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스토피아로부터]
캡틴 나의 캡틴
2019-03-27
글 : 권김현영 (여성학자)
일러스트레이션 : 마이자 (일러스트레이션)

2019년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에 맞춰 <캡틴 마블>이 개봉했다. “<캡틴 마블>은 페미니즘을 위한 가장 거대한 발언대이기 때문에 이 영화에 참여하는 것이 기쁘다.” 브리 라슨이 캐스팅 후 한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이 말 덕분에 브리 라슨은 영화가 개봉할 때까지 수많은 공격을 받았다. 별점 테러는 한국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었다. 개봉 전 영화에 관한 정보가 공개될 때마다 설정에 대한 비판과 외모(?!)를 둘러싼 공격이 이어졌다. 별점 테러단은 역대 마블영화 중 최악이며 그에 걸맞게 관객의 외면을 받을 것이라고 장담했다. 결과는 상영 첫주에 가려졌다. <캡틴 마블>은 첫주 흥행성적만으로 손익분기점을 훌쩍 넘었을 뿐 아니라 히어로들이 총출동한 <어벤져스> 시리즈에 이어 높은 흥행성적을 기록하는 중이다.

그러니까 <캡틴 마블>은 스크린과 스크린 바깥, 두곳에서 동시에 개봉해 동일한 서사로 관객을 만나는 중이다. 스크린 안에서도 바깥에서도 여자주인공이 넘어서야 하는 장애물은 성차별주의 그 자체다. 경계를 넘으려는 여성들, 자기에게 주어진 자리에 만족하지 않는 여성들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그 자리에 적합하지 않다고 비난받는다. 도전할 기회를 겨우 잡아도 실패는 용납되지 않는다. 실수와 실패 없는 성장은 없다. 하지만 여자에게 허용되지 않은 삶을 선택한 여자주인공들은 도전 자체가 실수라고 생각되기 때문에 실패해도 아무도 실망시키지 않는다. 그럴 줄 알았다는 식의 차가운 비웃음만이 돌아올 뿐이다. 아마 <캡틴 마블>이 흥행에 참패했다면 별점 테러를 한 이들을 비롯해 페미니즘을 증오하던 모든 이들이 그럴 줄 알았다고 말했을 것이다.

<캡틴 마블> 이전에는 <원더우먼>이 있었다. 최초의 여성 슈퍼히어로 원더우먼 역시 페미니즘과 함께 탄생했다. <원더우먼>의 작가 윌리엄 몰턴 마스턴은 여성 참정권을 주장했고, 산아제한운동의 선구자 마거릿 생어의 동료였다. 그는 “새로운 유형의 여성상에 대한 심리적 프로파간다로서 원더우먼을 창조했다”고 말한 바 있다. 초능력을 가진 끝내주는 몸매의 백인 슈퍼히어로 여성인 원더우먼은 여성 역시 저스티스 소사이어티의 일원이라는, 지구를 지키는 영웅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자부심을 안겨주었지만 원더우먼의 역할은 고작 비서였고 함정에 빠질 때마다 특별한 이유 없이 쇠사슬과 밧줄로 묶였다. 성적 환상을 충족시키기 위한 장치라는 비판을 피해가기 어려웠지만, 여성 슈퍼히어로물의 흥행을 위해서는 희생될 만한 문제라고 생각되었다.

하지만 2019년의 슈퍼히어로 캡틴 마블은 굳이 이런 타협을 시도하지 않는다. 캡틴 마블은 남성 관객의 성적 판타지를 충족하기 위한 코스튬을 입지 않고,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기 위한 인정 투쟁에 목매달지 않는다. 상대를 제압하고 손에서 불을 뿜으며 미사일을 요격하고 우주를 날아다니는 여성 슈퍼히어로가 등장하는 <캡틴 마블>에는 그다지 인상적인 액션 신은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중추신경계를 자극하는 쾌락이 없는 것은 아니다. 여성 슈퍼히어로가 관객에게 제공하는 가장 강력한 쾌락은 “마침내 자유로워진 순간”이라는 감각을 전달할 때다. 가장 강한 순간이 아니라, 가장 자유로운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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