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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의 왕> 임정환 감독 - 낯선 곳에서 달리 보이는 사람들
2019-03-14
글 : 김소미
사진 : 오계옥

“우리한테 일어날 수 없는 일을 영화 안에서 하려다 보니까 결말까지 어떻게 가야 할지 모르겠어요.” <국경의 왕>은 시나리오를 쓰는 유진(김새벽)과 동철(조현철)의 타지 생활을 유유히 좇는다. 예전 같지 않은 마음과 관계 속에서 각자 방황하는 두 사람의 여정은, 감독의 표현에 따르면 “비극이지만 비극처럼 보이지 않아서 코미디다”. 전작 <라오스>(2014)에서 졸업영화를 포기한 영화과 학생들의 라오스 탐험을 보여준 임정환 감독은 이번 작품에서도 우연과 즉흥의 색채가 가득한 동유럽 모험담을 들려준다. 무모하고 기묘한 일이 벌어지는 전반부는 ‘국경의 왕’으로, 그보다 한층 현실적으로 보이는 후반부는 ‘국경의 왕을 찾아서’로 제목을 각각 붙였다. 재치 있고 엉뚱한 시선은 여전하지만, 인물들을 지배하는 정서는 한층 쓸쓸해진 모양새다. 임정환 감독은 어쩌면 <국경의 왕>을 통해 2부 제목처럼 잃어버린 무언가를 찾고 있던 것 아닐까. 지도를 버리고 낯선 여행지로 뛰어든 감독의 독특한 여행법이 사뭇 궁금해졌다.

-준비 단계 때 알려진 <국경의 왕>은 <라오스>의 멤버들이 타이의 어떤 왕을 찾아가는 이야기였다. 결과적으로 판이한 영화가 완성됐는데, 그사이 감독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

=우크라이나에서 (조)현철과 (정)혁기가 머무는 집은 실제로 그곳에서 공직 생활을 하고 있는 내 친구의 집이다. 항공료가 저렴한 비행편으로는 폴란드를 거쳐 우크라이나로 가는 편이 좋아서, 그렇게 세번 정도 혼자 배낭여행을 다녀왔다. 처음 갔을 때 폴란드 도심의 공원묘지를 산책 삼아 갔는데, 사각 프레임의 손 조형물이 있어 유심히 보게 됐다. 그런데 ‘키에슬롭스키’라고 적혀 있더라. 알고 보니 크쥐시토프 키에슬롭스키의 무덤이었다. 같은 곳에 여러 번 가는 걸 좋아하는데, 다음 여행 때도 마치 꼭 가야만 하는 장소처럼 그곳에 다시 가게 됐다. 뭐랄까, 일종의 계시 같았다. 때로는 그런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계시라고 믿으니 이곳에서 영화를 찍어서 반드시 잘 마무리지어야겠다는 책임감이 생겼다.

-전작 <라오스>는 타이와 라오스를, 이번 영화는 폴란드와 우크라이나를 배경으로 한다. 이국에서 영화를 만드는 데 특별히 끌리는 이유가 있나.

=해외라는 점이 중요하다기보다는 일상과 멀리 떨어진 공간이라는 점이 좋다. 익숙한 사람들이 낯선 공간에 떨어진 상황을 지켜보고 싶었다. 폴란드와 우크라이나 방문이 이번이 네 번째여서 이제는 아주 새롭게 느껴지지는 않더라. 익숙하고 친한 사람들을 낯선 장소에 데려가려고 한 건데, 막상 이번 여행에서는 공간이 편안하게 느껴지고 사람이 새롭게 느껴진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했다.

-<라오스>의 주인공이자 실제로 감독과 친한 친구들인 조현철, 정혁기 배우가 이번 영화에도 그대로 나온다. 영화 바깥에서 친밀한 관계를 나누는 사람들과 작업하는 데서 어떤 영향을 받나.

=아직 내가 잘 모르는 캐릭터를 쓰는 것이 두렵다. 이미 잘 아는 인물들에 관해서라면 그들이 낯선 환경에 처한 상황도 상상해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야기도 촬영도 즉흥적으로 진행하기 때문에 배우들을 실제로 잘 아는 것이 더욱 중요한 것 같다. 반대로 배우들이 나를 신뢰하는 것도 중요하다. 아무것도 알려지지 않은 상태에서 믿고 준비해야 하니까.

-그중 김새벽 배우는 새로운 멤버다.

=<초행>(2017) 때 조현철, 김새벽 배우가 함께한 인연으로 소개받았다. 평소 좋아하는 배우여서 고맙게 생각하며 만났다. 김새벽 배우 입장에선 곧바로 같은 배우와 또 작업하는 게 어려운 선택일 수 있을 텐데 다행히 승낙해주었다. 작업 초반에는 아직 제대로 알지 못하는 김새벽 배우의 성향이나 특징을 내가 함부로 판단하는 것 같아 두려움을 많이 느꼈고, 그래서 일부러 더 친해지려고 노력했다.

-1부 ‘국경의 왕’에서 주인공 두 사람이 각자 쓴 시나리오 속 이야기를, 2부 ‘국경의 왕을 찾아서’에서 그들이 만나고 엇갈리는 현실의 일들을 보여준다. 현실의 편린이 반영된 영화 속 영화를 먼저 보여준 까닭은.

=일말의 긴장감을 주고 싶었다. <국경의 왕>에는 현실과 영화, 영화 속 영화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돌고 돈다. 후반부 장면들을 통해 앞서 본 것들이 영화 속 영화라는 사실을 조금씩 자각하는 과정이 우리가 평소에 영화를 보는 경험과 더 가깝다고 느꼈다. 우리는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동안 영화를 의심 없이 받아들이다가, 극장의 불이 켜지면 그제야 영화와 우리를 분리하지 않나.

-처음부터 정해두고 시작한 내용도 있었나.

=영화 속 영화의 내용이 된 1부의 내용만 대강 구조를 잡고 폴란드로 떠났다. 2부는 아예 머릿속에 없었다. 현지에서는 매일 촬영한 분량을 바탕으로 촬영감독, 배우들과 다음날 어떤 걸 찍을지 회의했다. 나는 그날 저녁에 대사 중심으로 시나리오 써서 다음날 아침에 초안을 공유하는 식이었다.

-편집 역시 완전히 열어놓고 재배열하는 과정이었나.

=콘티뉴이티를 정해두지 않았기 때문에 생기는 단점인데, 막상 컷을 붙이면 연결이 어긋나는 경우가 꽤 있다. (웃음) 그럴 땐 어쩔 수 없이 새로 배열한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기술적으로 튀는 것을 제거하거나 다듬는 정도고 이야기의 흐름은 현장에서 생각한 순서대로 붙이는 편이다.

-<라오스> 이후 계획에 얽매이지 않는 촬영방식을 선호하게 된 이유가 궁금하다.

=영화과에 다닐 때는 계획을 미리 정해놓지 않으면 불안했다. 스케치한 걸 고스란히 옮겨야 한다는 강박만 늘고, 영화가 좋아서 시작한 일인데도 정작 영화 만드는 일이 재밌다는 생각을 못하며 지내고 있더라. 좋은 영화를 만들기 이전에 내가 즐거웠으면 하는 마음으로 무모한 시도를 한 게 <라오스>다. 영화 촬영과 동시에 무언가를 계속 발견해가는 과정에 매력을 느꼈던 것 같다.

-멜로, 코미디, 미스터리, 스릴러 등 여러 장르가 불균질하게 뒤섞여 있다는 감각이 내내 기이하게 다가온다. 장르적 연출을 의식한 부분도 있나.

=너무 어둡지 않기만을 바랐다. 외국 풍경에 취해서 감상적인 방향으로 흐르는 것도 경계하고 싶었다. 장르적 관점에서 본다면, 나는 1부와 2부 모두 코미디라고 생각하고 찍었다.

-<라오스>에 비해 인물들이 훨씬 외롭고 쓸쓸하다. 그런데도 감독은 코미디를 먼저 꼽는다니 의외다.

=비극적인 것이 비극적인 것으로 와닿지 않는 것, 그게 코미디 아닐까. <국경의 왕>엔 현실이라고 느껴지지 않는 부분이나 과장된 부분, 영화에서만 가능한 부분이 꽤 있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가볍게 미소 지으면서 볼 수 있다. 웃으며 극장 밖을 나섰을 때, 뒤를 돌아보면서 사실은 이것이 비극이었구나 하고 깨달을 수 있으면 좋을 것 같다.

-낯선 공간을 배경으로 준비 중인 새 작품이 있나.

=조현철 배우와 또 언제쯤 떠나면 좋을지 이야기를 나눴다. 여름이 지난 후 타이나 멕시코, 리투아니아 중 한곳으로 떠나고 싶다. 이런 식으로 촬영하고 싶은 로케이션만 죽을 때까지 평생 다녀도 다 못 가볼 정도로 방대한 리스트가 마음속에 있다. (웃음) 이야기는 현장에서 바뀔 가능성이 높으니 제목만 알려드리면 타이에서는 <수나라 황제>를, 리투아니아에서는 <리투아니안 러버>를, 멕시코에서는 <신생대의 삶>이란 영화를 찍고 싶다.

-왕에 이어 차기작에서는 황제를 불러들인다. (웃음)

=어쩌면 본격적인 장르물을 찍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된 제목이 아닐까 싶다. 왕, 황제라는 단어의 어감을 통해 영화에서나 가능한 비현실적 캐릭터, 커다란 캐릭터를 욕망하는 것 같다. 일종의 허세가 느껴지는 단어라는 점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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