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 속의 고해성사. <살인마 잭의 집>은 그렇게 시작한다. 물결 소리와 함께 두 남자의 대화 소리가 들린다. 잭(맷 딜런)은 자신과 동행하는 한 노년의 남성에게 지난 12년간 자신이 벌인 60여건의 살인 중 무작위로 끄집어낸 몇몇 살인사건에 대해 털어놓는다. <살인마 잭의 집>은 1970년대 미국을 배경으로 스스로를 ‘교양 살인마’로 칭하는 주인공 연쇄살인마 잭을 그린다. 지금까지 라스 폰 트리에가 구축한 영화적 세계를 기억한다면, 라스 폰 트리에와 사이코패스 살인마의 만남은 묘한 기대감을 불러일으킨다. 광기의 세계를 라스 폰 트리에만큼 적나라하게(또는 극단적으로) 그려낼 수 있는 감독이 또 어디 있겠는가? (그의 영화를 상영하는 영화제마다 으레 생기는 일이긴 하지만) <살인마 잭의 집>이 칸국제영화제에서 공개되었을 때 100여명의 관객이 상영 도중 퇴장한 일화는, 이 영화가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음을 증명한다(개인적으로 그의 이전 작품과 비교할 때 이 영화가 보여주는 폭력 수위가 그리 높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이에 대해서는 관객 각자의 판단에 맡기는 편이 좋을 듯하다). 분명한 것은 영화적 표현의 금기 따위는 안중에도 없던 라스 폰 트리에는 여전하다는 것, 그렇게 이 작품 역시 금단의 영역으로 발을 성큼 내딛는다는 사실이다.
<살인마 잭의 집>은 한마디로 라스 폰 트리에의 영화다. 그의 영화답게 <살인마 잭의 집> 역시 잭의 고백에 맞춰 5건의 사건을 각각의 챕터로 나누고 그 끝에 에필로그를 덧붙인다. 라스 폰 트리에는 이 영화에서 무수히 많은 여러 예술가와 작품을 차용하고, 히틀러, 무솔리니, 스탈린 같은 독재자를 끌어들이는 것도 모자라 폐허가치이론, 우상가치이론 등을 인용하고 여러 철학적 궤변까지 늘어놓으며 관객의 머리를 복잡하게 하지만, (그의 전작이 대체로 그러하듯) 궁극적으로 이 작품 역시 (단테의 <신곡>을 느슨하게 차용한) 종교적 우화이자 영화를 활용한 자기치료 요법에 가까이 있는 작품이다. 살인이 벌어지는 장소 주변을 신랄하게 묘사하는 것도 딱 그다운 방식이다. 시체를 업은 채 아파트 복도를 수없이 오가고 창문을 열어 구원을 요청하는 외침에도 그 어떤 관심도 보이지 않는 공동체 사회를 향한 지독한 냉소. 아마도 라스 폰 트리에만큼 공동체를 불신하는 냉소주의자 감독도 찾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살인마 잭의 집>은 라스 폰 트리에가 자신의 영화적 입장을 가장 노골적으로 언급하는 영화라는 점에서 이전 작품과 구분된다. 살인을 예술적 행위와 동격으로 여기는 잭이 괜히 등장하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살인마 잭의 집>은 ‘여러 측면’에서 라스 폰 트리에의 자기 반영적 영화다. 2017년 <어둠 속의 댄서>(2000)의 여주인공이었던 비요크가 라스 폰 트리에의 성추행 사실을 폭로한 사실을 떠올리면, “왜 늘 남자가 잘못이라는 거야? 어디를 가든 무슨 죄라도 짓고 돌아다니는 기분이야. 어린애 하나 해친 적 없는 놈도 마찬가지야. 남자로 세상에 태어난다는 건 죄인으로 태어난다는 뜻이야. 여자는 언제나 피해자잖아. 남자는 언제나 범죄자고 말이지”라는 대사가 단지 잭의 대사만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또 2011년 <멜랑콜리아>로 칸국제영화제를 찾았을 때 “나는 나치다”라는 문제적 발언으로 칸에서 추방됐던 그의 이력은 히틀러와 나치의 살육을 예술적 행위와 연결하는 잭의 언급을 한낱 궤변이라고 무시할 수 없게 한다(흥미로운 것은 나치 발언 해프닝이 있었던 칸국제영화제에서 이러한 문제적 주장을 담은 이 작품을 초청해 상영했다는 점이다. 이는 거장으로서 라스 폰 트리에의 지위를 증명하거나 화제가 될 만한 논쟁에 굶주린 칸국제영화제의 현주소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성서를 읽는 악마
하지만 <살인마 잭의 집>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라스 폰 트리에 자신의 영화적 세계(또는 자기변명)를 잭의 입을 통해 강변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에 대한 비판과 논쟁까지 영화의 일부로 끌어들이고 있다는 점이다. “옛 성당엔 신만이 볼 수 있는 예술품들이 숨 겨져 있고, 그 뒤엔 위대한 건축가가 있죠. 살인도 마찬가지입니다”라는 말을 시작으로, 잭은 끊임없이 살인을 예술적 행위와 연관짓는다.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와 글렌 굴드의 연주를 인용하면서 잭은 자기 존재의 필연성을 주장하거나 자신의 광기를 예술적으로 뒷받침하려 한다. 더 나아가 잭이 자신의 살인 행위를 두고 동행하는 노년의 남자 버지(브루노 간츠)와 논쟁하는 장면에서 “아이까지 끌어들이는 건 예민한 사안 아닌가?”라고 버지가 묻자 잭은 “저 역시 예민한 존재입니다”라고 답한다. 또 사냥물을 전시하는 옛 전통을 계승하는 듯한 장면에서는 “행실이 아닌 작품을 봐주세요”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이 장면들은 이 영화에 쏟아질 ‘예정된 비난’에 대한 라스 폰 트리에의 ‘선제적 응답’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렇다고 <살인마 잭의 집>이 단지 자신의 광기를 합리화하려는 잭의 궤변이나 라스 폰 트리에의 자기변명을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영화로 완성된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이의 많은 부분은 잭과 동행하는 노년의 남성 버지,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베를린 천사의 시>(1987)에서 누구보다 인간을 동정하고 사랑하는 천사 다미엘을 연기했던 ‘브루노 간츠’ 덕분이다. 세상을 날던 천사가 인간이 되어 자신의 능력을 잃고 오히려 곡예사 인간이 하늘을 날 수 있도록 도와주며 행복한 미소를 짓던 다미엘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라스 폰 트리에가 잭을 지옥의 길로 안내하는 사자 역할로 브루노 간츠를 캐스팅한 이유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잭과 버지는 동일한 주제에 대해 의견을 나누지만, 그 대화는 끊임없이 어긋나거나 대립한다. 특히 사랑에 대해 이야기할 때 두 사람은 서로에게 이야기하는 것이 맞을까 싶을 정도로 어긋난 대화를 주고받는다. 라스 폰 트리에는 예술의 근본을 사랑이라고 믿는 버지와 살인을 예술과 동격이라 믿는 잭의 간극을 좁힐 생각이 없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그 간극 앞에 잭이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일이다. 라스 폰 트리에는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무신론자가 아니라 신의 세계에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긍정하는 쪽에 더 가깝다. 라스 폰 트리에가 그런 자신의 존재를, 그리고 자신의 예술관과 세계관을 긍정하려 할 때, 그것은 ‘불화’의 형태로 그 모습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 버지의 말마따나 <살인마 잭의 집>은, 아니 라스 폰 트리에의 영화는 “악마가 성서를 읽듯” 만들어진 영화다. 물론 그 불화의 끝은 언제나 파국이다.
빛 속의 어둠
하계로 향하는 여정이자 일종의 고해성사로 이뤄지는 기억 여행임에도 우리는 잭이 왜 살인을 벌이는지 좀처럼 이해할 수 없다. 이는 마치 <멜랑콜리아>에서 저스틴(커스틴 던스트)을 우울에 빠지게 한 원인, 즉 그녀가 상실한 대상이 무엇인지 알 수 없던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고 보면 라스 폰 트리에의 세계는 인과율이 아니라 운명론의 세계다. 즉 어떤 인물이 어떤 행동을 하는 것은 특정한 이유가 있어서라기보다는, 그것이 하나의 운명처럼 인물에게 부여되었기 때문에 그것을 하거나 그렇게 되는 쪽에 더 가깝다는 것이다.
연쇄살인마를 다룬 일반적인 영화는 인물의 행동에서 심리학적, 병리학적 원인을 찾으려 하지만, 그것은 라스 폰 트리에의 관심사가 아니다. 잭은 어린 시절부터 자신을 매혹한 네거티브필름(현상 이전의 필름)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빛 속의 어둠, 그러니까 빛에 내재한 악마적 속성에 대한 애정을 고백한다. 태초에 빛이 있었다면, 그 속에 어둠도 함께 있었던 셈이다. 빛의 징후로서의 어둠, 신의 징후로서의 악마, 문명의 징후로서의 신경증. 어쩌면 버지의 징후로서의 잭.
중요한 것은 잭이 살인을 저지르는 이유가 아니라 그 과정에서 보이는 변화다. 우리가 잭에 대해 확실히 알 수 있는 한 가지 사실은 살인이 계속될수록 그의 강박증이 점차 치유된다는 점이다. ‘두 번째 사건’에서 살인 이후 지우고 또 지워도 어딘가 피가 묻어 있는 듯 한 환각에 시달리는 잭을 보여주는 장면은 영화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 그 자체로 너무나 매혹적이다. 이 장면 이후에도 가끔씩 청결강박에 시달리는 잭의 모습을 보여주기는 하지만, 점차 대범해지는 시체 처리와 함께 그의 강박도 점점 희미해진다. 잭의 말마따나 그에게 살인이 해방이라면, 라스 폰 트리에에게 영화적 금기의 살인은 자신을 그토록 오랫동안 괴롭히고 있는 정신적 고통에서 (일시적으로나마)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해방구가 아니었을까. 살인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금기를 어기는 것이고 보면, 라스 폰 트리에가 연쇄살인마의 이야기에 당도한 것 역시 하나의 운명인지도 모르겠다.
라스 폰 트리에의 집
영화의 제목에서부터 드러나듯 이 작품에서 중요한 것은 잭이 어떤 집을 짓는가 하는 것이다. 집을 짓는 기술자로서 건축가를 꿈꾸는 잭은 집을 짓고 허물기를 반복한다. 잭은 고딕 양식을 높게 평가하면서 “건축 자재가 지닌 고유한 의지를 그대로 따른 건축물이 가장 아름다운 법”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이 과연 건축물로서 충분히 아름답다고, 그것을 통해 기술자였던 잭이 건축가의 꿈을 이뤘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어쨌든 잭은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집을 짓는 데 성공한다(그 집에 대한 충격과 판단은 온전히 관객의 몫이니 이 글에서 언급하지 않겠다). 하지만 우리는 잭이 지은 건축물의 성공과 실패를 이야기하는 것과 무관하게, 잭이라는 인물의 고유한 의지를 자재로 삼아 자신만의 집을 지으려 했던 라스 폰 트리에의 시도가 그 목적지에 제대로 당도했는지를 물어야 할 것이다. 어쩌면 그것이 이 영화에 대한 가치평가와 관련한 것일지도 모른다. 영화의 엔딩에 흘러나오는 곡은 레이 찰스의 <Hit the Road Jack>이다. 노래 제목처럼 이제 잭은 떠났다. 당신은 잭과 함께 라스 폰 트리에가 그렇게 떠나기를 바라는가, 다시 돌아오기를 바라는가.
● 이 글을 쓰던 날 브루노 간츠의 부음을 들었다. <베를린 천사의 시>의 천사 다미엘, <영원과 하루>의 시인 알렉산더가 그렇게 우리 곁을 떠났다. 기억하겠다는 약속으로 그에 대한 헌사를 대신하고자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