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얼굴들>의 몽타주의 방법론
2019-02-14
글 : 김병규 (영화평론가)
무인의 풍경

역설적이지만 이강현 감독의 <얼굴들>에서 매혹을 느낀 부분은 어떤 얼굴도 나타나지 않는 텅 빈 공간을 비추는 순간이다. 가령 현장학습으로 수원 화성에 온 학생들이 행궁 안을 돌아다니는 대목에서 카메라는 이들이 프레임 바깥으로 완전히 퇴장할 때까지 장면을 쫓는다. 이어지는 숏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아무도 없는 행궁의 정적이고 공허한 풍경이다. 서사적 기능이나 특정 인물의 시각으로 수용되지 않는 무인의 공간이 기습적으로 숏의 연속적 체계에 침입한다. 그러나 이런 풍경은 단순히 사람들이 사라지고 없는 사실만을 표현하지 않는다. 직전 장면에서 보았듯 그곳은 익명의 사람들이 지나가고, 언제든지 새로운 사람들의 출현으로 다시 채워질 공간이다. 프레임 내부는 그러므로 행위의 주체가 사라진 공간이면서 동시에 어느 방향으로든 새로운 대상이 틈입할 수 있는 열린 공간이다. 이같은 비선형적 접속의 가능성이 무인의 풍경에 잠정적으로 내포돼 있다.

<얼굴들>에서 영화를 전개하는 방식이 이러한 접속의 방법론과 유사하다고 느낀다. 영화는 하나의 순간에서 다음 순간으로 전환하며 개연성의 논리로 설득하지 않는다. 기선(박종환)과 혜진(김새벽)의 삶을 평행하게 보여준다는 기본적인 틀이 존재하기는 하나, 그들의 일상이 같은 시간의 흐름으로 벌어지는 것은 아니며(혜진이 대략 네달간의 시간을 지나친다면, 기선은 적어도 수년 동안의 삶의 경과를 보인다) 내러티브상의 특별한 교직을 만들어내는 것도 아니다. 대신 느슨하게 이어지는 사소한 접점들을 연결하는 방식으로 숏과 신의 전환이 발생한다. 영화 초반부에 짐 정리를 도와주다 기선이 쓰던 물건을 찾은 주영에게 혜진은 집에서 기선의 흔적이 튀어나올 수 있다고 답한다(그들은 3년 동안 함께 살았다고 한다).

<얼굴들>의 장면을 연결하는 규칙은 시간과 공간의 물리적 인과율을 벗어나 예기치 않게 출현하는 흔적과 기시감으로 작동한다. 먼 거리를 뛰어넘어 혜진이 바르는 자외선차단제가 또는 기선의 풀린 신발끈이 진수(윤종석)에게로 되돌아오는 것처럼 말이다. 숏과 리버스 숏은 즉각 접합하는 대신 영화라는 형식의 표면 위를 유동한다. 혜진이 잃어버렸다는 핸드폰, 혜진과 진수가 언급하는 라디오, 현수(백수장)가 전달하고 기선이 바라보는 조화, 일기 속 남편이 배우고 싶어 하고 이름 모를 남자가 연주하는 색소폰은 모두 흔적과 기시감이라는 감각을 추동하는 사물들이다. 질료들의 이러한 비연속적 네트워크는 축구부의 발걸음이 구호에 맞춰 그리는 원형의 운동이 그렇듯 반복적으로 되돌아오는 형상을 구축한다. 그러므로 이 영화는 이야기나 인물에 관한 그럴듯한 귀결이 아닌 시차를 넘어 여진처럼 잔존하는 미약한 동시성을 공유하는 지점으로 향한다. 사라진 것이 되돌아오고, 잃어버림과 회귀가 교차하는 지점에 이 영화의 좌표가 놓여 있다. 미하일 얌폴스키의 표현을 빌리자면 상이한 시간적 층위로 구성된 세계가 예기치 않게 교차하는 시간을 <얼굴들>은 그리고 있다. 그것은 연대기적 시간에서 이탈해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현재성을 발산하는 이중적인 시간이기도 하다.

상이한 시간적 층위의 교차라는 원리에서 인물들은 끊임없이 길을 잃는다. 기선과 혜진이 겪는 주요한 상태를 이야기하자면 전자는 타인에게 불가해하게 이끌리고 후자는 타인을 탐색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두 가지 사태는 공통적으로 지금의 자리에서 일탈해 삶의 다른 면모를 응시하는 자리로 나아가는 몸짓이라는 점에서 변동하는 삶의 양태를 예측하게 한다. 또 다른 공통점은 두 가지 사태가 필연적으로 부재를 인식하는 것과 연관된다는 것이다. 타인을 본다는 것은 반대로 말하면 지금껏 타인을 보지 못하고 있었음을 뒤늦게 확인하는 것과 같다. 이런 양가적인 지각의 체험은 “나는 이제 많이 다닐 거예요. 안 가본 곳들”이라고 말하는 혜진에게서 특별히 두드러진다. 혜진은 주영에게 화장실에 간다며 어느 건물로 들어서는데, 다음 장면에서 그녀는 화장실에 간다는 목적을 잊어버리기라도 한 듯 프린터만 덩그러니 놓인 기묘한 공간을 서성인다. 구로사와 기요시의 폐허적 공간을 연상시키는, 사물과 공간과 인간이 맺는 관계가 모호하게 방치된 빈 공간이다. 게다가 바로 다음에 화장실에 있는 혜진을 보여주기 때문에 장면은 완전히 잉여에 가깝다. 하지만 이같은 망각과 이탈의 경로가 없다면 변모하는 영화의 형식은 작동하지 않을 것이다. 이 신은 혜진과 주영이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는 것으로 끝난다. 그러고 나면 현수가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장면이 이어진다. 인물들이 출구 없는 벽에 도착할 때, 오히려 영화의 육체는 비인칭적으로 분화하며 눈에 보이지 않는 구조상의 출입구를 만들어낸다.

현수가 트럭에서 무언가 잃어버린 듯 열심히 곳곳을 두리번거리는 장면을 떠올려보자. 그가 찾는 것이 무엇인지, 어떤 필요로 찾는 것인지 우리는 알 수 없다. 대신 화면에 또렷이 정착되는 건 무언가 없어졌음을 확인하는 부재의 감각이다. 이는 의미론적으로는 아무런 기능이 없지만, 인물로 하여금 무언가 사라졌고 그것을 되찾기 위해 트럭이라는 생활 내부의 공간을 일상적인 상태와 다르게 인식하고 탐색하게끔 하는 전제다. 현수는 찾으려는 물건 대신 누군가의 수첩을 발견하고 거기 쓰인 일기를 읽는다. 이런 일탈적 모험에 동참하기라도 하듯 일기에 적힌 내용이 화면에 영상으로 펼쳐진다. 이를 영화가 탄생하는 순간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잃어버림으로 촉발한 탐색이 우연한 개방성의 형상을 추동하는 것이다. 이처럼 이 영화에서는 부재의 감각에서 새로운 숏의 가능성이 생겨난다. 혜진의 다짐을 빗대어 <얼굴들>이야말로 “안 가본 곳들” 여기저기로 영화의 세포를 이식하는 대담한 영화적 모험의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통일성 없는 세계의 틈새에 무수한 얼굴이 자리하고 있다. <얼굴들>의 작업은 단편적인 조각으로 존재하는 파편화된 얼굴의 형태를 불규칙적으로 결합하는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에 카메라는 우리가 언젠가 지나쳤을 수도, 그러지 않을 수도 있는 거리의 범상한 풍경을 연속해서 보여준다. 여기서 <얼굴들>은 미묘하게 오즈 야스지로의 건축적 공간에 근접한다. 공간과 공간을 점유하는 인물의 연결점이 모호한 세계. 마지막 장면에서 기선이 막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초점이 흐린 눈으로 혼란스럽게 주변을 쳐다보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는 인물과 공간을 배열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헝클어진 시간을 직조하는 건축적 작업으로, 과거의 기억들을 묶고 현재형으로 구획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미래적 기억이라고 부를 만한 낯선 시제의 중첩에 불시착한다. 따라서 하나의 얼굴을 보는 일은 복수의 시간, 다중의 구성을 들여다보는 것과 같다(기선이 진수의 얼굴을 마주하는 사건은 불 꺼진 극장에서 스크린을 바라보는 시선을 통해 이루어지고, 영화가 진수를 처음 보여주는 것도 담배 연기가 피어오르는 어둑한 공간이다. 얼굴을 본다는 것은 또한 암실(camera obscura)의 시학에 다가가는 것이기도 하다). <얼굴들>이 제안하는 영화적 모험의 본질은 대상에 깃든 그런 몽타주의 혼종성을 받아들이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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