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리포트]
미국작가조합 초청해 3일간 열린 세계 최초 ‘시나리오 크레딧 모의 조정 세미나’
2019-03-29
글 : 김소미
사진 : 최성열
시나리오 크레딧 위한 합리적 매뉴얼 만든다

지난 3월 20일부터 22일까지 아트센터 플랫폼엘에서 ‘시나리오 크레딧 모의 조정 세미나’가 열렸다. 한국영화계의 고질적 문제인 시나리오 크레딧에 관한 문제의식을 환기하고 광범위하게 논의하자는 취지의 자리였다. 한국시나리오작가조합(이하 SGK), 한국시나리오작가협회(이하 작가협회), 한국영화감독조합(이하 DGK),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가 공동 주최한 이번 세미나는 미국작가조합(Writers Guild of America, 이하 WGA)이 실시하는 크레딧 조정기준과 절차가 합리적이라는 주최사간의 공감대를 바탕으로 마련됐다. SGK와 같은 국제작가조합연맹 소속인 WGA가 한국의 요청을 받아들여 크레딧조정사무국 국장인 레슬리 매키, 선임행정관 셀리 버미스터, 그리고 <터미네이터3: 라이즈 오브 더 머신>의 작가이자 베테랑 조정관인 존 브란카토를 파견했다.

시나리오 크레딧 조정, 시연으로 기준점 논의

행사 첫날인 20일엔 WGA의 크레딧 조정 방식을 소개하는 설명회가 열렸고, 나머지 이틀간 WGA가 선별한 두건의 실제 사례를 바탕으로 한국 패널들이 크레딧 모의 조정 절차를 체험했다. WGA에 따르면 이런 형태의 모의 조정 시연은 전세계 최초다. 신입 회원에게 조정 매뉴얼을 설명하는 세미나가 열리기는 하지만, 실제 조정 과정은 집필조정사무국의 기밀로 다뤄 외부인이 접근할 수 없고 미국 내에서도 모의 시연을 연 사례는 없다. 이는 그만큼 한국영화계에 집필 크레딧에 얽힌 갈등이 만연하고, 명확한 기준점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뜨겁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2018년 12월에 DGK, SGK, 작가협회는 영진위에 WGA의 크레딧 조정 방식에 기초한 ‘시나리오크레딧조정위원회’(가칭) 설립을 요청했고, 영진위는 공정환경조성센터를 통해 지원에 나섰다. 이처럼 영화계가 뜻을 모은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영화 크레딧에서 작가들의 영역은 유독 주관적이다. 원안, 각본, 각색 등 크레딧 명칭에 대한 정의가 없을 뿐 아니라 해당 업무에 기여한 복수의 창작자 중 어디까지 크레딧에 포함할지, 크레딧의 순서를 어떻게 정할지도 난제다. 크레딧 권한은 제작사의 소임이기 때문에 일부 영향력 있는 감독이나 제작사의 입김으로 세부 사항이 조정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신인 작가나 감독이 크레딧과 관련해 부당하게 피해를 입은 경우에도 피해 사례를 접수하고 중재해줄 만한 마땅한 기관이 없는 것이 현실이다. 한편 억울하게 크레딧에 오르지 못하는 사례가 있는가 하면, 한국영화의 시나리오 크레딧이 기여도가 낮은 사람도 기재하면서 방만해졌다는 지적도 있다.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2014)의 크레딧을 두고 김성호 감독과 신연식 감독 사이에 분쟁이 생겼던 사례처럼, 크레딧 조정 다툼은 작가뿐 아니라 감독에게도 중대한 숙제다.

할리우드는 시나리오 크레딧을 두고 다툼이 생길 경우 WGA가 나서 이를 해결한다. WGA의 시나리오 크레딧 매뉴얼은 1941년에 미국 영화방송제작자연합과 단체 협상을 거쳐 최초로 최소 기본 합의서를 도출한 것으로, 현재 약 700페이지에 달한다. DGK의 민규동 공동대표( <허스토리> <내 아내의 모든 것> 감독)는 “지금까지 78년간 준용돼온 좋은 선례가 있으니, 이를 참고해 한국적 특수성을 반영해보자는 취지다. 초기에는 진통이 있을 수밖에 없지만, 가이드라인이 자리잡히면 분명 효용이 생길 것”이라고 내다봤다.

시나리오 기여도는 객관화할 수 있는가

WGA 크레딧 조정 매뉴얼의 관건은 ‘기여도 측정의 객관화’다. 취재 과정, 트리트먼트(시놉시스보다 구체적인 형태로 영화 전체의 스토리를 정리한 글.-편집자), 초고, 여러 편의 수정고, 그리고 각색과 윤색 단계에 이르기까지 최종 촬영 대본에는 다수의 어문 저작물이 뒤섞이게 된다. 물론 중간에 참여한 작가의 작업물이 최종고에서 흔적을 찾기 힘들 수도 있다. 세부적 요소의 오리지널리티, 작품을 맡은 시기, 작업 분량, 최종 촬영본에 기여한 정도 등 어떤 각도로 바라보는지에 따라 개인간 이해관계가 첨예할 수밖에 없는 지점이다. WGA는 이때 작가가 집필한 절대적 분량으로 기여도를 결정하지 않는다. 최종 대본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극적 구성(이야기의 뼈대), 새로 만들거나 완전히 다르게 바꾼 장면의 여부, 캐릭터 묘사 혹은 관계 설정, 구체적인 대사에 미친 영향력을 파악한다. 또 기여도의 의미에 대한 합의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 판단은 매우 주관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복수의 조정관이 다수결로 합의를 도출한다. 산술적으로는 최종 대본을 기준으로 통상 33% 이상(오리지널/비오리지널 시나리오, 최초/후속 작가, 작가/감독 여부에 따라 기준 요건은 달라진다) 기여한 사람에게 각본 크레딧을 부여하도록 명시해 기여도를 계량화하는 노력을 더했다.

3월 21일과 22일에는 WGA 매뉴얼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국의 작가, 감독, 제작자·프로듀서가 3인1조를 이뤄 두건의 실제 사례를 두고 모의 세미나를 진행했다. 21일에는 이용연 작가(SGK), 모지은 감독(DGK), 정상민 아우라픽처스 대표(한국영화제작가협회)가 22일에는 한수련 작가(작가협회), 이호재 감독(DGK), 강명찬 프로듀서(한국영화프로듀서조합)가 참석했다. WGA가 제시한 첫 사례는 <체이싱 매버릭스>(2012)로 최초 트리트먼트만 쓴 작가 A와 초고와 수정고에 관여한 작가 B·C 그리고 최종 대본을 쓴 작가 D 사이의 크레딧 조정이 진행됐다. 결과는 트리트먼트를 쓴 작가 A에게 원안 크레딧을 부여하고, 나머지 세 작가 중 C에게만 단독으로 각본 크레딧을 부여하는 것으로 모의조정관들이 만장일치를 이뤘다. 이는 WGA의 실제 판결과 동일한 결과다. 최종 대본을 쓴 작가 D의 크레딧에 대한 고민도 이어졌다. 각본에 33% 이상 기여했는지 판단하는 WGA의 방식에 따르면 작가 D는 어떠한 크레딧도 받지 못하지만, 한국의 상황을 감안하면 D가 크레딧을 받지 못하는 결정은 통용되기 어렵다는 의견이 공감을 샀다. 이는 WGA가 크레딧 구분과 표기 인원에 제한을 두는 데서 기인했다. 대개 원안(story by)과 각본(screenplay by)으로만 집필 크레딧을 구분하며, 크레딧당 최대 2인(간혹 복수의 1팀을 1인으로 간주)의 병기만 허용한다. 또 각색(adaptation) 크레딧을 권장하지 않는다. 모의조정관으로 참석한 정상민 아우라픽처스 대표는 “제작사 입장에서는 비교적 기여도가 낮은 분을 어떻게 크레딧에 올릴지 굉장히 난감한 경우가 많다. WGA 매뉴얼을 한국 상황에 적용할 경우 각색 크레딧에 대한 세심한 고려가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다소 배타적으로 보일 수도 있는 WGA의 이런 방식은 오리지널리티에 주요하게 기여한 작가들만 표기함으로써 근본적으로 집필 크레딧의 가치와 위상을 높이는 데 무게를 둔다. 그러나 할리우드에서도 지속적으로 개선이 요구되는 지점이라 WGA쪽 역시 각본 크레딧 정도는 아니지만 나름대로 의미있는 기여를 한 작가의 크레딧 표기를 위한 개선점을 찾고 있다고 밝혔다.

한국형 시나리오 크레딧 조정, 앞으로의 변화는?

또 원안과 각본을 동일인이 맡은 경우 ‘written by’(저작)라고 표기하는 데 한국에서는 각본으로 통용될 뿐 이 개념이 정착하지 않았다. 할리우드가 전반적으로 원안을 중시한다는 점은 눈여겨볼 부분이다. 오리지널 시나리오(원천 저작물에 기반하지 않고, 최초 작가의 집필 과정에 다른 작가가 개입하지 않은 시나리오)라면 수정고를 거쳐 최종 촬영고에서는 초고의 내용이 흔적 없이 사라졌다 해도 초고 작가에게 최소한 원안 크레딧을 보장하는 식이다. 향후 수익 분배에서도 원안 작가는 상대적으로 배분율이 높다. 최종 대본에 비해 원안의 위상이 낮은 한국영화계의 시나리오 인식에 변화를 촉구하는 대목이다.

현재 DGK, SGK, 작가협회는 영진위 공정환경조성센터와 함께 2020년 시나리오크레딧조정위원회(가칭) 발족을 목표로 한국형 조정 절차와 기준을 연구 중이다. SGK 김병인 대표는 “크레딧 표기 문제를 바로잡으면 근본적으로 시나리오의 질적 발전에 기여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크레딧 관련 논쟁이 고질적으로 생기지만, 업계 전반의 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하는 점에 대해 민규동 감독은 “지난한 과정으로 보였던 필름에서 디지털로의 전환처럼, 한국형 크레딧 조정절차도 빠르게 정착할 수 있다”면서 패러다임의 변화를 강조했다.

한국시나리오작가조합 김병인 대표 인터뷰

시나리오 크레딧, 씨앗은 뿌려졌다

-세미나 이후 DGK, SGK, 작가협회로 구성된 TF팀은 어떤 활동을 하게 되나.

=한국영화제작가협회(KFPA), 한국영화프로듀서조합(PGK)쪽에도 인력을 요청하려 한다. 올해 안에 세부 실행안과 위원회 인력 구성 등을 마련해 2020년 초에 시나리오크레딧조정위원회(가칭)를 발족하는 것이 목표다. WGA에 따르면 미국에는 11명의 정직원이 있다. 할리우드에서 1년에 300편 정도의 크레딧이 나가는데, 지난해에는 77편이 조정 대상이었다고 하더라. 직원 수에 비하면 생각보다 조정 건수가 많지 않은 편이다.

-우리나라 정서상 신인 작가는 조정위원회에 이의 제기하는 것을 망설이는 상황도 예상된다.

=WGA도 그래서 자동 중재 방식을 도입했다. 감독이나 제작자가 시나리오 크레딧을 받으려면 반드시 중재를 거쳐야 한다. 작가들끼리 얽힌 경우, 우선 제작사가 제시하는 잠정적 크레딧을 확인한 뒤 작가 중 1명이라도 이의를 제기하면 그때 조정위원회에 요청하면 된다. 우리나라 환경에서는 워낙 많은 감독이 각본에 참여하기 때문에 이 방식을 그대로 적용하기는 물론 힘들다. WGA 크레딧조정사무국의 레슬리 매키 국장은 한국 상황을 듣더니, 감독이 시나리오 초고 작가일 경우 자동 중재에서 빼주면 되지 않느냐는 의견을 제시하기도 했다.

-이번 세미나의 성과는.

=모두가 추상적으로만 느끼던 문제점을 구체화하고, 멀게만 느껴지던 미국의 방식을 가까이에서 체험했다. 특히 <체이싱 매버릭스>의 시나리오에 대한 모의조정관들의 판결이 실제 WGA 판결과 동일하게 나왔다. 매뉴얼이 제대로 작동한다는 사실을 작게나마 확인한 것이다. 앞으로 합리적인 한국형 조정 방식을 구체화해갈 수 있겠다는 믿음이 생겼다. 씨는 이미 뿌린 거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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