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 / 출연 이우라 아라타, 오다 에리카 / 제작연도 1998년
내 인생에서 단 한편의 영화를 고른다면 무엇일까. 나는 세계의 미래를 결정짓는 사람처럼 고민하고 있었다. 수없는 제목들, 이야기들, 선택들, 이름들이 떠오르고 사라졌다. 동시에 그 영화를 보던 당시의 내가 소환되어 그 시절이 갖는 의미들을 내 앞에서 떠들었다. 고민은 영화 자체의 의미, 영화를 보는 시간의 의미에 이어 영화를 만드는 의미까지 이어졌다.
<원더풀 라이프>는 천국으로 가기 전 공간, 림보의 이야기다. 림보의 직원들은 도착한 망자들에게 지난 삶에서 영원히 머물고 싶은 한순간의 기억을 묻고, 그들을 위해 그 순간을 재연해준다. 한편의 영화를 고르려 삶 전체를 탈탈 털며 돌아보는 내 모습이 딱 영화 속 인물들이었다. 두꺼운 일기를 뒤적이며 삶의 한순간을 찾듯 영화를 떠올리다 끝내 이 영화를 골랐다. 이 선택은 그동안 나를 위로하고, 때로 다그치며 함께해준 모든 영화와 삶의 순간들, 그리고 내가 만난 모든 인연에게 바치는 헌정의 의미이다. 영화를 처음 보았을 때의 인상이 기억난다. 당시 나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강렬한 꿈은 있었으나 막상 배울 길이 없어 습관처럼 좌절을 느끼며 살 때였다. 내 일상의 어느 것 하나 영화와 닿아 있는 것이 없었다. 수영강사와 연극 극장 안내원으로 일하면서 단편영화 현장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항상 지쳐 있었다. 다른 길을 가고 있으면서 너무 먼 꿈을 욕심내는 건 아닌지 나를 원망하며 살았다. 그래도 영화는 열심히 챙겨 봤다. 그게 내 자존감을 지키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때 얻어걸린 영화다.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안으로는 드라마 속 인물들이, 밖으로는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점차 삶과 죽음에 대해 성찰하는 느낌을 받았다. 분명히 이미 만들어진 영화를 보는데 영화가 마치 생물처럼 움직이는 에너지를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이 영화를 대하는 자세가 전해졌다. 언젠가 그 경지에 가까워지고 싶다고, 나도 이런 영화를 만드는 일원이 되고 싶다고 다시 한번 꿈꾸게 되었다.
이 영화는 감독의 전작 <환상의 빛>(1995)과 완전히 다른 미학을 제시한다. 대사가 엇갈리는 오류가 있고, 편집의 타이밍에는 분명 전작의 탄탄하게 짜인 리듬감이 보이지 않는다. 아름다운 풍경과 롱숏이 사라지고 그 풍경을, 그리고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얼굴에 집중한다. 후반부로 가면서 그 얼굴이 점차 자신들의 과거를 응시하게 되고, 또 다른 얼굴은 과거를 바라보는 그 인물을 응시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나는 숭고한 순간을 만날 수 있었다. 이 영화의 몇몇 배역은 배우가 아닌 일반인이 연기했다. 영화가 시작되면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그들에게 삶의 가장 의미 있는 한순간을 골라달라고 질문을 던진다. 첫 질문이 전해졌을 때 그들은 이 롤플레이를 간지러워하는 듯한 표정을 짓는다. 그런데 후반부에서 자기 기억 속 한순간을 눈으로 봤을 때 그 얼굴들 안에는 감독이 믿는 영화라는 것 자체가 담겨 있는 느낌이었다. 그것은 영화를 보고 그 영화가 자신의 삶으로 확장되었을 때 보여주는 관객의 얼굴이었다. 영화 내내 보던 같은 이의 얼굴 안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난 것일까. 그는 자신의 한순간을 보고 있었으나 나는 마치 그의 얼굴을 통해 그의 삶 전체를 들여다보는 느낌을 받았다. 사후 세계를 그리며, 죽은 자를 연기하고 있었으나 강력한 활기가 넘실대고 있었다.
이 영화로 나는 내 한 시절의 문을 열어본다. 기억은 다른 기억과 만나고, 수많은 고민들, 선택들, 이름들을 스쳐 보낸다. 뚜렷이 존재하고 있다고 믿는 지금의 나처럼, 그들도 엄연하게 그 자리에 존재하고 있었다. 그 시절의 내 곁에 유령처럼 조용히 서본다.
● 김의석 감독. 한국영화아카데미 27기. 단편 <오늘은 내가 요리사>(2009), <구해줘!>(2011)를 연출하고, 한국영화아카데미 장편영화 제작연구과정 10기에 합류해 <죄 많은 소녀>(2017)를 완성했다. 부산국제영화제 뉴커런츠 부문 수상을 시작으로 여러 영화제에서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