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증인>으로 보는 장애인에 대한 우리 사회의 시선 혹은 인식
2019-02-28
글 : 송형국 (영화평론가)
한발 나아갔지만 갈 길 또한 멀다

현대사회의 표면에서 장애인에 대한 노골적인 혐오나 차별은 줄어들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보이지 않는 배제와 분리, 그로 인한 불평등은 얼마나 나아지고 있을까. 이 글은 작품 비평이라기보다 ‘영화 <증인>을 중심으로 본 한국 사회의 장애인 타자(他者)화 문제’라는 주제의 에세이에 가까울 것이라는 점을 우선 밝히고 시작하려 한다.

두개의 비슷한 풍경이 있다. 먼저 다큐멘터리 <어른이 되면>(자폐 장애를 지닌 동생을 격리시설에서 데리고 나와 지역 공동체에서 함께 살아가는 경험을 담은 빼어난 작품이다)을 만든 장혜영 감독 자매의 이야기다. 지난해 9월 청와대에서 열린 발달장애인 초청 간담회에서였다. 고관대작들은 “우리 장애우들”, “우리 장애 친구들”이라는 시혜적 호칭으로 말을 꺼내며 그들이 들은 장애인의 어려운 점을 나열했다. 장 감독은 “뭐라 설명해야 할지 모를 분노 혹은 실망을 느꼈다”고 털어놨다(CBS <세상을 바꾸는 시간, 15분> 강연, 유튜브 2018년 11월 19일). 그는 “대통령님, 우리는 불행이 아니라 불평등에 대해 이야기해야 합니다”라며 울먹였다.

다음은 골형성부전증으로 지체 장애를 지니고 있는 김원영 변호사의 명저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에 언급된 장면이다. 국회의원 등으로 구성된 장애인 후원 행사에서 한 실무자가 인사한다. “처음 재활원에 갔을 때, 가슴이 먹먹했어요. 아이들이 천사 같은 눈을 하고 저를 바라보는데, 이 아이들에게 꼭 희망이 되어주고 싶었어요. 제 삶이 얼마나 감사하고 고마운 것인지 생각했고요.” 모임에 초대돼 앉아 있던 김 변호사는 “나는 당시 전혀 ‘천사처럼’ 생기지도 않았거니와 내가 아는 재활원생들의 모습도 그러해 혼자 웃었다”고 썼다. 두개의 닮은 풍경은 이 사회의 대다수 관료들과 언론이 장애인을 대하는 여전한 태도- 동정과 시혜의 시선으로 가득한-를 드러낸다.

자폐인은 거짓말을 할 수 없을까?

<증인>은 비장애인이 흔히 저지르는 장애인 타자화의 잘못을 알고 있는 영화다. 살인으로 의심되는 사망사건 피의자를 변호하는 순호(정우성)가, 사건의 유일한 목격자이자 자폐 장애인 고교생 지우(김향기)를 증언대에 세울 목적으로 접근한다는 설정이다. 순호가 지우 어머니(장영남)를 달랜답시고 말한다. “지우, 워낙에 똑똑하잖아요. 말도 똑 부러지게 하고 퍼즐은 또 얼마나 잘 푸는데요. 자폐만 아니었으면 참 좋았을텐데….” 약 3초간 침묵이 흐른 뒤 어머니의 답이 돌아온다. “(자폐가 없다면) 그건 지우가 아니죠.” 순호의 성장 드라마로서 영화는 ‘선하지만 무지한’ 비장애인의 오류와 각성의 과정을 보여준다. 순호는 ‘개별자’로서 말 잘하고 퍼즐 좋아하는 지우의 특성을 알면서도 자폐만큼은 주류 비장애인과 다른 ‘집단’의 특성으로 인식한다. 이에 비해 지우 모녀에게 서로는, 자폐라는 특성을 포함해 지난 15년간 하루하루 쌓인 기억의 총합으로서의 가족이다. 이처럼 <증인>이 인물의 장애 유무를 떠나 세상에 하나뿐인 개별자로서 지우의 삶에 정체성을 부여하려 애썼다는 점을 전제로, 좀더 욕심낸 논의로 들어가보자. 나는 어떤 작품에서 장애인을 비장애인과 다른 ‘집단’으로 인식하는 데 기여하는 기제가 작동한다면 과할 만큼 예민한 기준으로 이를 점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트집이나 잡을 요량으로 영화 속 ‘옥에 티’를 찾는 일과는 다른 층위에 놓인 문제다. 어떤 영화에서 형사들이 잠복근무를 위해 치킨집을 차리는 설정이 있을 경우, 이것이 실제 경찰의 현실과 얼마나 부합하느냐를 묻는 건 재미없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 의미가 없다. 하지만 어떤 작품은 작자의 의도와 무관하게 약자를 위한답시고 비주류에 대한 편견을 조장한 적이, 최근에도 있었다. <증인>의 전개 양상을 돌다리 두드리듯 꼼꼼히 짚어야 하는 이유다. 영화 속 대사처럼 자폐 장애인은 거짓말을 못하는가. 자폐 장애인은 초능력과도 같은 재능을 지녔는가. 특별한 능력이 있다면 숱한 영화들이 그랬듯 사건 해결의 수단으로 이를 활용하는 일은 윤리적으로 옳은가.

팩트 체크의 필요를 느껴 전문가를 수소문했다. 신윤미 아주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와 연락이 닿았다. 만일 “자폐인은 거짓말 못해요”라는 대사가 자폐 장애인에 대해 일반화의 오류를 범한 것이라면 “여자들은 모두 이러하다” 또는 “흑인들은 죄다 저러하다”는 말과 마찬가지로 잘못된 타자화를 저지른 셈이 된다. 신 교수는 “거짓말이란 게 상대방의 마음을 파악한 뒤 그 입장을 조절하기 위해 속이는 능력이므로 타인에 대한 이해력이 떨어지는 자폐의 특성상 일부 가능한 설정”이라면서도 “학습과 훈련에 의해 사회성을 비롯한 여러 기능이 좋아지기 때문에 자폐인이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말하기는 어렵다”고 덧붙였다. 지우는, 아마도 어머니의 피땀 어린 사회성 훈련에 따른 것으로 추정되는, “무례했다면 죄송합니다”라는 정도의 사과를 건넬 줄 아는 자폐인이다. 극중 검사(이규형)의 단정적인 대사는 장애라는 특성 이전에 한 사람의 인간으로 지우를 그리고자 한 이 영화의 취지와 본의 아니게 어긋난다. 자폐 장애인은 얼마나 특별한 능력을 지닐 수 있는가. 신 교수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능력을 보여주는 경우가 꽤 있다”며 “1970년 8월 29일이 무슨 요일인지 물었을 때 어떤 연산 과정을 거치는 게 아니라 사진으로 찍어낸 것과 같은 이미지를 떠올려 0.1초 만에 정확한 답을 내놓는 경우도 봤다”고 전했다. “시각 영역에 의한 기억이나 숫자를 파악하는 극중 설정이 불가능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도 “대다수 자폐 장애인은 지능이 떨어진다”라며 “과거 <레인맨>(1988) 개봉 당시 자폐인이 천재인 것처럼 인식된 현상이 일부 있었는데, 사회적 편견이 생길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특혜가 아닌 권리를 위한 기준

이 영화의 진심을 충분히 이해하면서도 온전히 지지하기 어려운 이유가 있다. 드문 확률로 지우와 같은 시청각 능력을 갖고 거짓말 또한 못하는 장애인이 있다 해도, 이를 사건 전개와 해결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생각 때문이다. 더욱이 지우의 청력은 극의 위기와 감정의 고조를 위해 ‘단계적’으로 그 능력을 드러내면서, 종반부 반전 이후 가장 결정적인 증언을 내놓도록 ‘배치’된다. <증인>을 끌고 온 진심이라면 이런 장치가 아니어도 극적으로 사건 해결이 가능한 시나리오는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은연중에 타자화된 약자는, 주류 엘리트에 의해 동정과 시혜의 시선 안에 갇힌다. 결국 베푸는 강자-혜택받는 약자의 불평등 구조가 고착화한다. ‘불쌍한 사람 도와주면 좋은 것이지 뭘 그리 어렵게 생각하느냐’는 이들의 무지가 여전히 버티고 있는 이 사회에서, <증인>의 장애인에 대한 인식은 한발 나아갔지만 갈 길 또한 멀다는 점을 확인시켜준다. 장애인들이 누려야 할 것은 특혜가 아니라 ‘같은 권리를 위한 다른 기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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