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 철저히 설계되었으나 매혹되기는 어려운
2019-03-14
글 : 홍은미 (영화평론가)
화장한 남근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이하 <더 페이버릿>)가 시작되면 곧바로 눈길을 사로잡는 장면이 등장한다. 연설을 마친 앤 여왕(올리비아 콜먼)의 머리에서 시녀가 왕관을 내리자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던 여왕이 이제야 살겠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목을 늘여 근육을 이완한다. 섬세하고 부드럽게 연속되는 동작 끝에 의아하게도 그녀의 얼굴엔 아이들이 토라졌을 때 나올 법한 뚱한 표정이 머문다. 짧은 숏 안에서 올리비아 콜먼은 군주로서의 자태와 신경증적이고 유치할 수 있는 속성을 드러내는 제스처를 이행해가며 앤 여왕의 캐릭터를 단번에 구현해낸다. 이 장면은 효용적일 뿐 아니라 단순하고 유연하다.

그래서 이상하다.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영화가 아닌가. 사회 시스템의 억압과 폭력, 인간의 추악함과 고독 등 인간사의 보편적인 어둠에 날 선 메시지를 관철하기 위해 현란한 작전을 펼쳐온 감독의 작품이 아니던가. 우화적이고 신화적인 요소를 끌어들이고, 상이한 앵글과 리듬을 지닌 숏들을 충돌시키며 논리의 자리를 낯선 감각으로 대체하는 부조리극을 만들어온 감독이 갑자기 변한다는 건 믿기 힘들다. 그리고, 믿기 힘든 건 끝내 믿을 수 없는 일이다. 영화를 통틀어 가장 편안하고 아름답게 느껴지는 이 장면이 지나가고 나면, 한번도 보지 못한 영화를 만들기 위해 분투하며 자기 세계의 관습을 완성해가는 란티모스의 세계가 본격적으로 열린다. 앤 여왕과 그녀의 연인이자 충신인 사라(레이첼 바이스), 사라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생존 전략을 펼치는 애비게일(에마 스톤)의 삼각관계가 지독하게 설계된 세계. 이 세계는 많은 이들을 매혹하며 상찬을 끌어내고 있다. 그러니 란티모스 영화의 긴장감을 간혹 즐긴 적 있으나 한번도 비범하다고 여긴 적 없는 이의 이견 하나 정도는 끼어들어도 되지 않을까 한다.

우선 <더 페이버릿>을 보며 떠올린 다른 영화 한편을 경유하고 싶다.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그 연유가 나자신도 궁금한 영화, 알베르트 세라의 <루이 14세의 죽음>(2016)이다. 란티모스의 전작도 아니고, 영향 아래에 놓인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도 아닌, 완전히 다른 계열에 속한 작품이 왜 떠오른 것일까. 당시 영국이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을 치르고 있는 적국의 군주가 루이 14세라는 사실 때문에 연상된 건 분명 아니다. 알다시피 두 영화는 시대적 정황에 대해선 궁정을 맴도는 웅성거림 정도로 다룬다. 형식적인 면에선 양극단에 있는 영화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극도로 미니멀한 양식 안에서 절대왕권을 쥐었던 군주의 죽음을 응시하는 <루이 14세의 죽음>과 요란한 형식으로 양당정치의 균형에 공들였던 군주의 삶을 형상하는 <더 페이버릿>의 접점이 무엇일까 생각해보았을 때, 비슷한 시대적 배경 때문에 질문이 시작된 건 아니다. 두 영화는 희미하게 접촉하고 있지만 강력하게 공유한 관심사 한 가지가 있다. 쇠약해지는 군주의 신체와 얼굴이며 병환의 상태다. 그러니까 두 감독 모두 갖가지 병을 안고 살았던 군주의 신체적 상태에 주의를 기울이는데 그 시선이 판이해서 왜 그럴까 하는 의문에 사로잡힌 것이다.

거칠게는, 알베르트 세라의 경우 신체 표면에 몰두하는 방식이 곧 그의 영화 구조가 되었고, 란티모스의 경우 권력과 욕망의 구조를 보여주고자 하는 야심이 신체의 표면을 필요로 한다고 요약할 수 있겠다. 이렇게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세라가 하나의 대상을 비추기 위해 그 대상만을 관통해간다면 란티모스는 대상의 본질을 관통해낼 것이라는 믿음 아래 곁가지의 대상들을 동원한다. 요컨대 세라가 군주의 죽음에 숭고한 의미를 담지 않고, 죽음에 이르는 신체의 물질적인 상태 자체에 집중함으로써 그의 표현대로 “죽음의 생활”을 비춘다면, 란티모스는 신체의 상태와 행위에 집중함으로써 ‘패턴화된 권력의 순환과 욕망의 생활’을 형상화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래서 우리는 세라의 영화 끝에서 루이 14세의 죽음을 목격할 뿐 아니라 우리의 기억이 새겨진 장 피에르 레오의 육체와 온전히 만나 가슴이 요동치는 걸 주체할 수 없지만, <더 페이버릿>의 끝에서 나는 권력의 요체인 앤 여왕이 자신의 육중한 신체를 애비게일의 머리를 손으로 짓누르며 지탱하는 광경을 목도하며 허탈감을 감출 수 없다.

마지막 장면들에서 슬픔이 깊어 텅 비어버린 앤의 얼굴과 욕망의 대가를 처참하게 치르고 있는 애비게일의 얼굴, 두 얼굴 사이로 앤의 상실감의 표상인 토끼들이 오버랩되며 점차 얼굴들이 사라져간다. 이 장면들은 앤 여왕이 통풍으로 고통에 휩싸이는 밤의 장면들과 정확히 대구를 이룬다. 이 고통의 밤은 시공간의 감각이 무너져 내리는 것처럼 시간적 간격이 있는 여러 장면이 몽환적으로 오버랩되는데, 그중 탈진해가는 여왕의 얼굴과 사라의 얼굴, 두 얼굴 사이로 애비게일의 모습이 겹쳐지는 장면이 있다. 두 장면을 순서대로 보자면 영화는 결국 출구 없는 지옥에 빠져버린 얼굴들을 보여주면서 세 인물의 처절한 파국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이 오차 없는 전환과 도식적인 구조를 두고 불평할 일은 아닐 것이다. 다만 인물들의 신체가 영화를 위해 희생 제의를 치르는 듯한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더 페이버릿>은 생동하는 육체의 질감에 무관심하다. 정념과 힘의 논리를 따르는 육체의 관습적인 제스처와 활동을 펼칠 뿐이다. 다만 전형적인 여성성과 남성성, 동물성과 인간성을 혼재시키거나 더하고 제거함으로써 관습적으로 보이지 않도록 우리의 감각을 교란하는 것이다. 이 영화엔 우선 소위 말하는 남성적이고 여성적인 캐릭터가 서로 바뀌어 있다. 여성이기에 정계에 진출할 수 없지만, 휘그당의 실질적인 수장이라고 볼 수 있는 사라는 감상에 휘둘리지 않고 사냥과 승마에 능한 인물이다. 반면 토리당의 할리 당수(니콜라스 홀트)는 화장을 즐기는 데다 새침한 소녀 같은 몸짓과 말투를 구사한다. 그에겐 남근이 존재하지만 앤 여왕의 궁정에서 가장 쓸모없는 것 중 하나가 그것이다.

남성의 권력은 여성에 좌우된다. 최고 권력자가 여성인 데다 그녀는 여성을 사랑하며 그 대상에게 의존하는 아이 같은 습성까지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여왕은 아이 같은 몸짓으로 놀기 좋아하며 보살핌도 원한다. 모성과 군주의 도리와 힘의 논리 또한 알고 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그는 신체가 갖은 병으로 고통받고 있어 정치에 집중할 수 없다. 앤 여왕이 병환으로 의회에 더 기댈 수밖에 없었던 건 사실이지만 그녀의 신체적 고통은 영화에서 더 정교하게 재현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사라와 애비게일의 자리바꿈, 권력 이동이 순조롭게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더해 신체 훼손이라는 촉진제도 필요하다. 동료 시녀의 악의적인 장난으로 애비게일이 손에 화상을 입지 않는다면, 사라가 애비게일의 신분 상승 욕구로 인한 사고로 얼굴에 상처를 입고 미모를 잃어 여왕에게 조금 더 일찍 내쳐지지 않는다면 욕망과 사랑과 권력의 이동은 지연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화적인 서사가 빠진 자리에 동물적인 제스처(애비게일의 구애 장면)가 들어서고, 신의 시점 같은 초월적인 시선이 빠진 자리에서 와이드 앵글과 광각렌즈로 인물들을 더 미약한 존재로 보이도록 만들고, 불길한 사운드로 더 정교하게 서스펜스를 형성하는 과잉된 장치에 가려진 <더 페이버릿>의 실체라는 생각이 든다. 나로서는 철저히 설계된 이 기이한 세계, 결국 균질하고 편편해 보이는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세계에 매혹되긴 힘들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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