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세르지오 레오네 / 출연 헨리 폰다, 클라우디아 카르디날레, 제이슨 로바즈 / 제작연도 1968년
자꾸만 펼쳐보게 되는, 밑줄 가득한 손때 묻은 소설 같은 영화들이 있다. 한컷, 한신의 밀도에 숨죽이고 도대체 저 숏은 뭘까 하며 고민하게 만드는 영화들. 그중 하나가 오래전 누군가의 말처럼 공기가 느껴지는 영화, 바로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의 <옛날 옛적 서부에서>다. 하지만 무엇보다 첫신에서 열연을 펼치며 종횡무진 날아다닌 파리의 윙윙거림 같은 부끄러움으로 남는 영화. 오랜 간절함 끝에 4수 만에 입학한 대학의 오티. 몇 순배의 술잔이 돌자 서먹하고 데면데면했던 분위기는 사라지고 선배, 동기들은 자신들의 베스트영화로 ‘선빵’을 날리기 시작했다. 당시 나에게 영화란 풍문으로 들었지만 보지 않은 영화, 말 그대로 듣도 보도 못한 영화, 봐도 안 본 것 같은 영화 그리고 보지도 않고 본 것 같은 영화들로 나뉘어 있었다. 정말이지 동서양을 망라하고 두루두루 꼼꼼하게 흘러나왔다. 우리가 내뱉은 영화들은 곧 자신의 수준이며 정체성이었으니까. 그러니 내가 얼마나 초조하고 불안했겠는가. 나를 키운 건 극장도, 비디오도 아니라 8할은 극장에 비치된 영화 전단지고 2할은 도서관 서가에 꽂혀 있는 영화 잡지였으니까. 가급적이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쪽을 선택했지만 술기운에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새어나온 영화가 바로 <옛날 옛적 서부에서>였다. 내가 주워 담기도 전에 여기저기에서 영화에 대한 상찬이 터져나왔고 나는 잡지에서 읽은 문장들을 일상언어로 바꾸는 놀라운 임기응변을 발휘했다. 때마침 이에 질세라 누군가 다른 영화 제목을 내뱉으며 간신히 위기를 넘기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후 나는 연거푸 잔을 비웠다. 빠른 속도로 의식을 잃고 싶었다. 이야기가 길어지면 바닥을 드러내는 건 시간문제니까.
그렇게 개강을 하고 파고에 휩쓸린 조각난 스티로폼처럼 집과 학교를 왔다 갔다 하던 어느 날, 오티 날 같은 방에 있던 말수가 적고 어딘지 냉소적인 미소를 짓던 선배가 내게 다가와 “그 영화 너무 멋지죠”라고 물었고 순간 나는 “뭐가요”라고 말했다. 짧지만 강렬한 어색함. 선배는 “<옛날 옛적 서부에서>요”라고 말했고 나는 그제야 “아, 웨스트요. 당연하죠. 너무 멋지죠!”라고 말했다. 선배의 냉소적인 미소가 수줍고 달뜬 미소로 바뀌고 있었다. 불안했다. “공기가 느껴지지 않아요?” 공기라니? 이야기가 길고 깊어질 거 같았다. 무서웠다. 너무 오래전에 봐서 기억이 안 난다고 할까? 안 봤다고 할까? “그런 영화를 찍고 싶어요. 영화 속 공기가 그대로 전해지는 영화요.” 그냥 도망칠까? 빈혈인 척 쓰러져 버릴까? 자퇴하고 나오는 길이라고 할까? 나는 그 선배가 어떤 영화를 찍든 말든 영화의 공기고 나발이고 지금 이 공기를 피하고 싶었다. 다시 냉소적인 미소를 되찾은 선배는 “후배, 나중에 술 한잔하면서 영화 얘기해요”라고 했다. 얼마 후 나는 어렵게 영화를 구해서 봤다. 하지만 불행히도 ‘안 봤지만 본 거 같은’에서 ‘봤지만 안 본 거 같은’ 영화가 됐다. 선배가 말한 공기를 느끼기는커녕 몇번이고 비디오플레이어를 멈추고 창문을 열어 담배 연기로 무거워진 방 안 공기를 환기시켜야 했다. 그리고 10년이 지난 어느 날, 우연히 영화를 다시 봤다. 어땠을 거 같은가? 그리고 다시 10년. “선배, 조만간 술 한잔하면서 그때 못한 영화 얘기해요!”라고 호기롭게 말하고 싶지만 아마도 난 또, 서둘러 의식을 잃는 쪽을 택할 거 같다.
● 김중현 영화감독. <가시>(2012), <이월>(2019)을 연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