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알리타: 배틀 엔젤>과 <드래곤 길들이기3> 속 눈동자에 대한 단상
2019-03-06
글 : 송경원
알리타, 이상한 나라에 불시착한 만화적 존재
<알리타: 배틀 엔젤>

많이 다뤄졌지만 두편의 영화를 잇는 하나의 이미지가 계속 머리에 남았다. <알리타: 배틀 엔젤>(이하 <알리타>)과 <드래곤 길들이기3>(이하 <드래곤3>)를 본 후 한동안 누군가의 눈을 이렇게 오랜 시간 바라본 적이 있었나 싶었다. 두 영화가 보여준 빼어난 기술적 성취나 그에 반해 상대적으로 아쉬운 서사는 이미 여러 차례 지적되었으니 여기서 굳이 보태지 않겠다. 그보다 관심을 끈 것은 마치 일본 만화 캐릭터처럼 눈이 얼굴의 절반쯤 차지하고 있는 것 같은 얼굴들이 생각보다 덜 어색하게 다가왔다는 점이다. <알리타> 예고편을 봤을 때 걱정됐던 기이함과 어색함이 정작 영화에서는 그다지 거북하지 않았다.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어색하지 않아서 이상했다. 알리타(로사 살라자르)를 제외하곤 모두 정상적인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는데 알리타 홀로 과장되어 있음에도 같은 화면 속에서 위화감 없이 섞인다는 것은 생각해보면 신기한 일이다. 뒤늦게 <드래곤3>를 본 뒤 투슬리스의 커다란 눈동자에서 알리타의 흔적을 발견하고 나름의 답을 얻을 수 있었다. 이건 디지털 캐릭터의 얼굴과 눈동자가 미처 담지 못한, 어쩌면 영원히 담을 수 없다며 금지당한 감각에 관한 이야기다.

전능한 시선의 그물에 걸리지 않는 것들

<알리타>는 인간의 조건을 탐색하는 어두운 원작과는 다른 길을 걷는다. 낡았지만 여전히 유효한 이 질문은 답을 갈구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질문에 도달하는 걸로 마침표를 찍는, 과정의 서사다.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왕>은 ‘살인범은 누구인가’에서 출발해서 ‘살인범은 나인가’라는 질문을 경유해 마침내 ‘나는 누구인가’에 도달하는 순간 이야기가 완성된다. 최근 부활한 <블레이드 러너 2049>(2017)가 그랬듯 존재의 근원을 묻는 서사는 대체로 이와 같다. 질문을 완성해나가는 과정에 필연적으로 관객의 동행을 요구하는 것이다. 반면 <알리타>는 ‘나는 누구인가’에서 출발하는 이야기다. 기억을 잃은 소녀 알리타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싶어 하지만 여기에 과정 같은 건 없다. 왜냐하면 <알리타>와 <드래곤3>는 질문의 답을 ‘이미지’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말로 설명해버리기 때문이다. 여기엔 그저 의무적인 질문과 자판기 같은 대답이 있을 뿐이다. 알리타가 위기에 처하는 순간마다 눈동자의 이미지를 통로로 하여 정확한 답들이 제시된다. 혹은 주변 인물들의 입을 빌려 설명된다. 이건 <드래곤3>의 히컵도 마찬가지다. 혼자 부족을 책임지고자 하는 히컵의 고민과 무게, 정들었던 드래곤과 예정된 이별을 해야 하는 슬픔 등은 준비된 정답처럼 옆에서 제시, 설명된다. 관객이 옆자리에 앉아 함께 고뇌하며 비어 있는 정보들을 메울 틈 따윈 없다. 두 영화의 서사가 편편하고 조급하게 느껴지는 건 그 때문이다. 손쉽게 주어지는 답은 그 자체도 별다른 의미가 없고, 있더라도 구태의연하다. 서사는 최소한의 알리바이이자 부차적인 것에 불과한 셈이다.

그렇다면 두 영화가 질문에 이르는 과정 대신에 채워넣은 것은 무엇인가. 다름 아닌 움직임이다. 다만 그건 의미로 확장되는 카메라의 형식적 운동이 아니라 어트랙션 장치의 쾌감으로서의 동작에 제한된다. 정확히는 3D영화가 구현할 수 있는 공간의 움직임. <드래곤3>는 숏들의 호흡이 꽤 길다. 공간 움직임, 카메라 이동, 빠르게 활강하는 드래곤의 동작들을 놓치지 않고 다 담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알리타>의 3D에서 돋보이는 점은 속도 조절이다. <알리타>의 모터볼 장면은 빠르고 박진감 넘치게 구성되어 있지만 실상 물리적인 속도는 그다지 빠르지 않다. 적어도 인간의 시선으로 인지할 수 있는 속도를 넘어서지 않는다. 어떤 액션영화들이 눈으로 쫓을 수 없는 속도의 합을 쏟아놓는 반면 <알리타>와 <드래곤3>의 동작들은 모든 것이 ‘잘’ 보인다. 그럼에도 속도가 빠르게 느껴지는 이유는 슬로모션과 패스트모션을 적절하게 뒤섞어 속도 ‘감각’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두 영화의 3D는 대상이 아니라 공간의 움직임 전체를 탐욕스럽게 담아낸다. 그렇게 카메라가 전능해질 때 역설적으로 카메라에 포착된 것들은 거꾸로 빛을 잃어간다. 대상의 모든 것이 너무 잘 담겨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아이러니. 재미있는 놀이기구는 될 수 있지만 흥미로운 관찰, 질문의 대상은 될 수 없다. 그렇게 <알리타>와 <드래곤3>는 애초부터 전통적인 영화미학보다는 전능한 시선이 공간을 휘감는 어트랙션의 세계에서 출발한다. 재미있되 미학적 가치를 이야기할 거리는 못 된다. 알리타의, 투슬리스의 눈동자를 마주하기 전까진 그렇게 생각했다.

두 개의 얼굴, 그리고 정확한 눈동자

<알리타>는 기이할 정도로 얼굴과 눈동자에 집착하는 영화다.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니다. 인간과 사이보그, 인간다움의 조건 등을 물리적으로 표현하기 그만큼 적절한 장소도 드물다. 얼굴은 시선의 장소이며 눈은 영혼의 창이라고 하지 않던가. <알리타>에는 두 가지 얼굴이 등장한다. 하나는 CG로 재창조된 알리타의 얼굴, 다른 하나는 사진에 뿌리를 둔 인간의 얼굴이다. 알리타의 눈은 얼굴의 4분의 1 정도의 면적을 차지하는, 전형적인 만화적 이미지에 기반을 두고 있다. 피부 질감, 근육 움직임 등은 실제 사람에 근거를 두고 있지만 조형적으로는 비현실적인 이미지다. 반면 헌터 워리어들은 CG로 그려진 기계 몸과 달리 오직 얼굴만 진짜 사람의 형태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A.I.>(2001)의 사이보그들처럼 그려진 몸에 찍힌 얼굴을 하고 있는 셈이다. 물론 이도 박사(크리스토프 발츠), 휴고(키언 존슨)처럼 애초부터 사람인 존재는 말할 것도 없다. 요컨대 이 영화는 얼굴 묘사를 중심으로 봤을 때 인간과 사이보그로 나뉘는 것이 아니라 알리타(화성연합단체)와 알리타가 아닌 것들로 구분되는 세계를 그린다.

알리타의 액션은 기본적으로 기계 신체를 난도질하며 쾌감을 구축한다. 피와 살 대신 철과 불꽃이 튀는 기계의 해체는 슬래셔 무비의 그것과 닮은 면이 있다. 재밌는 것은 항상 마무리는 얼굴의 훼손으로 정해져 있다는 점이다. 기계 팔과 다리, 심지어 몸통을 절단해도 그건 대체 가능하다. 대체 불가능한 곳은 아마도 동력이 되는 심장과 뇌가 있는 머리일 텐데 영화는 유독 머리를 훼손하는 걸로 마무리된다. 헌터 워리어들이 범죄자를 잡은 걸 증명하는 것도 머리고, 완전한 기계와 인간을 기반으로 한 사이보그를 구분하는 것도 얼굴의 유무다. 알리타가 헌터 워리어 자팡(에드 스크레인)에게 얼굴에만 돈을 투자했다고 놀리는 장면은 조롱이라기보다 본질을 지적하는 것처럼 들린다. 이도 박사가 알리타를 처음 폐기장에서 주울 때 알리타를 하나의 존재로 인식하는 것도 얼굴과 뇌의 유무다. 이도 박사가 알리타의 얼굴을 들고 마주하는 오프닝은 인간의 영혼이 머무는 장소,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조건은 오직 얼굴에 있음을 선언하는 것처럼 보인다.

알리타는 여기서 한번 더 나아가 눈의 크기로 자신의 정체성을 구분한다. 상당 부분 원작에서 차용해왔음을 감안해도 영화는 유달리 눈에 집착한다. 알리타가 자신의 과거를 떠올리는 플래시백이 총 3번 등장하는데 과거의 기억 속으로 들어가는 장면의 도입은 항상 알리타의 커다란 동공을 클로즈업해 들어가면서 이뤄진다. 육체적인 대립 구도의 한축인 거대 사이보그 그루위시카를 물리칠 때 눈을 찔러 훼손시키는 것이나 진정한 적인 노바가 부하의 정신을 지배할 때 파랗게 빛나는 눈을 통해 이를 알려주는 것, 노바가 마지막에 가서야 안경을 벗고 자신의 눈을 드러내는 건 노골적이라 할 만큼 의도된 상징들이다. 알리타의 커다란 눈망울은 알리타를 다른 존재와 구분짓는 기준 이상의 의미가 있다. 여기서 질문, 우리는 어떻게 이질적인 알리타의 눈망울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제작진은 제임스 카메론의 조언을 따라 동공의 크기를 좀더 확장하면서 이질감을 해소했다고 하는데 과연 그것이 전부일까.

2020년 공개 예정인 도쿄 디즈니랜드 <미녀와 야수>의 애니매트로닉스.

알리타의 눈동자를 보며 동시에 두 가지 다른 체험이 떠올랐다. 하나는 <드래곤3>의 투슬리스의 커다란 눈망울, 다른 하나는 도쿄 디즈니랜드에서 2020년 공개 예정인 <미녀와 야수>의 새 어트랙션이다. 애니메이션 <미녀와 야수>의 캐릭터 디자인을 그대로 구현한 로봇이 관람객을 안내하는 이 어트랙션은 애니메이션 실사화와 정반대의 작업이라 할 수 있다. 말 그대로 애니메이션 캐릭터를 위화감 없이 스크린 바깥으로 끄집어내고자 하는 프로젝트인데 눈앞에서 애니메이션 홀로그램 영상을 보는 것처럼 위화감 없는 움직임을 현실에서 구현한다. 커다란 눈동자와 거대한 얼굴을 가진 미녀 벨은 애니메이션과 같은 감각으로 현실에 존재하는 것이다. 이 독특한 체험은 우리가 잊고 있던 한 가지 사실을 환기시킨다. 관객이 눈앞의 대상을 믿고 받아들이는 것은 그것이 찍은 것인지, 그려진 것인지 등과 같은 질료의 문제가 아니라 오로지 학습과 체험에 근거한다. 그림 속에서 툭 튀어나온 듯한 캐릭터, 현실에서 불가능한 낯선 조형일지라도 일단 익숙해지면 ‘그것이 거기에 있음’을 받아들이는 데 큰 어려움이 없다. 미녀와 야수의 캐릭터가 갑자기 현실 한가운데 떨어진 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현실을 모방한 세계와 만화적인 캐릭터가 공존하는 <알리타>의 방식이 이상할 것도 없다. 요컨대 초반 짧은 시간 어색함을 거친 후 알리타의 존재방식이 학습되고 나면 위화감은 금세 사라진다.

그렇다면 <알리타>가 초반에 캐릭터 디자인을 학습, 공감시키는 방식은 무엇일까. 여기서 재미있는 분열이 발생한다. 알리타의 커다란 눈동자, 더 커진 동공은 알리타의 감정을 정확하게 묘사한다. 동공의 크기, 수축하는 속도와 눈망울의 형태는 하나의 기호가 되어 마치 아기 같은 알리타의 감정을 투명하게 알려준다. 관객이 알리타의 디자인을 불쾌해하지 않고 금방 빠져드는 결정적 이유도 여기에 있다. 처음엔 잠시 주변과 다른 디자인에 어색함을 느낄 수 있지만 몇 차례 눈의 언어를 접하다 보면 어느새 귀여운 대상처럼 친밀감을 느낄 수 있다. 이건 <드래곤3>도 마찬가지다. 투슬리스와 라이트 퓨어리의 눈망울은 동경, 놀람, 혼란, 그리움 등 정확하게 언어로 표시될 수 있는 감정들을 표현하고 있다. 비유하자면 이건 진짜 사람의, 동물의 눈동자라기보다는 차라리 팬터마임이나 기호에 가깝다. 요컨대 <알리타>와 <드래곤3>의 눈동자는 외형적으로는 극한의 리얼리티를 추구한 것처럼 보이지만 본질은 정확히 약속되고 학습된 기호들을 출력하는 모니터에 가깝다.

실제 피와 살을 가진 배우들의 눈은 그런 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눈은 영혼의 창’이라는 낯간지럽고 모호한 표현은 그것이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는 영역에 있다는 일종의 항복 선언 혹은 경탄이다. 카메라가 포획, 포착하는 얼굴은 역설적으로 의미가 정확하지 않기 때문에 유의미하다. 예컨대 현실 속 눈동자는 이른바 비어 있는 정보다. 비어 있는 얼굴은 유동적인 이미지들, 그러니까 끊임없이 연결되는 다른 정보와의 유기적인 연결과 흐름을 통해 의미를 획득한다. 눈망울의 형태, 얼굴의 근육, 사건의 상황, 장면에 주어진 음악 등이 결합하여 눈동자의 감정을 유추하도록 만드는, 몽타주의 출발선인 셈이다. 전통적인 의미의 ‘얼굴’ 안에서 <알리타>와 <드래곤3>에서의 눈동자처럼 정확한 기호로서 작동하는 건 다름 아닌 입술이다. “관객은 얼굴과 목소리의 불일치는 그런대로 참을 수 있지만 입술의 움직임과 말의 불일치에는 몹시 불편함을 느낀다.”(<영화 속의 얼굴> 중, 자크 오몽 지음) <알리타>와 <드래곤3>의 눈동자는 바로 이러한 입술을 닮았다. 요컨대 거대하고 정확한 형상의 눈동자는 실재하는 이미지의 모방이 아니라 언어와 동작의 일치를 요구하는, 기호의 영역에 있다. 어쩌면 그것이 그토록 커다란 눈동자가 필요했던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여기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은 ‘알리타’를 제외한 <알리타>의 다른 이미지들의 재현방식과 알리타의 존재방식이 분리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현재 CG로 그려진 세계, 디지털 이미지는 크게 두 가지 존재방식으로 나뉜다. 하나는 세계의 모방, 사진의 모방을 중심에 놓는 영화들이다. <아바타>(2009), <라이프 오브 파이>(2013),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2011) 등을 예로 들 수 있겠다. 이 영화들은 CG를 활용해 최대한 리얼하게, 정확히는 사진 이미지에 가깝게 묘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달리 표현하면 진짜(사진 이미지) 같은 이미지를 그려내되 스스로 가짜(그려진 것)란 사실을 은폐하는 영화들이다. 이 영화들이 사진 이미지의 모방에 집착하는 것은 포토그래픽이 주는 감각을 ‘영화적인 것’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혹은 20세기 사진적 재현의 기억이 영화적인 것으로 학습되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이런 종류의 영화들은 사진 이미지와 실제 세계의 감각들을 최대한 모방하고 재현한다. 따라서 상상의 세계를 다루되 기본적인 물리법칙은 모두 현실 세계에 뿌리를 두고 있고, 존재하지 않는 감각은 재현하지 못한다. 다른 하나는 그것이 그려진(만들어진) 세계라는 것을 구태여 숨기지 않는 영화들이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마이 리틀 자이언트>(2016)나 <레디 플레이어 원>(2018), 기예르모 델 토로의 <판의 미로: 오필리아와 세개의 열쇠>(2006) 등을 예로 들 수 있겠다. 이 영화들은 자신이 구현한 동화, 상상, 환상이 그려진 것, 꾸며진 것, 만들어진 것임을 굳이 숨기지 않는다. 달리 표현하면 가짜(그려진 이미지)를 통해 진짜(서사의 결과물)로 나아가고자 하는 영화들이다. 이런 영화들은 존재하지 않는 대상을 빌려와 관객이 개입할 자리를 최대한 마련하는, 일종의 거대한 은유에 가깝다.

<알리타>는 그 중간 어딘가에 어정쩡하게 서성인다. 다만 스스로의 방황을 자각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고철도시의 배경을 비롯해 영화 속 모든 이미지는 현실 세계를 모방하는 전자를 추구하는 반면 알리타만은 일부러 ‘그려진 것’으로서의 이질감을 도드라지게 만드는 후자를 택했다. 나는 이것이 의도된 충돌이라고 생각진 않는다. 그저 이 정도는 괜찮겠지 하는 안일함, 원작의 캐릭터 디자인에 충실하고픈 욕망의 적당한 타협의 산물이 아닐까 짐작해본다. 하지만 그 우연한 결합으로 빚어진 결과는 꽤 흥미롭다. ‘알리타’의 정확한 눈동자가 하나의 언어로 이해되고 학습되는 과정은 애니메이션의 방식을 취하는 반면, 나머지 세계는 모두 사진적 이미지에 근거를 두기 때문에 기이한 충돌이 발생하는 것이다.

모방된 세계에서 알리타가 살아남는 법

알리타를 두고 디지털 캐릭터의 진화라고 말할 수 있을까. 사실 알리타의 기술적 성취는 그다지 놀랍지 않다. 얼마나 진짜(사진) 같은가를 기준으로 본다면 <혹성탈출>의 시저가, <라이프 오브 파이>의 호랑이 리처드 파커가 훨씬 사실적이고 진즉에 앞서 나갔다. 하지만 알리타는 캐릭터의 구성방식을 애니메이션에 기반을 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밖의 나머지는 사진적 이미지를 지향한다. 비유하자면 기계의 얼굴과 사람의 몸이 결합한 기괴한 사이보그라고 할까. 그 순간 알리타는 (애니메이션의) 정확한 눈동자를 가지고 있으면서 동시에 사진적인 현실감도 입혀진 기묘한 존재로 거듭난다. 혹은 착시가 발생한다. 기묘하지만 감정적으로 동화되고 받아들여지는, 분열된 틈새에서 발견한 디지털 이미지의 또 다른 가능성(혹은 위험성). 다만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알리타는 <혹성탈출>의 시저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똑같이 ‘그려진 것’이라 할지라도 사진의 모방을 뿌리에 둔 이미지와 캐릭터의 형상화에 근간을 둔 이미지, 두 가지는 구분되어야 한다. 알리타의 눈동자는 시저보다 더 사실적이고 더 친절하며 더 감정적이다. 본래라면 그로 인해 실제 세계의 광채를 완벽하게 상실해야 마땅하다. “지나치게 얼굴을 바라보면 그 얼굴의 이미지를 잃어버린다”고 했던 자크 오몽의 말처럼 사진 이미지에 존재 근거를 둔 시저의 눈빛은 정확해질수록 비어 있는 얼굴이 품고 있는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이 사라진다. 그런데 알리타는 예상치 못한 방향(애니메이션 캐릭터와 사진적 배경의 혼종)에서 이를 우회해 어떤 생명력, 캐릭터의 부피를 얻는 것 같다. 정형화된 패턴과 표정에도 불구하고 알리타의 얼굴과 눈동자가 마치 월·E의 그것처럼 풍성하게 느껴지는 건 그 때문이다. 사진적 이미지라는 이상한 나라에 불시착한 만화적 존재. 그렇게 영화의 서사가 편편해질 때도 알리타만은 살아남는다. 우연이 빚어낸 돌연변이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대개 진화의 역사는 그런 식으로 가능성의 가지를 늘려나갔다는 걸,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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