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이런 작은 영화까지 챙겨주는 <씨네21>은 항상 무척 감사하고, 기자님도 참언론인입니다. <오늘도 평화로운>이 손익분기점을 넘기면 사비를 털어서라도 참언론인상 트로피를 제작해서….” 백승기 감독은 오늘도 평화롭게 재밌는 상상을 한다. 사비를 털어 무언가를 만드는 일은 백승기 감독에겐 이제 아주 흔한 일이다. 여건이 될 때까지 기다리는 대신 스스로 여건을 만드는 개척정신으로 어느덧 세편의 장편영화를 찍었다. 혼자라면 불가능했을 일. <숫호구>(2011)에서 원준(백승기)의 섹시 아바타로, <시발, 놈: 인류의 시작>(2016)에서 최초의 인류 시발(始發)놈으로 누드 투혼을 불사른 배우 손이용이 <오늘도 평화로운>에선 주성치와 백승기와 원빈 등을 짬뽕한 캐릭터 영준을 연기하며 백승기 감독의 일당백 아군이 되어준다. <오늘도 평화로운>은 ‘중고나라’ 사이트에서 노트북 사기를 당한 뒤 사기꾼 일당을 잡기 위해 중국으로 향하는(인천 차이나타운을 중국인 척 속이지만 거기에 속을 관객은 없다) 영준의 복수극이다. 노트북 사기를 당한 백승기 감독의 눈물 나는 실화에서 기인한 작품이며, 슬픔을 코미디로 승화하는 온갖 패러디가 난무하는 저예산 C급 코미디영화다. 누구나 감독과 배우가 될 수 있다고 말하는 백승기 감독과 그의 페르소나 손이용 배우를 만나 평화롭게 지난날의 영화 만들기를 추억했다.
-벌써 세 번째 영화를 개봉한다.
=백승기_ 삼세판이란 말이 있어 그런지 세 번째 개봉이라 뭔가 여느 때랑 다르다. 영화를 세편쯤 만들면 그 감독의 색깔이 보이기 시작하지 않나. 사람들이 이번 영화를 어떻게 봐줄지 설레기도 하고 전편보다 잘돼야 한다는 부담도 있다.
=손이용_ 영화를 만드는 전 과정을 감독님과 함께했기 때문에 가족 같은 느낌이 있다. 함께 영화로 살아가는 느낌이어서 누구보다도 이 영화가 잘됐으면 하는 마음이 든다.
-이제는 ‘가내수공업 저예산 C급 코미디’ 하면 자연스럽게 백승기 감독이 떠오른다.
백승기_ 이전에는 내 영화가 호감을 사지 않은 것 같은데 <오늘도 평화로운>은 전보다 긍정적인 반응을 얻는 것 같아 기쁘다. 제작비가 없어서 가내수공업 방식으로 영화를 만들 수밖에 없었고 그렇게 세편을 연속으로 만들고 나니 이제는 우리만의 스타일이 자리잡은 것 같다. ‘돈이 없어도 영화를 찍을 수 있어야 한다’, ‘없으면 없는 대로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하자’라는 우리만의 철학이 있다. C급이라고 일부러 못 만드는 게 아니다. 우리는 언제나 최선을 다해서 영화를 만들고 있다.
-영화를 만드는 환경이 조금씩 나아지고 있나.
백승기_ 경제적으로 나아진 건 없다. <오늘도 평화로운>의 경우 판이 커졌지만 제작비는 더 부족한 상태였다. 환경을 생각하면 힘들어야 하는데 촬영하는 동안은 힘든 줄 몰랐다. <숫호구> <시발, 놈: 인류의 시작> 때와 달리 이번엔 SNS를 통해 배우와 스탭을 공개로 모집했다. 누구든 자기가 할 수 있는 만큼 참여하면 된다는 원칙이 있었고, 그렇게 자발적으로 모인 사람들 덕에 활기차게 찍을 수 있었다.
손이용_ 그렇게 참여한 배우들이 영화를 아주 진지하게 대했다. 그들의 자세와 태도를 보면서 새삼 많은 것을 배웠다. 그들에게 연기로는 1도 지기 싫어서 안 보이는 곳에서 열심히 연습했다.
-<오늘도 평화로운>은 중고나라 사이트에서 노트북을 사려다 150만원을 사기당한 백승기 감독의 경험에서 비롯된 영화다. 영화로 만들 만큼 충격이 컸나 보다.
백승기_ 그 일이 있기 전에 홍삼 사기를 당했다. 운전 중에 신호 대기에 걸렸는데, 그 짧은 시간에 가짜 정관장 홍삼 15만원어치를 사고 말았다. ‘내가 이런 일을 다 당하는구나. 이번에 경험했으니 앞으로 사기당할 일은 없겠다’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1년 뒤, 정확히 15만원의 10배인 150만원을 사기당했다. (웃음) 노트북 거래 금액 150만원을 입금하자마자 귀에서 삐 소리가 나면서 당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발, 놈: 인류의 시작>을 끝내고 왠지 모를 공허감이 밀려와 다시 파이팅하기 위해 노트북을 사려 한 건데 사기까지 당하니 세상이 나한테 왜 이러나 싶더라. 지금은 150만원에 시나리오 산 셈 치자고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사기 친 분한테 오히려 감사하고 있다. 그분에게 이런 영화를 만들었다는 걸 꼭 알려주고 싶고, 만나서 술 한잔하고 싶다.
-<극한직업>(2018) 정도로 흥행하면 사기 친 당사자를 만날 수도 있을 텐데.
백승기_ <극한직업>만큼 흥행하고 흥행 수익의 반을 주겠다고 하면 전국의 모든 사기꾼이 다 나서지 않을까. 내가 그 사람이라고. (웃음)
손이용_ 감독님이 노트북 사기당한 날 바로 내게 전화를 했다. ‘이용아~’ 목소리를 듣자마자 알 수 있었다. ‘이 형, 무슨 일 있구나.’ <시발, 놈: 인류의 시작>을 끝내고 감독님의 멘탈이 약해진 상태였다. 자신의 모든 것을 불태우고 재가 된 상태였다고 할까. 그런 상황에서 사기까지 당했으니 얼마나 힘들었겠나. 시간이 좀 지나선 ‘이용아, 안 되겠다. 영화로라도 꼭 복수해야겠다’라고 하더라. 그 말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단기간에 시나리오를 완성했고, 캐스팅까지 후다닥 해버리더니 영화를 뚝딱 완성했다.
백승기_ 페이스북에 배우를 모집한다는 글을 올리고, 일주일 동안 배우 모집하고 2주 동안 촬영했다. 캐스팅부터 크랭크업까지 3주 걸렸다.
-본인의 복수심을 결국 영화에 쏟아낸다. 사기 친 일당을 잡기 위해 중국으로 떠나면서 복수극이 펼쳐진다.
백승기_ 중고나라 사이트 거래 사기는 영화 초반부의 소재일 뿐 이 영화는 복수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살면서 본 복수를 그린 모든 영화의 명장면과 클리셰를 거침없이 이 영화에 쏟아부었다. 이야기 구조는 심플하다. 1990년대 홍콩영화나 누아르영화와 이야기 구조가 거의 같다. 착한 주인공이 변을 당해 복수를 결심한 뒤 시련을 겪다가 조력자를 만나 함께 복수를 하는 이야기다.
-처음부터 패러디가 컨셉이었나.
백승기_ 영화를 패러디로 배웠다. 영화를 학교에서 배우지 않았고 현장 경험이 많은 것도 아니다. 나도 저런 좋은 영화를 만들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다가 명작들을 패러디해 나만의 버전으로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가위손>(1990)의 패러디 <망치손>, <다빈치 코드>(2006)의 패러디 <달마도 코드> 같은 습작을 친구들과 만들었고, 그러면서 내 영화에 패러디가 하나의 기법처럼 자리잡은 것 같다. 특히 이번 영화는 주성치에 대한 존경과 애정을 가득 담았다. <오늘도 평화로운>의 주인공 영준은 <파괴지왕>(1994)의 주인공 하금운(주성치)과 성격은 물론 의상도 거의 유사하다.
손이용_ 영화에 패러디 장면이 많이 등장하지만 연기할 땐 특별히 누구를 참고하려고 하지 않았다. ‘나는 주성치다’ 혹은 ‘나는 원빈이다’ 생각하고 연기하기보다는 자연스럽게 상황에 몰입해 연기했다. 촬영 전부터 감독님과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캐릭터 개발을 같이했기 때문에 캐릭터와 상황을 완전히 몸에 익힌 채 현장에서 연기할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아저씨>(2010), <해바라기>(2006), <테이큰>(2008) 등 여러 복수영화의 명장면을 패러디한 장면이 백승기 감독만의 색깔로 키치하게 잘 표현된 것 같다.
-<아저씨>의 원빈처럼 바리깡으로 머리를 미는데, 삭발하는 게 아니라 가운데 머리만 민다.
백승기_ 그 장면은 꼭 패러디하고 싶었다. 원빈 배우와 상반된 사람이 그걸 따라하면 웃길 것 같았다.
손이용_ 복수하기 전과 후, 캐릭터의 비주얼 차이가 드러나면 좋겠다고 해서 밀다 마는 아이디어가 나왔다. 그 범상치 않은 머리가 영준의 결의를 보여준다고 할까. 촬영 땐 웃어서 엔지날까 봐 그게 제일 걱정이었다. 한번 밀면 끝이니까.
-그 머리로 일상생활을 하는 데 지장은 없었나.
손이용_ 재밌었다. 살면서 그런 머리를 언제 또 해보겠나. 우리 어머니도 좋아하셨다.
백승기_ 내심 부러웠다. 이용이가 너무 재밌어 보여서. (웃음)
손이용_ 모자 쓰고 카페에 가서 일부러 자연스럽게 머리 넘기는 척 모자를 벗으면 사람들이 쳐다보며 화들짝 놀란다. 그 반응을 은근히 즐겼다.
백승기_ 사람들이 이용이를 무서워하더라. 인천에 사는 ‘오늘만 있는 사람’으로 오해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웃음)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메이킹 영상을 보여주는데 늘 웃음이 터져서 엔지가 난다. 백승기 감독 현장에선 웃음을 참는 게 제일 힘든 일일 것 같다.
백승기_ 연기하고 싶어서 영화를 시작했는데 점점 웃음을 참기 힘들어서 연기를 못하고 있다. 물론 혼자서 감독, 피디, 촬영, 연기 등 여러 역할을 소화하다 보니 감독의 본분에 집중하기 어려워서 내 출연 분량을 줄인 부분도 있지만, 배우들의 연기를 보고 있으면 웃음을 참기가 정말 힘들다.
손이용_ 감독님이 웃어서 엔지나는 경우가 제일 많다. 촬영 중 큭큭큭 웃음소리가 녹음돼 오디오 감독님이 ‘누구야?’ 그러면 범인은 항상 감독님이다. (웃음)
백승기_ <오늘도 평화로운>을 찍을 땐 옥상 장면에서 제일 많이 웃었다. 드론으로 옥상 전경을 찍어야 하는데, 생각보다 드론의 조종거리가 좁았다. 드론 촬영이 시작되면 스탭은 모두 구석에 숨는다. 그런데 정작 드론 날리는 사람은 옥상 한복판에서 드론을 조종하고 있다. 사람들이 정신없이 싸우는 와중에, ‘월리를 찾아라’도 아니고, 드론 날리는 사람이 서 있다. 그 장면은 볼 때마다 웃기다.
손이용_ 머리 미는 장면을 찍을 때 제일 재밌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머리를 밀려고 준비 자세를 취하며 거울을 보는데 원빈과 너무 다른 내가 서 있는 게 아닌가. 그런 나 자신을 보며 많이 웃었다.
-사자성어를 활용해 가짜 중국어 대사를 만들었다. 중국어 대사 장면의 포인트는 배우들의 어색한 연기가 아닌가 싶다.
백승기_ 중국어 연기를 하는 탕수육과 딸 탕빙빙 그리고 친구 판웨이를 연기한 이들은 모두 비전문 배우다. 그들은 최선을 다해 연기했다. 결과물은 어설프지만. 그래서 영화가 오히려 재밌어졌다. 만약 이들이 연기를 못하는 척했다면 지금처럼 재밌진 않았을거다. 나도 최선을 다해 디렉팅했고 그들도 최선을 다해 연기했다.
손이용_ 어색한 연기 또한 감독님의 의도다. 연기 같지 않은 연기를 해야 하는 캐릭터와 그렇지 않은 캐릭터가 분명히 나뉘어 있다. 주성치 영화에도 전문 배우와 누가 봐도 일반인 같은 사람이 섞여 있지 않나. 백승기 감독님 역시 그런 식의 조화를 좋아한다.
-두 사람은 고등학교 선후배 사이다. 어떻게 배우와 감독으로 영화를 함께 만들게 됐나.
백승기_ 인천예술고등학교 1기 학생회장이었는데, 졸업한 뒤 학교에 놀라운 신입생이 들어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용이는 운동 잘하고 끼도 많고 재밌는 친구로 학교에서 유명했다. 선후배로 쭉 연락하며 지내다가 <숫호구> 때 마침 일을 쉬던 이용이가 영화 작업을 도와주면서 영화 인연이 시작됐다.
손이용_ 처음엔 배우로 참여하려던 게 아니라 스탭으로 도와주려 한 거였다. <숫호구>에서 백승기 감독님이 연기한 주인공의 아바타 역할이 중요해 자신의 모습을 잘 표현할 수 있는 배우를 계속 찾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내게 아바타 역할을 맡겼다. 처음엔 연기 경험도 없는 내가 주연급 캐릭터를 과연 할 수 있을까 싶어 거절했는데, 감독님이 할 수 있다고 믿음을 줘 아바타가 되기로 했다. 연기를 정식으로 해온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숫호구>로 영화제에 가고 무대인사에 참여하는 일들이 좋으면서도 낯설고 혼란스러웠다. 어떤 사람은 왜 더 열심히 배우로 살아가지 않느냐고 하는데, 나는 지금이 자연스럽다. 생계를 위한 본업이 따로 있으면서 연기 또한 열심히 하는 상태 말이다. 그렇다고 연기를 가볍게 생각한 적은 한번도 없다. 늘 진지했다. 연기가 내 삶의 탈출구 같다는 생각도 든다. 알고보니 나도 꽤 욕심이 있는 사람이더라. 연기를 잘하고 싶다. 나만 할 수 있는 연기가 있으면 좋겠다.
-꾸러기스튜디오의 미래는 어떻게 구상하고 있나.
백승기_ 예산이 없으면 무예산으로 영화를 만들 거고, 투자를 받게 되면 그 안에서 또 최선을 다할 거다. ‘우리는 이런 방식으로만 찍는다’가 아니라 이렇게라도 끝까지 찍고 싶을 뿐이다. 네 번째 영화가 어떤 영화가 될지는 아직 모르겠다. 원래 세 번째 영화를 우주영화로 찍으려 했는데, 노트북 사기꾼이 우주로 가는 티켓을 빼앗았다. 다시 로켓에 점화하려고 하는데 불이 잘 안 붙고 있다. <오늘도 평화로운>과 비슷한 느낌의 현실 코미디를 한편 더 해볼까 싶은 생각도 있다.
-네 번째 영화에도 손이용 배우를 주연으로 캐스팅할 생각인가.
백승기_ 물론이다.
손이용_ 감독님 주머니에 돈이 쌓일 때까지는 나랑 하지 않을까. 돈 생기면 어찌 될지 모르지만. (웃음)
백승기_ 내가 만약 <신과 함께> 시리즈 같은 작품을 찍게 된다면 이용이에게 첫 번째 타이틀롤인 하정우 역할을 맡길 순 없겠지만 주지훈 역할은 줄 수 있지 않을까. (웃음) 어쨌든 주성치와 오맹달 콤비처럼 같이 롱런하면 좋겠다.