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통한다는 게 이렇게 좋은 건지 미처 몰랐다.” 지난해 12월 5일, 한국영상자료원의 새 기관장으로 임명된 주진숙 원장을 만나기 전, 직원에게 넌지시 새 원장이 오고 난 후의 변화를 물었더니 돌아온 답변이다. 영화 관련 전문 분야에 대한 이해도가 그만큼 높아 업무 진행이 빨라졌다는 이야기다. 전임 원장의 불명예 사퇴 이후 영화와 영화계를 파악하는 영화 전문인이 원장이 되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한층 높았다. 중앙대학교 영화학과 교수, 여성영화인모임 이사, 한국영화평론가협회 회장 등을 역임하며 영화계에서 다양한 중책을 맡아온 영화학자 출신의 주진숙 원장은 복원, 아카이빙, 시네마테크 운영 등 영화 전 분야에 대한 이해도를 필요로 하는 한국영상자료원을 책임질 적임자로 환호를 받으며 부임했다. 부임 직후 인터뷰 요청을 하자, “업무 파악이 먼저”라며 고사해 미루었던 인터뷰를 진행했다. 영화계의 기대가 크다고 전하자, “고마우면서도 부담감이 크다. 한국영상자료원 업무가 워낙 방대하고, 일의 성격 역시 다양해 내 역량이 못 미칠 수도 있고 모르는 부분도 많지만 열심히 해보려고 한다”며 포부를 드러낸다.
-출근 첫날은 어떻게 보냈나.
=문화체육관광부 가서 임명장 받고, 행사 끝나니 오후 5시더라. 다음날인 12월 6일 취임식을 했다. 취임사는 짧게 하려고 했는데, 원장직 복무할 때 하고 싶은 이상적인 이야기들을 한 것 같다. (웃음) 나는 3년 임기로 와서 흘러가는 사람이라면 여기서 일하는 분들은 보다 전문성을 갖추고 있는 인재들이니, 이후에는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원장이 배출되면 좋겠다. 좀더 전문가들로 꾸려질 수 있는, 전문성을 갖춘 기관이 되도록 하는 게 재임 기간 동안 내 임무라 생각해서 그런 요지의 말을 했다.
-부임한 지 이제 한달 지났다. 전임 원장이 지인이 운영하는 업체에 특혜를 준 일, 성희롱 발언 등으로 기관장으로서 부적절한 처신을 해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사퇴한 뒤, 5개월간의 공석 이후 부임이다. 그만큼 더 바쁘게 업무 파악이 이루어져야 했다.
=상암동 시절 초기에 비상임 이사로 일하기도 했고, 10년 전쯤 원장직에 지원하기도 했다. 당시는 직원도 얼마 안 되고 아담한 조직이었는데, 이제는 체계가 갖추어진 큰 조직이다. 사무국장님이 계시니 원장의 공석에도 문제없이 진행되고 있었다.
-지난해 중앙대학교 영화학과 명예교수로 임명된 후 자료원 원장직에 추천받고 임명되었는데 영화학자로 지내온 것과는 또 다른 소명의식이 있었을 것 같다.
=지난해 2월 퇴직하고 굉장히 행복하게 살았다. 여행도 다니고. 그간 강의하면서 보낸 내게 주는 휴식 같은 시간이었다. 한편으로는 자료원에 7~8명 정도 제자들이 있는데 사실 그들에게 좀 미안한 마음이 컸다. 나는 소위 말해 한국영화의 황금기를 거치면서 영화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이 대거 유입될 때 교수로 지냈고, 훌륭한 제자들도 많이 만났다. 그런데 막상 그들이 공부하고 나서는 현장이든 학교든 갈 곳이 없게 됐다. 한국영상자료원에 객원 연구원 제도가 있었는데, 그것도 몇년 전 없어졌다. 영화 연구물이 부족한 상황이라 제자들도 이 자리에 내가 가서 역할을 해주기를 바랐다. 영화 관계자들 중에는 여성 티오가 났으니 적극적으로 이 기회를 잡아야 한다고 독려해주는 분들도 많았다. 사명감을 가졌다기보다 오히려 거창하게 생각지 않고 지원했다. 자의보다는 타의가 더 컸다고 할까. (웃음) 3년이라는 재임기간이 어떻게 보면 무언가를 확장하기에는 길지 않을 수 있지만, 할 수 있는 것들을 하나둘 해나가려고 한다.
-부임하고 원장으로서 밖에서 보던 기관과 달라진 인상도 있을 텐데.
=상임위원으로 3년간 일하며 한국영상자료원 운영과 관련해 조언도 해왔지만, 한국영상자료원을 이용한 건 기획전 참여 정도였다. 그런데 막상 이곳에 와보니 자료원 사업이 극장 사업, 아카이브, 연구 등 굉장히 다양한 분야에 걸쳐 방대하더라. 특히 경영평가 부분에서 해야 할 일이 많다. 공공기관으로 좋은 평가를 받아야 하고 실제 직원들의 업무에 이 평가가 끼치는 영향이 크다. 한국영상자료원이 추구해야 하는 것과 경영 문제가 맞물렸을 때 그걸 어떻게 완수해야 할지, 경영상의 목표를 완수하기 위한 것과 아카이브가 가지고 있는 속성이 상충되는 데 있어서 풀어야 할 것이 많다.
-취임사에서, 전임 원장의 ‘전천후 인재 육성’이라는 원칙 아래 행해진 인사이동에 대해 직원들에게 사과했다고 들었다. 지난 기관장 재임 시절, 복원, 아카이빙 등을 하는 기관의 특성상 ‘전문성’이 앞서야 하는 기관에서, 잦은 인사이동이 큰 불안 요인으로 인식 되어왔다면 그 부분에 대해 일종의 안심을 시킨 조치로 평가된다.
=우선 과제는 이전에 잘못된 것들이 있었다면 바로 잡는 일일 것이다. 조직의 불합리한 구조 역시 거기 포함된다. 전임 원장의 원칙 없는 인사이동으로 상처를 받은 직원들이 많다. 특히 전문성을 가진 이들이 다른 부서에 배치된 것, 10년 넘게 복원, 보존 기술이 필요한 부서에서 일하던 분들이 전혀 연관성이 없는 부서로 이동한 경우도 있어서 그 부분을 어떻게 바로잡을지 상황을 파악하고 있다.
-구체적으로는 어떤 방법을 강구하고 있나.
=지금 상암동 직원이 90여명이다(파주 보존고 30여명). 8개의 팀으로 나뉘어 있는데 팀별로 미팅을 하고 숙제를 내줬다. 정규직뿐 아니라 무기계약직 다 포함했고, 지난 1년간 자신의 업무를 수행하면서 어떤 일이 가장 보람 있었는지 이런 부분을 들어봤다.
-교수 출신다운 조치지 싶다. (웃음)
=그런 것 같다. (웃음) 예상보다 솔직한 의견들이 많았다. 보내준 답변을 꼼꼼히 두번씩 읽었다. 업무의 불균형 등 여러 문제를 접하면서 자료원이라는 조직이 가진 커다란 문제들도 파악되더라. 8개 팀으로 나뉜 게 2017년경인데 각각의 사업에 따른 팀간의 경계를 허물고 협조 체제가 더 강화될 수 있는 부분도 고려하고 있다.
-무엇보다 올해는 한국영화사 100주년 기념의 해라 자료원의 역할이 강조되는 때이기도 하다. 올해 추진 중인 기획전도 100주년 관련 이슈가 가장 메인일텐데.
=이 사업은 올해 실행이라 프로그램이 이미 다 확정된 상태다. 시네마테크에서 5~10월까지 한국영화 100주년 관련 기획전을 준비하고 있다. 100주년 기념사업과 관련해 별도의 추가 예산이 지원되지는 않아서 주어진 예산으로 사업을 잘 수행하는 게 목표다. 기관 자체 예산 일부를 관련 사업에 편성해서 영화제 외에도 특별 전시, 학술 대회 등에 활용하려고 한다. 영화진흥위원회가 구성한 한국영화 100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 위원이기도 한데, 자료원의 협조가 많이 필요한 부분이다. 공동으로 심포지엄이나 이런 걸 마련할 경우 실무진들이 같이 와서 꾸리는 방향을 제안하려 한다. 한국영상자료원이 모두 나서서 하기에는 손이 부족하다.
-남북간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북한의 필름 수장고에 대한 기대도 현실화되고 있다. 어떤 움직임이 있는지, 만약 발견된다면 복원 사업도 적극 추진해볼 수 있다.
=기회는 좋은데 북한영화계와의 교류는 아직 구체적 논의가 없고 확실한 길이 열려 있지 않다. 직원들도 교류의 필요성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구체적으로 진전이 안 된다. 무엇보다 공적인 교류가 열리는 게 중요하다. 다들 궁금해하는 수장고에서 <아리랑> <만추> 같은 것들을 보게 된다면 좋지만 일단은 북한의 최근 영화들을 함께 볼 수 있는 기회도 많이 만들어나갔으면 한다.
-2017년부터 ‘아시아 아카이브 디지털화 지원 사업’이 시작되었다. 한국영상자료원의 기술 인프라가 이제 일정 궤도에 올랐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업이기도 한데, 대만영화아카이브, 필리핀영화아카이브 지원에 이어 올해 계획은 어떻게 되나.
=1930년대 대만의 시대상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상당한 의미를 가지는 <의인오봉>(1932) 디지털 복원 작업(필름 보수, 4K 디지털 스캔, 색보정 및 음향 복원 등)을 한 대만영화아카이브에 이어 올해는 필리핀영화아카이브의 1954년작 <마알라알라 모 카야> <일로카나 메이든> 두편을, 이어서 싱가포르아시아필름아카이브의 <미스 완탕>(2001), <피노이 선데이>(2009)를 선정했다. 복원에 있어서는 아시아권에서 한국이 이제 최고로 평가받고 있고 견학도 많이 온다. 각 기관의 주요 인사들을 초청해 자료원의 디지털화 과정을 공유하는 한편, 이해를 높이는 시간도 가지려 한다. 재정적, 기술적 인프라가 부족한 해외 지역 아카이브의 필름 디지털화를 지원해 국제적인 영상 문화유산 보호에 기여하려 한다.
-한국영상자료원 기술진의 해외연수나 재교육도 필요하지 않을까.
=열심히 네트워크를 만들어가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낀다. 올해는 이미 예산 편성이 끝났지만 전문가 양성이라는 점에서 직원들의 연수, 재교육 기회 제공을 염두에 두고 있다. 일주일이라도 보고 경험하고 오면 이전과 차이가 크다. 경험하고 오면 우리가 가진 문제들, 적용해야 할 것들이 더 잘 보일 수 있다. 단순히 지표로 보여주기 위해서 복원 편수만 올리는 것에서 벗어나 복원 영화의 오리지널리티를 살리기 위해 어떤 원칙을 가지고 할 것인지, 여러 가지 고민을 해봐야 하는 시점이다. 지난번 독립영화 복원에 대해 원래 만든 영화보다 콘트라스트가 더 좋아졌다고 하는 반응을 있었는데, 그게 복원의 방향성에서 볼 때 올바른가에 대한 고민도 있다. 단순히 아카이빙만 하는 기관, 인력이 부족한 상태에서 모든 영화를 아카이빙하고 복원하는 기관이라고만 인식되지 않게 해나가야 할 것 같다.
-영화학과 교수뿐만 아니라, 여성영화인모임 이사, 한국영화평론가협회 회장, 국제영화비평가연맹 한국회장, 서울국제가족영상축제 심사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처음 영화와 인연을 맺은 계기는 무엇이었나.
=대학(이화여자대학교)에서 시청각교육과를 전공했는데, 사범대 안에 스튜디오가 있었다. 학교 공부 안 하고 거기서 음악 듣고 놀았다. 대학원은 취직이 안 돼 갔다고 할까. (웃음) 서강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님 강의를 들었는데, 1976년 즈음이 대한민국 광고 1세대가 활약하던 시절이었고, 막 광고 영상 붐이 일던 시기였다. 이후 서강대학교 신문방송학과에서 석사과정 공부를 했다. 찰리 채플린으로 문화와 예술학 기말 리포트를 쓰고 그걸 석사 논문으로 발전시켰다. 그때 미국문화원 가서 원서도 보고, 프랑스문화원 가서 <미치광이 피에로> 같은 영화로 영화에 눈뜨기 시작했다. 석사 졸업 때쯤, 같은 과 선배가 유학 가라고 권하더라. 아이오와대학에 가서 영화를 흥미롭게 공부할 수 있는 법을 배웠다. 한국 돌아왔다가 다시 텍사스주립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돌아보면 어떤 뚜렷한 야심이 있었다기보다 근근이 해왔다. 늘 영화가 흥미롭고 재미있어서 그게 동력이 됐다.
-지난해 한국영상자료원에서 ‘한국의 여성영화감독전’으로 주목받지 못한 한국영화사의 여성감독들을 재조명하기도 했다. 여성영화인모임을 이끌어온 만큼 여성 영화인들의 발굴에 대한 역할도 기대된다.
=장미희·변재란 선생과 <여성영화인사전>을 만들었는데 당시 중앙대학교 대학원생들이 모두 다 참여해서 만들었다. 여성영화인모임도 이때 결성됐다. 이제 1990년대 이후 여성 영화인들의 활동을 기록한 두 번째 사전을 만들어야 한다. 안 그래도 여성영화인모임에서 심재명 대표를 비롯해 편찬을 재촉하는 와중에, 내가 여길 와버린 거다. (웃음) 새삼 느끼지만 데이터베이스 작업이라는 게 쉽지가 않다. 다행히 여성영화인모임에서 올해의 여성영화인상 수상을 위해서 매해 리스트업을 하는데, 그게 하다보니 꽤 축적이 되었다. 그럼에도 여성 영화인에 대한 데이터베이스는 여전히 부족하다. 인터뷰 기록 등 가능한 한 많은 것들을 남겨두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영화학자로서 관심을 두고 있는 한국 고전영화, 배우 리스트가 있나.
=센 여성들에 관심이 있다. 린다 하트의 <악녀>(Fatal Women)라는 책도 있듯이, 한국영화사의 센 여성 캐릭터를 모아서 캐릭터 열전을 진행해보고 싶다. 각 시대별로 어떻게 변화해왔는지 한눈에 볼 수 있는 기회다. 여성들의 역사뿐만 아니라 자료원 창고에서 발굴해서, 영화사의 씨줄, 날줄을 엮어 새로운 역사 쓰기를 해보고 싶다. 물론 원장이라고 해서 이런 개인적 관심사를 하자고 강요할 수는 없다. 과도한 업무를 줄이는 방향으로 갈 생각인데, 아이디어를 던지기만 하고 대책은 주지 않는 그런 원장이 되면 안 될 것 같다.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