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게리 마셜 / 출연 알 파치노, 미셸 파이퍼 / 제작연도 1991년
운 좋게 시나리오를 쓰며 살아가고 있지만 작가가 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바로 답하지 못한다. 특별히 무엇을 했다기보다 배우를 덕질하며 영화에 빠졌기 때문이다. 공부보다 영화 보는 일을 우선시했고, 문제집 살 돈으로 영화 잡지를 구입했으며, 재수하면 반년은 영화를 마음껏 볼 수 있겠다 싶어 수능을 포기했었다. 대학 불합격 통보를 들었을 때, 3초간의 아쉬움 직후 전신을 감싸던 설렘이 아직도 뇌리에 정확히 박혀 있다.
나를 영화판으로 이끈 은인은 미셸 파이퍼다. <배트맨2>로 시작된 짝사랑은 <스카페이스> <레이디호크> <사랑의 행로>로 이어졌다. 마우스 클릭 몇번으로 영화를 찾는 시대가 아니었던 터라 그녀가 나오는 영화를 구하려고 전국 깊숙이 숨어 있는 비디오테이프들을 찾아다녔다. 버스로 2시간을 가서 테이프를 빌려 오면 4일 안에 반납하러 다시 2시간을 가야 하는 시절이었다. 그렇게 본 영화들은 내 스무살 세포 구석구석으로 흡수됐다. <프랭키와 쟈니>는 그중에서도 유달리 가슴을 파고드는 영화였다. 프랭키(미셸 파이퍼)는 데이트 은퇴를 선언한 식당 종업원이다. 혼자 살아가는 건 두렵지만, 사랑에 빠지는 것도 두렵기 때문이다. 쟈니(알 파치노)는 복역하다 출소하는 날, “뉴욕은 위험한 곳이야. 조심해”라는 간수에게 “그럼 이제 뉴욕이 저 때문에 바뀔 겁니다”라고 응수하는 낙천주의자다. 복역하는 동안 아내는 재혼했고 아이들은 자기보다 능력 있는 새아빠를 얻었다. 주위에 해피 바이러스를 전파하지만 정작 자신은 고립감과 외로움에 사무쳐 하루를 버텨낸다. 이런 남녀의 사랑 이야기가 <프랭키와 쟈니>다. 운명도 판타지도 없이 말라비틀어진 현실만 있는 그런 사랑 말이다.
게리 마셜 감독은 <귀여운 여인>을 만든 이듬해에 이 영화를 내놓았다. <프랭키와 쟈니>는 마법이 풀린 <귀여운 여인>이다. 내게는 마치 감독이 <귀여운 여인>에 대한 미안함으로 만든 영화 같았다. 왕비로 신분 상승하는 엔딩도, 누더기 옷을 드레스로 바꿔줄 마녀도, 유리 구두도 이 영화엔 없다. 사랑을 두려워하는 식당종업원과 감자를 장미 모양으로 깎아주는 전과자 요리사의 녹록지 않은 현실이 전부다. 흥행은 처참히 실패했다. 관객이 입장료 내고 보고 싶어 하는 이야기가 아니니까. 어느 허름한 비디오 가게에서 찾아낸 이 영화는 재수 생활의 설움과 고립감을 견디던 내게 큰 위안이 됐다.
“누구도 제 상처를 잊게 해주진 못해요.” 프랭키의 상처는 깊었다. 전남편의 구타로 임신할 수 없게 된 그녀에게 쟈니는 상처를 치유해주겠다고 섣불리 말하지 않는다. 그저 프랭키를 지켜보며 자신의 상처를 보여줄 뿐이다. 극중 라디오 DJ는 드뷔시의 <달빛 선율>을 들려주며 말한다. 사랑의 위대함에 대해 말한다면 모두가 어리석다고 말하겠지만 세상이 뭐라든 사랑을 한번 믿어보고 싶다고.
덕질은 사랑이다. 요즘 영화를 해체하고 분석하면서 팍팍하게 공부하는 걸 보면서 나는 슬픔을 느끼곤 한다.
● 윤현호 작가. <나는 아빠다> <변호인> <공조>의 시나리오와 드라마 <리멤버: 아들의 전쟁> <무법 변호사>의 각본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