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살인마 잭의 집> 라스 폰 트리에는 판단 불가의 영화를 꿈꾸는가
2019-03-14
글 : 김소희 (영화평론가)
나를 비난할 수 있는 자는 오직 나뿐?

<살인마 잭의 집>에 반대하는 유일한 방식은 어떤 유혹에도 굴하지 않고 절대로 영화를 보지 않는 것이다. 영화를 향한 어떠한 거부반응도 영화의 위력을 증명하는 일화로 사용될 뿐이다. 그렇다고 자신의 무감함을 증언하는 쪽도 주의할 필요가 있다. 이는 영화에 대한 공격이 아니라 이상한 방식의 자기 파괴 행위가 될 공산이 크다. (대체 얼마만큼 자극이 있어야 반응하시겠습니까.) <살인마 잭의 집>을 보지 않아야 할 이유는 자명하다. 이 영화에는 잔인한 연쇄 살인방식의 재현이 있으며, 더 나쁘게는 그것을 예술 작품화 혹은 희화화시키는 잔혹함이 있다. 첫 번째 사건의 피해자 여성(우마 서먼)은 잭(맷 딜런)이 휘두른 자신의 잭(자동차 수리용 공구)에 맞아 얼굴이 으깨진 채 죽는데, 이러한 얼굴 형상이 피카소풍의 회화로 연결되는 지독한 농담 같은 시퀀스가 등장한다. 살인의 결과를 예술적으로 포장하는 것은 희생자에 대한 저열한 조롱만큼이나 불쾌하기 짝이 없다. 더군다나 그것이 가해 당사자의 머릿속에서 나온 것이라면 더욱 그렇다.

불쾌감은 이중으로 증폭되고

놀랍게도 영화에서 살인 행위보다 더 큰 불쾌감을 주는 것은 따로 있다. 살인 이후 잭이 시신을 처리하는 방식이다. 관객은 시체를 마구 다루는 잭을 보면서 시신을 거둬들이려는 안티고네와 파리의 모르그 시체공시소에 몰려든 구경꾼의 심리 사이에 방황하며 잭의 행위를 지켜봐야 한다. 잭의 행위에는 묘한 지점이 있다. 보통 죽음은 돌이킬 수 없는 끝이며, 시신은 쓸모없는 것으로 치부되어 버려지거나 숨겨진 것을 생각해보면 이 영화에서는 역설적으로 죽은 몸의 중요성이 강조된다. 잭의 행위를 통해 전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불려 나온 죽은 몸들은 죽어서도 고통을 받는 것일까, 아니면 다른 가능성으로 이행한 채 보존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할까.

잭의 행위를 판단하는 데 애매한 그늘을 드리우는 것은 그의 연출적 욕망이다. 잭의 청결 강박증은 디테일한 부분에 집착하는 감독을 연상시킨다. 사체를 특정 장소에 배치한 뒤 네거티브로 기록하는 잭의 모습에서 배우들의 엄격한 조종자로서 감독(혹은 여타의 예술가들)이 오버랩된다. 자유의지를 가지고 움직이던 것들을 자신의 의도대로 얌전히 고정하고 싶어 하는 연출 욕망은 누군가를 죽인 뒤 의도대로 조종하는 행위를 통해 극단적으로 표현된다.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런 방식의 유비 관계는 결코 잭의 행위가 가진 불쾌함을 완전히 해소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불쾌감은 이중으로 증폭되는 쪽에 가까운데, 잭이라는 인물과 영화가 단단히 맞붙은 채 분리되지 않으므로 관객은 영화 안으로도, 밖으로도 도망칠 수 없다.

영화가 관객의 위치를 옥죈다고 느낀 다른 이유는 잭이 영화 내부에서 우리의 판단을 기다리는 대신 관객의 자리를 침범하기 때문이다. 영화는 암전 속에 살인마 잭과 버지(브루노 간츠)가 나누는 대화로 시작된다. 이 대화는 에필로그에서 다시 영화 내부의 이야기로 치환되지만, 그것은 감독이 관객을 실험하기 위해 덧붙인 보너스 트랙처럼 보인다. 이들이 화면 밖에서, 관객과 똑같은 것을 보고 있다는 사실은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를 통해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버지와 잭의 대화만 들리는 오프닝의 블랙 화면은 이들이 관객과 마찬가지로 영화 시작 직전의 암전 상태에 있음을 증명하는 것 같다. 두 사람은 흡사 감독의 자아가 둘로 나뉘어 투영된 분신처럼 보인다. 관객은 잭과 버지의 음성으로 발화된 라스 폰 트리에 코멘터리 상영본을 감상하듯 영화를 보게 된다.

자기 반영적인 영화라는 감독의 확언이 없었더라도, <살인마 잭의 집>을 끌어가는 코멘터리 방식은 이것이 자기 반영적 영화임을 증명한다. 이때 자기 반영성은 판단을 거부하는 자폐적인 음울함을 띤다. 누군가는 이 영화가 관객에게 명확한 호불호를 선택하기를 종용하는 영화라고 평하기도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잭은 자신의 행위를 반성하고 회개하기를 끝까지 거부한다. 대신 버지가 잭의 말에 적절히 반기를 들면서 예상되는 비판에 적절히 대비한다. 영화 내부에서 이미 잭의 행위와 (이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에 관한 불호와 반론을 펼치고 있기에 여타의 비판은 어느 정도 무력한 것이 된다. 트리에는 자기변명과 이에 관한 비판을 스스로 수행한 뒤에 자신을 지옥에 빠뜨리는 것으로 자족적인 처벌을 감행한다. 이 밖의 모든 비판으로부터 숨는 듯이.

이 글을 쓰면서 잭의 살인을 의미화하는 것만큼은 피하고 싶었지만, 한 가지 측면은 언급해야겠다. 잭은 살인 대상을 무작위로 선정했다고 말했지만, 버지의 말에 영감을 받아 잭이 서술한 사건의 재현 속에서 유독 강조되는 것은 ‘얼굴’이다. 잭과 피해자와의 관계는 핸드헬드로 포착된 클로즈업된 얼굴 숏의 충돌로 예고된다. 이것은 라스 폰 트리에 영화에서 특별한 지점은 아니다. 다만 여기에서 부딪히는 얼굴은 라스 폰 트리에의 인장과는 사뭇 다른 지점을 향한다. 그의 주된 범행 수법은 목을 조르는 것인데, 이때 카메라는 누군가의 미소 짓거나 불신하거나 겁에 질린 얼굴이 서서히 굳어가는 과정을 포착하는 데 초점을 둔다. 때때로 죽음은 얼굴을 완전히 잃는 것으로 드러난다. 첫 번째 사건은 피해자의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파편화시키는 범죄였으며, 두 번째 사건의 피해자는 끔찍한 시신 학대로 얼굴을 완전히 잃게 된다. 죽음이 표정을 잃어가는 것이라면 감정을 모르는 잭은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잭은 거울 주변에 사람들의 얼굴 사진이나 그림을 붙여놓은 채 표정 연습을 한다. 그는 자신의 표정을 조정하는 것을 넘어 죽은 아이의 표정을 가지고 위악적인 변형을 시도한다. 영화에서 얼굴은 인간성의 흔적을 담은 것이거나, 담았음을 가장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잭은 마지막에 어떤 표정으로 추락했을까

감독은 잭에게 단 한번 인간의 표징으로서의 얼굴을 허락한다. 그것은 에필로그에서 잭이 창문을 통해 황홀한 빛을 내뿜는 천국의 광경을 목격할 때다. 어릴 적 그가 가장 좋아했던, 남자들이 열을 맞춰 풀을 베는 광경과 소리를 들으며 그는 조용히 눈물을 흘린다. 그 순간만은 잭에게 공감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그 풍경은 아름답다. 그런데 잭의 얼굴은 정말 그의 인간성을 드러내는가. 그가 무수히 해왔던 연기의 일환은 아닌가. 감독은 그에게 마음을 놓은 직후 살해된 무수한 이들처럼 관객을 위험에 빠뜨리려는 것일까. 지옥을 빠져나가는 계단에 닿기를 고대하며 순순히 벽을 타는 잭의 모습은 회고 속 잭과 달리 어딘가 어수룩해 보인다. 그가 나락으로 떨어지는 마지막 순간, 카메라는 부감숏으로 그를 위에서 내려다본다. 관객은 그가 지옥불에 가까워지며 우리의 시야에서 멀어지는 것을 얼마간 지켜보게 된다. 이때 옷의 형체를 통해 그가 떨어지는 것이 보이는데, 잭의 얼굴은 이미 어둠에 가려진 채 보이지 않는다. 감독은 자신이 잭의 다른 자아임을 확언하듯, 방금 그가 빨려 들어간 화면을 네거티브로 변형시킨다. 잭은 마지막에 어떤 표정으로 추락했을까. 마땅한 표정을 찾지 못한 것은 관객도 마찬가지다. 라스 폰 트리에 역시 그럴 것이다. 텅 빈 얼굴을 사이에 두고 마주하게 된 두렵고도 끔찍하고 애처로운 동일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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