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줄라(요안나 쿨리크)와 음악가 빅토르(토마시 코트)는 1949년 폴란드의 민중음악을 발굴하고 공연하는 악단에서 만난다. 둘의 사랑은 빅토르의 서방 망명에 줄라가 동행하지 않은 다음에도 재회와 이별을 거듭하며 그치지 않는다. 한쪽이 다른 이와 결혼해도, 큰 실망을 주고받아도 둘의 사랑은 마치 삶 자체인 양 질기게 지속된다. 그러나 <콜드 워>는 철의 장벽이 만든 안타까운 순애보가 아니다. 서방 사회와 그 안의 생활 역시 둘을 회의에 빠뜨린다. 줄라와 빅토르의 사랑은 성적 매혹과 예술적 동경에서 출발해 단절이 부추긴 갈망과 헌신, 동지적 비판, 환멸을 거쳐 더 멀리 간다. 막상 파리에서 함께 지낼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을 때 줄라와 빅토르는 어쩔 줄 모르는 것처럼 보인다. 어쩌면 이것은 서로를 명분으로 자기를 유지한, 그러니까 냉전 같은 사랑이었는지도 모른다.
01/16
호소다 마모루 감독의 <미래의 미라이>는 동생 미라이의 탄생으로 가족의 제1 관심사이던 특권적 지위를 잃고 4살 평생 최대 위기를 맞은 쿤의 이야기를 그린 성장 동화다. 동생을 질투하고 앵돌아진 쿤을 변화시키는 계기는 과거와 미래에서 찾아온 가족 구성원이 인도하는 5번의 환상 여행이다. 쿤이 태어나기 전 가족의 귀염둥이였던 반려견 윳코, 미래에서 온 10대의 미라이, 쿤처럼 어지르기 좋아했던 과거의 엄마, 전쟁의 상처를 안고 살아남은 청년 시절의 증조부 등이 차례로 쿤의 손을 잡고 다른 시공으로 이끈다. 찰스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럴>에서 하룻밤 동안 구두쇠 스크루지를 개과천선하게 만드는 유령들처럼. 전처럼 자신의 요구에 즉각 반응하지 않는 부모에게 화가 나 밖으로 뛰쳐나온 쿤이 환상 여행 가이드를 만나는 장소는 본채와 별채에 둘러싸인 아담한 정원이다. 극장에서 돌아온 나는 책장 동화 칸에서 필리파 피어스의 <한밤중 톰의 정원에서>를 끄집어냈는데, 동생이 홍역에 걸리는 바람에 이모네 집에 머물게 된 소년 톰의 눈앞에 새벽 1시가 되면 아름다운 정원이 열린다는 설정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물론 호소다 마모루 감독도 <시간을 달리는 소녀>(2007), <썸머 워즈>(2009), <괴물의 아이>(2015)에서 차원 이동을 그린 바 있으며, <미래의 미라이>에서 전작을 통해 쌓은 ‘웜홀’을 시각화하는 솜씨를 총동원한다. 미처 몰랐던 가족사와 미래를 엿본 쿤은 가족과의 횡적 관계 그리고 역사 속에서 좀더 ‘거시적으로’ 자기 정체성을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이 구성은 <미래의 미라이>가 갖는 태생적 약점이기도 하다. 두 아이의 아버지인 중년 감독의 성찰을 4살 어린이를 주체로 전달하는 이야기는 다소 과적(過積) 상태로 느껴진다.
<미래의 미라이>는 작은 것에 강하고 큰 것에 약하다. 우선 일상 공간과 인물의 시각적 묘사에 들어간 관찰과 애정의 부피는 대단해서 애니메이션의 고유한 아름다움을 한껏 입증한다. 신생아의 한없이 연한 머릿결과 살성, 네 식구가 함께하는 저녁 목욕, 집은 건축가에게 기차는 기차 전문가에게 맡겼다는 프로덕션 디자인은 과연 화면을 멈추고 싶은 충동을 부른다. 식구가 불어나면서 증축한 쿤이네 집은 본채와 놀이방 별채, 정원, 현관의 레벨이 모두 다르고, 실내공간도 벽과 문 대신 단차로 구획된 독특한 공간이다. 직업이 건축가인 아버지가 좁은 대지 활용법을 연구한 결과 같기도 하지만 극중에서 종종 벌어지는 숨바꼭질 상황에서도 아주 유용하다. 한편 본채와 별채의 통유리 창은 중정(中庭)을 향하는 동시에 골목으로부터 시야가 단절돼 있어 마법이 이뤄지는 정원의 비밀을 보호한다. 마지막 여행의 무대는 근접 미래의 신칸센 중앙역인데 현재 존재하는 기차와 미래 열차의 컨셉 디자인이 현란하게 스크린을 가로지른다. 호소다 마모루 감독 팀은 무엇보다 쿤이 여행하는 연대와 지역이 다양한 세계를 시대와 개발 정도, 내륙과 해안의 차이에 따라 상이한 조명과 톤으로 그렸다. 장르적으로도 가족 드라마를 바탕으로 코미디, 판타지, SF, 호러가 망라되며 예외적으로 코믹한 만화체, 입체파 회화풍으로 그려진 캐릭터도 등장한다.하지만 화려한 전개 가운데 “나는 미라이의 오빠”라고 선언하기까지 쿤이 걷는 심리적 여정은 충분히 선명하지 않다. <미래의 미라이>는 서사와 애니메이션에서 호소다 마모루가 잘하는 것과 하고 싶은 것을 욕심껏 종합한 커리어 중간 정리판이다.
01/17
레바논 베이루트 슬럼가의 12살 소년 자인(자인 알 라피아)은 성장에 앞서 생존이 급하다. 동생들과 부모의 애정을 다투기는 커녕 갓 초경을 치른 동생 사하르(하이타 아이잠)를 기다렸다는 듯 매매혼시키려는 부모로부터 지키는 것이 자인의 급선무다. 슬프게도, 보통 영화를 볼 때와 달리 관객은 주인공 자인의 동생이 모두 몇명인지 그들의 이름이 무엇인지조차 파악할 수 없다. 부모가 대책 없이 낳고 출생신고조차 하지 않은 남매들은 방바닥에 뒤섞여 잠을 청한다. 자인의 유일한 학교는 폐건물이 즐비하고 소아성애자들이 곳곳에 도사린 위험한 거리다. 여기서 살아남아 어른이 되는 아이들은 부유한 동네로 가서 구걸하며 생활하다 슬럼으로 돌아와 생을 마감한다. 똑똑한 자인은 공부하고 싶지만 부모는 어린 아들이 무겁고 위험한 물건을 배달해서 벌어오는 돈이 중하다. 학교가 지급하는 구호물품만이 그들이 생각할 수 있는 취학의 장점이다. 사회가 조장한 빈곤과 무지가 악의 근원이지만, 자인의 부모는 역할모델로서도 최악이다. 그들은 감옥에 환각성 약품을 밀반입하는 불법행위에 자식들을 손발로 쓴다. 끝내 사하르를 보호하지 못한 자인은 가출해서 굶주리던 중 불법이민 여성 라힐(요르다노스 시프로)을 만나 그의 아기 요나스(보루와티프 트레저 반콜)를 돌보게 된다(트레저 반콜의 연기는 역대 3살 미만 배우 가운데 최고봉이다).
극중 자인의 변호사를 직접 연기한 나딘 라바키 감독은 분노를 동력으로 <가버나움>을 고발성 다큐멘터리처럼, 고딕체의 호외나 전단처럼 연출했다. 어른들이 초래한 전쟁과 불평등의 여파로 고통받는 아이들의 현실을 접한 라바키 감독 부부는 자신들의 집을 담보로 대출한 돈을 제작비로 비전문 배우들과 거리에서 인위적 연출을 최소화하는 방식으로 영화를 찍었고, 12시간의 1차 편집본을 최종판으로 다듬는 데 제작기간의 절반인 2년이 걸렸다고 한다. <가버나움>은 서슴없이 고발의 팸플릿을 자처하고 폭행죄로 투옥된 자인이 부모를 상대로 건 재판을 영화의 액자로 쓴다. 소년이 “나를 태어나게 한 죄”를 추궁하는 법정 장면으로 시작해 어떻게 상황이 이 지경에 왔는지 돌아보는 것이다. 하지만 나딘 라바키 감독의 고발 의지는 양날의 칼이다. 결과적으로 영화는, 이 소년은 태어나지 않는 편이 나았다는 결론을 서두에 정해두고 관객이 동의하도록 만들기 위해 달려가는 형국이 돼버린다. ‘감당할 수 없는 물건의 축적’을 의미하는 제목처럼 선택의 여지는 무망해 보이고 관객은 탄식 속에 소진된다.
그럼에도 <가버나움>을 손쉬운 공분으로 소모해버리는 비참 포르노라고 단정할 수 없는 것은 모든 상황을 뜨겁게 제시하고 열렬히 외치는 이 영화가 예외적으로 전혀 설명하지 않는 미스터리 때문이다. 누구보다 전력을 다해 살아가지만 서류상 존재하지 않는 인간이라는 점에서 불법이민자 라힐과 방치된 아동 자인의 사회적 지위는 동일하다. 그런데 아무것도 갖지 못한 여자와 소년이 서로에게 줄 것을 찾아내고 사회와 가족 대신 상대의 목발이 된다. 생전 누구에게서도 마땅한 사랑과 보호를 받지 못한 소년은 어떻게 자기보다 더 연약한 아이들을 지켜야 한다는 책임을 반문 없이 받아들이는 걸까? 추방의 공포에 시달리며 다음 끼니를 걱정하는 라힐이 배고픈 소년과 밥을 나누는 자비는 대체 어디서 오는 것일까? 그런 숭고한 의지는 인간의 어디에 어떻게 깃드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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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 위쇼
페루 출신 이민 곰 패딩턴의 목소리 연기로 무수한 영혼에 당분을 공급하고 다문화 도시 런던을 홍보한 벤 위쇼는 <메리 포핀스 리턴즈>에서 3남매의 아버지가 된 마이클 뱅크스를 연기한다. 원래 패딩턴의 성우로 내정됐다가 위쇼에게 바통을 넘긴 콜린 퍼스, <패딩턴> 연작에서와 똑같이 가족의 살림살이를 주관하는 캐릭터를 맡은 줄리 월터스도 공연하는 재미있는 풍경이다. 무려 린 마누엘 미란다까지 출연한 이 화려한 디즈니 뮤지컬에서 눈물을 자아내는 유일한 노래는 “당신, 어디 있어?”라는 가사로 끝나는 벤 위쇼의 독창 <대화>(A Conversation)다. 귀에 콕 박히는 선율도 아니고 벤 위쇼가 디바도 아니지만, 1년 전 여읜 아내 케이트를 향한 그리움을 추억의 물건을 어루만지며 노래하는 이 다락방 장면은, 뮤지컬영화가 연기하는 가수보다 노래하는 배우를 필요로 하는 까닭을 들려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