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영화]
[내 인생의 영화] 이한 감독의 <인생>
2019-03-12
글 : 이한 (영화감독)
사는 게 별건가

감독 장이머우 / 출연 공리, 갈우 / 제작연도 1995년

살다보면 누구나 힘든 시기를 맞는다. 그럴 때면 ‘왜 살지? 산다는 건 뭘까?’라고 묻게 된다. 정답은 없겠지만, 가장 힘들던 시절 나에게 산다는 건 이런 게 아닐까라고 생각의 꼬리를 물게 해준 영화가 장이머우 감독의 <인생>이다. <허삼관 매혈기>로 유명한 작가 위화의 <살아간다는 것>(한국 제목 <인생>)이 원작인 영화는 중국 격변기에 처한 한 남자를 통해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

부유한 지주의 외아들로 태어난 주인공 부귀(갈우)는 아버지의 재산을 밑천 삼아 도박을 즐기다 아내도 떠나고 재산도 탕진한다. 나락으로 떨어진 부귀는 절망하지만 곧 자신과 같은 지주 위치에 있던 사람들이 중국 공산당에 처형당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도박으로 재산을 잃지 않았다면 그 사형대의 주인공은 부귀 자신이었을 터다. 영화는 이런 식으로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펼쳐지는 한 남자(부귀)의 인생을 보여준다.

영화감독이 되겠다고 집을 나와 석관동 반지하 방에서 생활하던 나는 연출부 생활이 즐거웠지만 가난했다. 그러다 나의 의지와 상관없는 수해(水害)를 2년 연속 겪게 된다. 방이 완전히 물에 잠기는 바람에 모아두었던 비디오테이프와 책은 물론 가재도구들이 못쓰게 되어버렸다. 첫해는 “운이 없나 보네”라고 애써 웃어넘겼지만 다음해 또 수해를 당했을 때 내 주머니엔 천원이 있었고 경제적으로 무능한 자신에게 화가 치밀어올랐다. 영화를 그만둘 생각으로 당시 연출부로 일하던 배창호 감독님의 <정>이란 영화 현장을 말없이 이탈해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할까 고민하며 무작정 걷고 또 걸었다. 그러다 영화를 만들겠다는 꿈은 두 번째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영화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며칠 뒤 다시 현장으로 복귀했을 때 나의 영원한 스승 배창호 감독님은 껄껄 웃으시며 큰 소리로 “탕아가 돌아왔다!”라며 맞아주셨다. 그 뒤로는 영화를 그만둬야겠다는 생각을 한 적 없다. 그 시절 나를 위로해준 영화가 바로 <인생>이다. 힘들 때마다 틀어놓고 주인공 부귀를 보며 ‘그래 산다는 게 뭐 별건가?’라고 웅얼거리게 되는 영화. 내가 만드는 영화도 누군가에게 그런 위로와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꿈을 꾸게 한 영화다.

석관동 반지하 방 생활은 그 후로도 오랫동안 이어졌고, 내가 각색과 연출을 맡은 영화 <완득이> 때도 마찬가지였다. <완득이>의 영화화를 제안받았을 때 잠을 못 잘 정도로 설렜던 기억이 난다. 소설 <완득이>에 나오는 사람들이 내가 살던 석관동 사람들과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그런 말을 한 적 있다. 내가 그곳에 살지 않았다면 완득이를 판타지로 생각했을 거고 연출할 일도 없었을 거라고. 어느 강연장에서 한 여성이 날 선 태도로 <완득이>의 엔딩에 대해 지적한 적이 있다. “어떻게 그렇게 가난하고 힘든 사람들이 환하게 웃을 수 있느냐”고. 나는 자신 있게 대답했다. “제가 완득이가 살던 동네와 비슷한 곳에서 살아봐서 아는데요….”

● 이한 영화감독. <완득이>(2011), <우아한 거짓말>(2013), <증인>(2018) 등을 연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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