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세 여자의 역학 관계로 굴러간다는 점에서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가 기억에서 불러내는 영화는 <이브의 모든 것>(1950)과 <외침과 속삭임>(1972)을 꼽을 수 있다. 코스튬 드라마 가운데에는 역시 18세기가 배경인 스탠리 큐브릭의 <배리 린든>(1975)이 으뜸이다. 자연광과 촛불만 이용한 조명, 클래식 음악의 전면적 사용, 격식 차린 서슬 퍼런 대사와 건조한 유머가 50년을 뛰어넘어 두 영화를 잇는다. 또한 2부 구성의 <배리 린든>은 아일랜드 청년 레드먼드 배리(라이언 오닐)의 극적인 신분 상승을 1부로, 전락의 과정을 2부로 다루는데, 상승과 하강의 궤적이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에서 교차하는 애비게일(에마 스톤)과 사라(레이첼 바이스)의 운명에 견줄 만하다.
02/10
<조지 왕의 광기>(1994)까지 갈 것도 없이 폐위된 폭군을 거듭 그리는 국내 사극만 보더라도 ‘미친 군주’는 대중문화가 은근히 사로잡힌 주제다. 최근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킹덤>에서는 급기야 왕이 좀비 역병의 근원이다.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이하 <더 페이버릿>)의 앤 여왕(1702~14 재위)도 갑자기 역정을 내고 자기파괴적으로 행동한다. 그러나 한 걸음 다가가 들여다보면 <더 페이버릿>의 시나리오와 배우 올리비아 콜먼은 이 인물을 종잡을 수 없는 광인으로 규정하지 않는다. 특히 올리비아 콜먼의 본능적 균형감은 앤 여왕을 요르고스 란티모스 영화를 통틀어 가장 복잡한 인물로 만든다. 앤은 여섯살 아이처럼 응석을 부리고, 총신 사라에게 휘둘리지만 결정적 순간에는 “내가 군주다”라는 명제를 놓지 않는다. 만만히 보여 마음 놓게 했다가 상대가 선을 넘으면 늦기 전에 밀어낸다. 여왕의 불건강한 상태를 긴 설명 없이 대뜸 이해하게 만드는 대사는, 17명의 자식을 잃었다는 회고다. 이 끔찍한 숫자는 역사적 사실이다(19명이라는 기록도 있다). 앤은 17번 임신했지만 살아서 태어난 아이는 다섯뿐이었고, 그중 가장 긴 수명을 누린 왕자가 11살에 죽었다. 감히 상상할 수도 없다. 성인이 된 후 대부분 기간을 임신 중이거나 유산 후유증을 앓거나 자식을 애도하며 보낸 여성의 삶이란 어떤 것일까? 신화 속 왕비 니오베는 다복함을 신 앞에서 자랑하다 노여움을 사서 14명의 아들딸을 잃은 슬픔으로 돌이 됐다. 그러나 앤은 17명의 아이를 묻고 남편까지 영화의 배경인 1708년에 여읜 채 군주의 임무를 계속 수행해야 했다. 게다가 <더 페이버릿>이 묘사한 대로 통풍, 고혈압 등 지병으로 항상 고통받았다. 영화는 흐뭇하게 즐기다가 돌연 진노하는 앤 여왕을 종종 보여준다. 어쩌면 여왕은 불행에 중독돼 감각적 쾌락을 즐기는 자신을 용납하지 못한게 아닐까? 육체적 관계를 포함했느냐는 차치하고 앤 여왕은 실제로 소녀 시절부터 친구였던 말보로 공작부인과 그를 대체한 애비게일 마셤에게 크게 의지했다고 역사는 전한다. 여왕과 사라가 주고받은 서신 일부도 남아 열정을 증명한다 (몰리 부인, 프리맨 부인이라는 애칭도 편지에서 쓰인 그대로라고 한다). 하지만 영화가 보여주듯 앤은 육신이 무너져 내린 말년에도 부지런히 문서를 읽고 공무를 처리했다. 본래 왕위 계승 서열이 뒤였던 앤은 제왕 교육을 받은 바 없었고 준비된 군주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대 역사가들의 연구에 따르면 사상 최초로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통합군주였고 해외 영토도 획득한 앤은 선왕 윌리엄보다 더 업적이 많고 국민에게 지지받는 왕이었다.
<더 페이버릿>에서 세 여성이 벌이는 줄다리기는 감정 전쟁이며 권력 다툼이다. 여왕은 사라와 애비게일의 보필과 위안으로 군주로서 삶을 지탱하고자 하고, 사라는 친구의 사생활을 돌보며 정치적 신념과 가문의 이익을 실현하려 한다. 애비게일은 말 그대로 퇴락한 신분을 청산하는 데에 집중한다. 세 여자 중 누구도 현대적 의미의 페미니스트가 아니지만, <더 페이버릿>은 참정권이 주어지기 전까지 여성은 정치를 하지 않았다는 오해를 반박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더 페이버릿>이 독특하다는 인상은 처음부터 끝까지 관객이 마음을 주고 따라갈 캐릭터가 고정돼 있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여왕과 사라, 애비게일은 모두 절박하고 얼마간 이기적 이유로 타인을 이용한다. 셋 중 가장 성숙한 캐릭터인 사라는 애국심과 정치철학, 추진력을 지닌 한편, 여왕을 자기 방식으로 사랑한다. “폐하는 특별한 분이다”라는 대사는 진심으로 들린다. 단, 사라는 여왕의 능력을 불신한다. 본인이 공언하듯, 사라는 사랑에 한계가 있고 애국심에 한계가 없는 인물이다. 그런데 여왕은 사라가 반대이길 원한다. 절친한 앤 여왕과 사라의 공통점은 약자에게 약하다는 것이다. 애비게일은 그 점을 이용해 여왕의 내실로 파고든다. 애비게일은 정치에 개입할 만큼 한가로운 처지가 아니다. 그는 도박 빚에 팔리고 겁탈당하고 수시로 밀쳐져 진흙탕에 구른다. “나는 누구 편도 아니고 내 편이다. 우연히 당신네 당의 이익과 내 이익이 일치할 수는 있다.” 토리당 우두머리 할리(니콜라스 홀트)의 회유를 내치는 애비게일의 대답이다. 결혼으로 귀족 지위를 마침내 회복한 애비게일은 “이제 아무도 나를 건드릴 수 없어”라고 말한다. 모 아니면 도. 귀족이 되기 전엔 언제 구렁텅이에 버려질지 모르는 세계인 것이다.
02/11
내게 있어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인장 중 하나는 마지막 장면의 ‘음정’이다. <송곳니>(2009)는 간신히 폭군 아버지의 집을 탈출한 자식이 은신한 자동차 트렁크를 응시하며 끝난다. <더 랍스터>(2015)는 주인공(콜린 패럴)이 연인을 떠날지 자해할지 결정하려는 찰나에 마무리되고 <킬링 디어>(2017)는 살기 위해 한 식구를 제물로 바친 가족의 평범한 외식 풍경으로 막을 내린다. 란티모스의 라스트 숏은 결론을 내리거나 반전을 던지지 않는다. 대신 질주를 멈추고 “자, 여기까지 왔다. 이제 어찌할 텐가?”라고 못되게 묻는다. 인물과 관객은 귀를 찌르는 이명 같은 여운 속에 방치된다. 언젠가 나는 란티모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개기일식에 비유한 것 같은데, 아수라장 앞에서 천천히 눈을 감았다 뜨는 기분이기 때문이다. 비슷한 예를 굳이 찾자면 유명한 <졸업>(1967)의 엔딩이나 <마스터>(2012)의 라스트 신이 있다.
<더 페이버릿>은 사라가 팽팽한 삼각구도에 빠진 다음부터 급격히 탄력을 잃는다. 첫 관람에서는 시나리오의 약점이라고 여겼지만, 두 번째 보고 나서는 의도된 지루함이 아닐까 싶다. 여왕과 애비게일의 삶은 늘어져버렸다. 영화는 권태로운 오후 여왕의 침실에서 끝난다. 책을 읽던 애비게일은 여왕에게 자식 대신인 토끼 위에 발을 얹고 무심하게 잔인한태도로 누른다. 이를 알아차린 여왕은 불편한 몸을 끌고 도망치려는 듯 문쪽으로 향하다가 애비게일이 다가오자 그의 머리를 잡고- 토끼에게 애비게일이 그랬듯- 내리누른다. “나는 언제나 너를 밟을 수 있어”라고 안간힘을 다해 무언의 경고를 던진다. 두 여자의 클로즈업이 오버랩되고 거기에 프레임을 꽉 채운 토끼들의 이미지가 다시 포개진다. 앤과 애비게일은 침묵 속에 불현듯 깨닫는다. 이제부터 남은 생은 늘 이런 모양일 것이다. 행복도 욕망도 진짜는 없고, 죽은 자식을 대신하는 토끼들처럼 가짜 대체물만이 끝없이 증식해 이 세계를 뒤덮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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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버그
실사 배경과 3D애니메이션을 합성한 <슈퍼미니2>(2018)는, <니모를 찾아서>(2003)처럼 대양을 건너 아이를 찾아가는 무당벌레와 친구들 이야기로, 무당벌레와 흑개미의 우정을 그린 1편을 이어간다. 하지만 사람의 언어로 대사나 내레이션을 하지 않고, 눈썹도 그려넣지 않은 캐릭터들은 의인화와 거리가 멀다. 오히려 인간 문화를 투사하지 않는 데에서 <슈퍼미니2>의 서사적 참신함이 비롯된다. 모험을 주도하는 두 무당벌레가 모녀인지, 부자인지 특정할 필요가 없고, 곤충 캐릭터들의 희로애락은 담담하다 못해 시크하다. 풍선 여행은 <업>(2009)을, 거미 캐릭터 디자인과 환경에 관한 주제는 미야자키 하야오를, 무당벌레 커플의 교감은 <월·E>(2008)의 추억을 불러오지만, 곤충의 극히 작고 단순한 몸으로 감정과 의사를 표현하는 애니메이션은 본 적 없는 종류다. 개미의 더듬이, 무당벌레의 딱지날개, 거미의 다리가 얼마나 많은 말을 할 수 있는지 깨닫고 놀랄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