이 영화 말미에서 밝혀진다. <언브레이커블>을 처음 보았을 당시에 열차 탈선 사고는, 악당 엘리야가 영웅 데이비드에게 (악의 특성상) 본능적으로 공격한다는 의미로 읽혔다. 이제 질문은 바뀌어야 한다. 엘리야는 과연 악당인가, 왜 말콤(브루스 윌리스)은 사고로 죽고 데이비드는 살아남는가.

장르 안에서 장르를 생각하다

<언브레이커블>이 등장했던 해에는 브라이언 싱어의 <엑스맨>(2000)이 먼저 선보였을 뿐, 아직 신경증에 걸린 슈퍼히어로 영화들- <엑스맨2>(2003), <배트맨 비긴즈>(2005), <수퍼맨 리턴즈>(2006)- 가 발표되기 전이었다. 스크린에서 만나는 슈퍼히어로는 고전적 영역에 머무르는 존재였다. <언브레이커블>의 데이비드도 다를 바 없었다. 평범했던 남자가 자신의 존재 이유를 자각한다는 점에서 남달랐으나, 그가 선택한 길은 슈퍼히어로의 정석이었다. <글래스>의 도입부에서 그는 여전히 그 길을 가고 있다. 겉으로는 ‘보안업체’를 운영하지만 어두운 밤거리를 배회하면서 악당들을 찾아내고 그들을 응징하는 일을 사명으로 여긴다. 그가 새롭게 응징하려는 대상 중 하나가 <23 아이덴티티>(2017)의 ‘패거리’다.

‘패거리’는 케빈이라는 청년의 몸속에 들어 있는 여러 자아 중 둘 혹은 셋을 일컫는다. <글래스>에 등장하는 데이비드와 엘리야처럼 케빈의 여러 자아는 극중 슈퍼히어로의 일종으로 취급받는다. 별로 이상한 일은 아니다. <언브레이커블> 이후 <23 아이덴티티>가 나오기까지 17년 동안 스크린 위의 슈퍼히어로는 다양한 모습으로 분화되었다. 슈퍼히어로 내부에서 싸움이 일어나고, 악당과 슈퍼히어로간의 경계는 흐릿해졌다. 케빈과 스물셋 혹은 스물네개의 자아는 그런 현상을 내면적으로 체화한 슈퍼히어로처럼 보인다. 하나의 몸 안에 묶여 있는 수십명의 자아는 갈등에 처한 근래의 슈퍼히어로 집단과 다름없으며, 악인지 선인지 분간할 수 없는 자아들은 <수어사이드 스쿼드>(2016), <데드풀>(2016)의 문제적 영웅상을 떠올리게 한다.

샤말란은 엘리야의 손을 빌려 고전적인 영웅으로 살아가던 데이비드가 케빈의 자아 중 ‘더 비스트’라는 야만적 존재와 대면하도록 이끈다. <글래스>의 도입부에서 데이비드는 ‘슈퍼맨’의 이름을 입에 올리며 악행을 일삼는 청년들을 응징한다. 슈퍼맨은 수많은 슈퍼히어로의 원형 같은 존재다. 샤말란은 그런 이름이 한낱 문제아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현실 상황을 비판하려는 것일까. 그럴듯하다. 언젠가부터 슈퍼히어로의 세상은 단순함과 순수성에서 이탈하기 시작했다. 보통 사람들을 구해주던 슈퍼히어로들이 자기 내면의 세계로 빠져드는가 하면, 하나둘씩 등장하다 거대한 집단을 구성한 슈퍼히어로 내부에서 균열이 일어나는 중이다. 영화를 보는 관객이 슈퍼히어로 집단에 대해 함께 고민하는 게 이상해 보이지 않는 세상이 되었다. 관계가 역전되었는데도 아무도 그것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2010년 이후 스크린에서 벌어진 슈퍼히어로의 폭발은 하나의 패션을 형성했다. 2000년에서 2010년 사이에 슈퍼히어로의 존재를 고민하는 철학적 영화들이 등장하더니, 2010년 이후엔 철학에서 이종 학문으로 세분화되는 과정을 거듭 거쳤다. 군집을 형성한 슈퍼히어로를 사회학의 범주로는 다 엮지 못할 지경에 이른 것이다. 최근 등장한 유형들- <앤트맨>(2015), <블랙팬서>(2018),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2015)- 을 다 읽어내려면 슈퍼히어로 고유의 외교학, 지질학, 정치학, 물리학, 문화인류학을 읊어야 할 판이다. 농담이 아니다. 슈퍼히어로의 사회는 어느덧 평범한 인간사회와 거의 유리된 위치로 이전했다고 보아야 한다. 이런 시점에서 샤말란이 지닌 태도는 비판보다 원형을 향한 시선에 더 가깝다. <언브레이커블> <23 아이덴티티> <글래스>에서 자주 듣게 되는 단어는 ‘코믹스’다. 다른 슈퍼히어로영화들이 대중적인 기호의 폭발에 맞춰 성공을 즐기는 동안, 샤말란은 장르영화 안에서 (슈퍼히어로가 태어난) 코믹스로 돌아가 비밀의 언어를 들으려 했다.

<글래스>에서 가장 이상한 점은 영화 스스로 예고했던 ‘거창한 대결’이 벌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세 슈퍼히어로는 대결이 벌어질 장소인 고층 빌딩 근처에도 가지 않는다. 그뿐만이 아니다. 놀랍게도 세 영웅은 모두 죽어버리는 데다 그들은 세상 사람들의 시선 바깥인 정신병원 주차장에서 초라하게 죽어간다. 익숙한 슈퍼히어로 장르를 경험하러 온 관객이 <글래스>의 결말에 적잖이 분노했다고 하더라도 충분히 이해되는 부분이다. 보고 싶었던 스펙터클은 없고 인물들은 허무하게 죽어버리니까 말이다. 그런데 샤말란이 하고 싶었던 말은 그 죽음에서 찾아야 하며, 여기서 불러내야 할 이름은 니체다. <글래스>의 엔딩 크레딧에서 샤말란은 이 영화의 제목이 <글래스 언브레이커블 스플릿>이라고 말한다. ‘부서지지 않을 듯하던 단단한 유리가 산산이 쪼개지는 이야기’, 그것이 3부작의 정체다. 그들은 전부 비참하게 죽어야 하는 운명이다.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 <식스 센스>처럼 샤말란은 인물의 죽음으로 이야기를 시작하곤 한다. <언브레이커블>에서는 엘리야의 의도에 따라 수많은 보통 사람의 죽음을 맞는다. 3부작의 마지막에서는 심지어 세 주인공마저 죽음으로 몰아 넣는다. 샤말란이 죽음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밝히지 않으면, 흡사 그의 영화가 인명을 가벼이 여기는 것처럼 오해받기 십상이다. <식스 센스>의 말콤이 곧 벌어질 죽음 앞에서 느꼈을 무력감을 떠올리면, 샤말란의 처사는 더욱 이해받기 힘들다. 의사인 말콤에게 화가 난 환자가 총을 겨누고 섰다. 슈퍼히어로의 도움이 절실한 때지만, 현실의 그를 도울 사람은 아무도 없다. 결국 그는 총을 맞고 죽는다. 다음 영화인 <언브레이커블>의 데이비드는 자기가 가진 초능력으로 자신은 물론 위험에 처한 사람들을 돕는다. 여기에서 두 영화를 자칫 잘못 연결지을 경우, 샤말란이 니체의 ‘초인주의’를 넌지시 언급한다는 착각에 빠질 수 있다. <글래스>는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2018)처럼 ‘당신도 나처럼 날 수 있어요’라고 거짓으로 부추기는 영화가 아니다.

말콤과 데이비드를 죽느냐 죽지 않느냐의 차이로 구분하면 안 된다. 샤말란이 니체와 공통으로 생각하는 최고의 두려움은 ‘무지한 삶’이다. 자신이 왜 존재하는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깨닫지 못할 때 (말콤이 그러하듯) 살아 있어도 산 게 아니다. 글래스는 (흡사 자신이 니체라도 되는 듯이) 데이비드에게 존재의 이유를 깨닫기를 요구한다. 그리고 세 슈퍼히어로가 존재의 조건을 충족했을 때 그 자신도 가차없이 죽음을 받아들인다. 샤말란의 3부작에서 슈퍼히어로의 존재 이유는 여타 슈퍼히어로의 그것과 전혀 다르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샤말란의 슈퍼히어로는 선과 악의 개념으로 정의되지 않으며, 선한 논리에 맞춰 세계의 평안을 구하는 일 따위는 슈퍼히어로의 사명과 무관하다. 아니, 오히려 그 반대다. 슈퍼히어로는 보통 사람들이 삶을 자각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들– 선과 악, 종교를 포함한 기성의 관념– 에 맞서거나 그것에서 깨어나도록 이끄는 자들이다. 그 일이 완수될 때, 인간은 우주의 비밀에 다가설 수 있다고 샤말란은 믿는다. 즉, 슈퍼히어로는 답을 주는 존재가 아니라, 우리가 어떤 곳에 도달하도록 돕는 조력자인 셈이다.

<글래스>의 마지막 대사인 ‘우주의 비밀’은 니체의 초인처럼 모호한 개념이다. 샤말란은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밝히지 않는데, 문제는 과연 엘리야의 예언에 설득력이 있는가 하는 점이다. 니체는 인간의 과제가 천사의 목소리에 홀리지 않고 올바른 목소리를 찾아 듣는 것이라고 했다. 그 목소리는 놀랍게도 악마의 목소리다(악의 목소리가 아니다). 샤말란의 영화에서 슈퍼히어로는 악마로 오인받는다. 엘리야는 3부작의 결말에 이르기까지 계속 악당으로 보인다. 실제로 3부작은 슈퍼히어로에 대한 기존 개념을 완전히 뒤집어 놓는다. 우리의 친구로 우리의 삶을 편안하고 안전하게 지켜주려고 애쓰는 슈퍼히어로는 샤말란의 영화에 없다. 심지어 그들은 과감한 행위를 하지 못하게 막지도 않는다. 대신 거꾸로 된 건강한 삶을 발견하기 위해 도전적으로 나아가기를 요구한다. 악마의 목소리야말로 인간에게 그런 것을 요구한다는 게 니체의 생각이다. 역시 쉽지 않은 주제다. 샤말란의 3부작이 궁극적으로 의도한 곳에 도착했는지, 나는 확신하지 못한다. 다만 악마를 경유해 기존 슈퍼히어로영화를 전복하려고 한 그의 시도는 기억되어 마땅하다고 본다. 의도 자체가 건강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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